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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부버, 나와 너>
소개할 책은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나와 너>(Ich und Du, 1923)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게다가 얇다. 제목도 연애소설 제목만큼이나 달달하다. 이런 이유로 시간 들이지 않고, 간편하면서도 묵직한 뭔가를 채울 수 있을 기대로 구해 읽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라면 첫 페이지 읽고 책장에 꽂아버리는 ‘단호한 소장파’ 독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얇은 책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소책자 고전 시리즈로 유명한 레클람(Reclam)의 작고 노란 독일어판였는데, 첫 페이지부터 쉽고 익숙한 단어들이 구슬 꿰어 굴러가는 듯한 모습이 다른 책과 달리 인상 깊었다. 기껏해야 ‘나/너/그것’, ‘기본’ ‘말’ ‘사람’ ‘경험’ ‘삶’, ‘영원’ 같은 것들이 큰 주제어였다. 게다가 문장도 얼마나 소박하고 간결한지 읽기 편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다만, 그 소박한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깊은 울림 탓에 독서의 속도는 자꾸 느려졌고, 그 쉬운 한두 문장을 생각하느라 멍한 상태가 되곤 했다. 그런 면에서 쉽지만 어려운 책이다.
아쉬운 건, 한국어 번역본으로 그 맛을 담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번역자의 잘못은 절대 아니다. 분명히 매우 쉽고 익숙한 단어, 간결한 문장인데도 불구하고 외국어가 가진 단어와 문장의 사유의 뉘앙스가 구절구절 전달되기란 어렵다. 오죽하면,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을까!
이 책은 분명히 좋은 책이다. 속독 대신 시골길 걸어가듯 천천히 읽어보길 권한다. 좋은 책은 저자가 품은 절절한 고민의 소산이라서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거기 숨어있던 세상의 한 편이 열린다. 부버는 퍽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1878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받고 성장했지만,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추방당해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1965년 사망하기까지 교육자의 길을 걸었던 학자이다.
그런 유럽의 급변하는 정황 속에서 그가 관심 둔 주제는 ‘관계’의 중요성이었다. 이 관계를 사람과 사람, 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만 국한할 필요 없다. 부버가이 책 깊이 숨겨놓은 궁극의 주제는 ‘신과 인간’의 관계다. 아마 이 책이 나온 시기가 제1차 세계대전의 화약 냄새가 걷힌 후 유럽 사회에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한층 깊은 독서가 가능해질 것 같다.
부버는 인간의 모든 삶을 ‘나-너’, ‘나-그것’이라는 관계의 도식으로 풀어낸다. 관계와 만남이 중요하게 강조되다보니 상담학이나 심리학에선 단골손님이고, 기독교 유대교 심지어 불교에서도 이 책을 인용해 저마다의 교리를 설명하곤 한다. 그만큼 이 책은 접근성도 좋고, 해석의 여지도 풍성하다. 사람 사는 동네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렇게 이 책은 관계의 중요성을 깊이 반추해 낸다.
사랑과 책임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나-너’라는 관계는 내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맡기고 던질 수 있는 상태, 즉 전적인 몰입과 신뢰의 상태를 뜻한다. 쉽게 말해 ‘너 없이 나도 없다.’는 말이 가능한 남녀 간 사랑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사랑이란, 상대에 대해 가지는 특별한 관심과 느낌이다. “너와 나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만날 수 있다.”(부버) 시인 김춘수가 노래한 것처럼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대상이 “꽃”이 되는 관계가 사랑이다. 부버의 말로 바꾸면, 사랑이란 ‘그것’(It)으로 있던 존재가 ‘나의 너’로 다가와 머무는 상태다.
이때 진정한 나-너 관계는 ‘너밖에 없어!’라는 유일성(배타성)과 친숙함이 있어야한다. 그 유일한 감정이 사라지면 사랑도 끝이다. ‘너’라고 부를 수 있는 ‘너’가 ‘너 하나’가 아니라 또 ‘다른 너’가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나의 너’가 아니다. 연인 간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다음 일어날 일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불안은 온 존재를 기울일 대상, 즉 참 ‘너’를 만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이처럼 참된 사랑의 관계란 ‘나에겐 너밖에 없다’는 배타적 유일성이 통해야 한다.
부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랑은 하나됨이다. 감정은 소유되지만 사랑은 생겨난다. 감정은 사람 안에 깃들지만 사람은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즉 사랑은 나에 집착하여 너를 단지 내용이라든가 대상으로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 있다. 사랑은 ‘너’라는 한 사람에 대한 ‘나’의 책임이다.” (마르틴 부버, <나와너>, 표재명 역, 26-27)
나-너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는 언제나 ‘너’를 향한 책임의식으로 ‘너’의 모든 짐을 끌어안는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이렇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나의 모든 짐을 끌어안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너는 나에겐 그것(It)아니야. 나에겐 너밖에 없어!’라는 인격적 관계를 선언하고 체험케 하는 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하나님 당신은 나에게 그것(It)이 아닙니다. 나에겐 당신이 유일합니다. 하나님의 짐을 내가 끌어안겠습니다.’라는 고백과 실천도 따라 나와야 마땅하다. 이것이 제1계명의 진정한 뜻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상호특권과 책임이 따른다.
나-너의 관계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서로의 짐을 끌어안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짝사랑이거나 스토킹에 불과하다. 신앙의 영역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여기서 교회의 역할도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는 그리스도를 향해 ‘우리에겐 당신밖에 없습니다.’라는 배타성을 고백한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짐을 교회가 끌어안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 짐이 무엇일까? 그리스도가 죄인과 세상 끌어안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면,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그리스도의 짐은 세상을 위한 책임이다.
교회는 ‘너’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낱낱의 ‘너’ 모임이다. 아래 구절의 울림이 떠나지 않는다. “모든 낱낱의 너는 영원한 너를 들여다보는 틈바구니이다.”(108)
‘우리에겐 당신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가득한들, 사회적 책임을 잊은 교회라면 그곳에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구성원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짐을 어깨에 짊어진 ‘낱낱의 너’이기 때문이다.
*2년 전 독후감 다시 꺼내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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