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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1장.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적(靈(的)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왜 창조되었는지,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졌는지, 왜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통해 우리는 모든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그냥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다. 특별한 목적과 임무를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인간의 최고 목적은 예배이다. 우리를 지으신 분을 예배하는 것,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에서 창조된 존재이다.
2장. 숨질 때까지 우리의 의무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거울을 보고 그 거울 안에서 자신을 보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큰 영광을 반영하고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영광이 빛나는 것을 보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다.’ 토저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러한 인식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하면 최고로 잘 살다가 떠나는 인생인지 충분히 자각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태어났고 예배를 위해 거듭났다. 우리가 창조되고 또한 재창조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다. 예배를 위해 최초의 시작이 있었고 또한 예배를 위해 ‘중생’이라는 새로운 시작이 있다. 교회의 존재 목적도 예배이다.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
3장.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사람은, 진정한 예배자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종교 프로그램에 몰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성품과 뜻과 마음을 다하여 거룩함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이다. 예배는 도덕적인 존재들의 정상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이다.
4장.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한 거짓된 예배를 경계하라.
우리는 우리 뜻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예배를 위해 태어난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야한다. 가인은 아버지 아담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자랐기에 그 자신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예배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거룩하지 않는 죄인이 마음대로 다가갈 수 없다. 가인의 예배는 속죄의 피가 없는 예배이다. 죄를 안고 임의대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없다. 십자가의 속죄의 보혈로 나아가는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잘못된 예배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마리아인의 예배와 장엄한 것을 명상하며 즐기는 자연숭배는 잘못된 예배이다.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무의미한 싸구려 시(時)에 매료되거나 속죄 없는 가인의 예배,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골라서 믿는 사마리인의 예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지극히 작은 속삭임까지 예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리에 순종하면 어떤 것이라도 예배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성령님이 없으면 참된 예배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5장.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는 참된 예배를 드려라.
예배는 마음으로 느끼고 적절한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감탄을 겸손히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준다. 교만한 마귀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듯이 교만한 사람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난 부흥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들에게 갑자기 예배의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파스칼이 그렇다. 그는 어느 날 밤 하나님을 만났다. 그날 밤의 두 시간의 체험을 종이에 적어 곱게 접어 심장 가까운 주머니에 넣었다. 철학자와 지혜로운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만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파스칼의 하나님이 되신 것을 경험했다. ‘불’이라고 쓴 단어, ‘아멘’이라고 쓴 종이를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어 죽을 때까지 간직한 것은 그의 예배의 행위가 될 것이다.
6장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은 참예배이다
예배에는 질서도, 경건도, 성령님도 계시지 않는다. 기도도 판에 박은 듯 동일하며, 엄숙함도 경이로움도, 거룩한 두려움도 없다. 습관적으로 기도는 하지만 내용은 ‘하옵소서, 해 주소서’ 뿐이다. ‘하겠습니다’는 없고 모두 다 하나님께 명령만 한다. 그것마저도 응답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기도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한다. 상투적인 표현, 재치 있게 들리지만 얄팍한 소리. 경건한 말투,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죽어있는 소리, 막힘없이 번지르르 쏟아내는 명령조의 문장들, 모두가 회칠한 무덤이다. 하나님이 당장 내 앞에 계시다면 이렇게 기도하겠는가? 감히 누구를 속이려는 술수인가? 왜 어린 아이처럼 솔직해지고 겸손하지 못한가?
7장 이제 예배 중심으로 살기로 결단하라
하나님은 예배를 위해 우리를 부르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있다. 진정한 예배에는 성령이 함께 하신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오신다면 당연히 숨을 죽이고 침묵하게 되지 않겠는가? 숭고한 가치의 예배가 이제는 천박한 이기주의로 변질됐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슬프다. 너무 화가 난다.
이젠 미지근한 신앙에서 탈피해야 한다. 반쯤 죽은 것 같은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지 말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남들 보란 듯이 잘살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이마에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를 모른다면, 우리가 왜 크리스찬인지 모른다면,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잃어버린다면, 교회는 슬픔에 치를 떨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예배의 주인은 분노하실 것이다. 예배는 즐겁고 경외롭고 두렵고 놀라운 경험이다. 진정한 예배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독서일기 ⓒ이재익 목사(일본 니이가타교회)
<들꽃편지636호>읽을꺼리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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