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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보혜사 (토저 시리이즈7)
1.기쁨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의 기쁨은 ‘반복적인 찬양의 최면’으로 기쁨을 얻으려 하거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기쁘고 행복하다고 자기암시를 하는 기쁨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어떻게 그런 기쁨의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사도들에게 임했던 능력과 똑같은 능력을 달라고 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2.영향력
성령으로 충만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에 더 신경을 쓰며 ‘경건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 살지 않고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살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입니다.
3.주일 신자들
주일 하루만 교회에 와서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은 월요일부터는 딴사람이 됩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생활하고, 험한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면서 살아갑니다. 세상 재미와 세상이 주는 안락에 빠져서 평일에는 기독교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4.혁명과 개혁
혁명은 판 자체가 뒤집어지는 것이고, 개혁은 기존의 체제를 새롭게 개선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혁명적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우리를 완전히 장악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통제 앞에 무릎 꿇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냥 그동안 살아온 삶에 약간의 변화만을 원합니다.
5.죄를 회개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려면 가장 먼저 ‘죄’를 제거(회개)해야 합니다. 죄악을 마음속에 숨겨 놓고 그저 형식적으로 ‘회개’하는 것은 참 회개가 아닙니다. 죄가 있으면 성령님이 그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열망에 불타는 사람은 ‘정결케 하는 불’이 그 온 마음의 죄를 불태워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6.하나님의 음성을 갈망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갈구해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은 미풍(微風)처럼 부드럽고 폭풍처럼 강하고 ‘많은 물소리’(계1:15)처럼 우렁찹니다. 때로는 음악 같고,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장엄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갈망하지 않으면 그런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7.성령에 대한 무지
지금 자신이 성령 충만한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지금 자기가 성령 충만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을 받아본 적이 없고 교리적으로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성령 충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차근차근 천천히 임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급진적이고 분명하게 임하십니다.
8.변화될 각오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먼저 나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온전히 믿어야 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그 순간부터 나의 삶은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각 마을마다 한 둘은 있는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비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성령에 사로잡힌 비정상적인 사람이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9.아담의 타락한 본성
우리는 성령 충만을 원하지만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께 ‘순종’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 충만은 딱 본인이 원하는 만큼만 채워지는 것입니다.
10.깊은 고독
하나님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깊은 절망과 고통을 느낄 때까지 고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런 고독의 고통을 통과해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성령은 선물이지만 그러나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값싼 선물이 아닙니다.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값인 것입니다.
11.나의 그릇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나의 몸을 하나님께 그릇으로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릇을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나의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채워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몸에 담긴 모든 것 마음, 인격, 영, 사랑, 재능, 열망, 꿈 모든 것을 다 그릇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채워 주십니다.
12.성령을 구하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그릇을 드린 다음에 반드시 보혜사 성령님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녀에게는 아무리 빈 그릇이라 하더라도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구하라고 했으니 순종하는 마음으로 구해야 채워 주십니다.
13.마음의 준비
성령 충만은 믿음과 순종으로 받습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님이 나의 몸과 마음과 생명과 존재를 완전히 소유하고 나의 온 인격을 통제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통제는 직접적이지만 또한 온유하고 부드럽습니다. 문제는 내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14.홀연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행2:2) ‘홀연히’는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홀연히’ 임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안에는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렇지만 희미하게 존재하십니다. 우리는 홀연히 임하시는 강력한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15.세상은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은 성령님에 대해 절대 모른다는 것입니다.(요14:17) 세상은 선한 사람에 대해서는 알지만 성령님은 모릅니다. 세상은 선한 사람이 막연하게 좋은 곳(천국?)에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善)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모릅니다.
16.까마귀
홍수가 그친 후 노아의 방주에서 나간 까마귀는 홍수로 황폐해진 세상에 발톱을 박고 썩은 음식을 먹느라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가 인간들 안에 있어 까마귀처럼 황폐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은 죽은 것들 위에 문명을 건설하며 살아갑니다.
17.비둘기
홍수가 그친 후 노아의 방주에서 나간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에게서 발붙일 곳을 찾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찾아오셔서 발을 붙이고 내려앉으시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단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부흥’이라고 알고 있다면 그것은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18.타력의 종교
대부분의 종교는 ‘네 안에 있는 것을 사용하라’고 하는 ‘자력’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마음공부’,‘참선’을 하고 ‘능력 개발’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네 안에 잠자는 사자를 깨워라>라는 책도 썼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기개발’을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위로부터 어떤 능력이 나에게 임하여 나를 변화시키는 ‘타력’의 종교입니다.
19.잠재력과 성령
어떤 이는 “마음을 편히 하고 집중하여 당신 안에 있는 ‘창조적 능력’을 계발하라”고 설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능력인 잠재력을 일깨우라고 하는 것인데, 틀렸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 안의 능력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을 타력으로 받는 종교입니다.
20.제자들의 변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 변화되었는가? 성령을 받은 이후입니다. 그전에는 그냥 권력만 탐하다가 예수님이 죽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고향으로 물고기나 잡으러 떠났던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순간 완전 180도 달라져서 순교까지 한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변화됩니다.
21.기쁨과 재미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재미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기쁨’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없으니 그와 비슷한 ‘재미’를 얻으려고 나이트클럽이나 게임 같은 것으로 발광을 합니다. 교회도 위에서 임하는 기쁨이 없으니 스스로 재미를 만들려고 온갖 전자악기로 사람들의 심령을 홀리려 하고 있습니다.
22.카리스마
성령의 능력을 ‘카리스’라 하고 그것이 밖으로 나갈 때는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말을 하느냐에 따라 ‘잔소리’가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심령에 파고 들어가 쪼개버리는 ‘카리스마’가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권능을 받고(행1:8) 말씀을 선포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이 찢어져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회개하였습니다.(행2:37)
*독서일기 ⓒ최용우
<들꽃편지635호>읽을꺼리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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