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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2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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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22절-28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2절-26절: 부모형제가 병원에 있는데도 돌볼 줄은 모르면서 자기 옷이나 신발 등은 유명메이커로 치장하고, 돈을 빌려서라도 비싼 것을 몸에 감고 있으면서도 죽는 소리를 하고. 그렇게 분수에 넘게 사는 것은 몸보다 옷이 더 귀하다는 꼴이 된다. 말이 문제가 아니라 사는 것을 보아서 네가 그렇게 사는구나. 그 정신으로 돼 있구나.
까마귀 또는 새들을 생각을 하라. 사시사철을 통해 하나님이 기르신다. 당신이 만들었으니까 당신이 기르신다. 그 기르심도 우리의 신앙 믿음의 구원도리와 이치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새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 위나 땅이나 어디에서나 먹을 것이 천지다. 그런데 너희들은 까마귀보다 더 귀하다. 비교급보다도 ‘귀함성에 있어서 너희들이 어느 정도 더 귀하냐’ 그 말이다. 우리는 천국을 이어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기 전에 물질세상을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은 그 이치가 ‘인간아, 생명과를 따먹어라. 일반과도 따먹어라. 그러면 먹고 마시는 것은 염려 걱정이 없다’ 하는 면에서 인간 네가 태어나기 전에 물질세상을 만들었다 그 말이다. 이걸 아담과 하와로만 보지 말고 어린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벌써 먹을 것이 다 준비돼 있다. 말하자면 자기만 부지런하면 먹게 돼 있다 그 말이다.
그런데 먹고 마시고 사는 것에 대한 염려 걱정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안 믿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이니 세상이 소원 목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믿는 사람의 소원 목적이 세상으로 들어가 있다면 이 사람은 예수를 믿지만 선악과 따먹은 그 차원으로 계속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세상물질에 관한 것을 구하고 있다면 그 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은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은 사고방식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성경구절만 이용하며 사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데서 그런 것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기독교회 거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는다. 교회에서 늘 하는 소리가 물질풍부를 부르짖는다. 안 믿는 세상도 물질만능주의이고, 오늘날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건 예수를 믿으면서도 말씀을 안 믿는 거다. 첫째 목사부터가 안 믿으니 그 교회는 세상 일반적 사회 윤리적 도덕적 차원으로 흘러간다. 이건 세상 속화다. 이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선지 사도들을 통해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지 일반 도덕적 차원으로 기록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걸 모를까? ‘성령 성령’ 하고 떠들어도 그 사고방식의 신앙이라고 하는 발상이 성령이 아니다.
성령은 인간 편에서 말하자면 귀신보다 훨씬 좋다. 성령이 귀신과 같은 룰이냐? 악령과 같은 룰이냐?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주님이시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성령님을 어느 정도 차원으로 알고 있느냐? 귀신처럼 알고 있다. 그렇게 알고 있는 그 사고방식 그 지식은 어디서 나온 거냐? 말씀을 어긴 데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마귀의 말을 믿은 데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 안 넘어갔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것보다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체화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기를 그 자리에 세워놓고 자기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김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견적 표면적 세상이 자기에게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게 보이는 것은 선악과 먹은 자기 기준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먹는 제자들이요, 영생의 생명의 말씀을 먹는 제자들이다. 창조의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런 제자들이 세상 것을 염려한다면 창조의 그 주님을 안 믿는다는 말이 된다.
우리에게 사계절을 주신 것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르신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성도가 생명의 말씀으로 영인성장이 잘 되는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증거다. 말씀을 통해서 한 이치가 깨달아지고, 자기의 성격 성질도 고쳐지고, 옳은 지식에 의해서 정신이 고쳐지고 마음이 고쳐지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다. 이건 주님께서 기르신다는 증거다. 또한 일반법칙으로 사계절을 통해서 모든 산천초목 짐승들이 번성하고 자라는 것은, 그렇게 돌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증거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인간 자기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일차적으로 지었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라게 하는 이차 창조를 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이처럼 귀하게 만드셨고 키우시는구나.
귀하게 키운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처럼 무조건 잘 먹이고 잘 입힌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넣어서 듣게 하면서 깨닫게 해서 이런 저런 삶의 영역에서 훈련 연단을 겪게 해서 자기를 귀하게 만들고 눈부신 그곳으로 데려가신다는 말이다.
새나 나무나 짐승이나 고기나 풀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누구를 위해서 그것들을 기르시는 것이냐?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 위에 내실 때 인간들이 먹고 쓰고 마시고 살아가야 할 아무 대책도 없이 만드신 것이냐? 준비를 다 해 놓고 그 가운데 너를 만들었다.
25절-26절: 자기가 같은 연령대보다 키가 작아서 줄을 설 때마다 늘 앞에 서니까 그게 싫어서 밤새 잠을 안 자고 염려를 했더니 키가 한 자나 자랐다는 사람이 있느냐? 그런데 왜 염려를 하느냐? 한 뼘이 아닌 1센티라도 자랐다는 사람은 있느냐? 없다. 자기의 사는 시간을 염려하면 조금이라도 사는 기간이 연장이 되느냐? 안 된다.
그러면 히스기야 왕은 왜 생명이 15년이 더 연장이 됐느냐? 히스기야가 ‘내가 더 오래 살아야 되겠는데’ 하면 연장이 되는 거냐? 연장을 시켜주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생명을 연장을 하건 줄이건 그건 하나님이 해 주셔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육신의 생명이 15년이 더 연장이 됐는데, 이 15년의 연장의 세월 가운데서 누가 태어났느냐? 므낫세가 태어났다. 므낫세가 태어나서 좋은 일을 많이 했느냐, 악해도 악해도 그런 악한 왕이 없었느냐? 히스기야가 미래적인 그 면을 알았더라면 죽게 해 달라고 했을까, 더 살게 해 달라고 했을까? 그걸 우리에게 보게 하는 것은 ‘그 가치를 너희가 따져봐라’ 그 말이다.
오래 산다는 것이 뭘 의미하고 있는 건지? 옳고 바른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좋은 뜻이다. 그런데 젊은 사람이 기운이 팔팔해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좋지 않게 오르내리고, 부모공경도 못하고 이래 놓으면 그 젊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건 아깝지만 부모에게 하는 걸 봐서 ‘그래, 잘 죽었다. 살아봐야 사람노릇 못할 거 잘 죽었다’ 그런 것도 있다.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사람값이 돼야 하겠는데 맨 술이나 퍼먹고 못된 짓이나 하고 돈도 안 벌고 온 집안 식구들을 달달 볶는다면 ‘저런 사람은 먼저 빨리 죽어야 된다’ 하게 된다.
자기의 늙은 나이를 밤새도록 염려하면 자꾸 젊어지느냐? 나이가 많으면 많다고 빨리 죽을까봐 걱정, 나이가 적으면 어른의 대우를 못 받는다고 걱정, 또 키가 크면 크다고 걱정. 왜? 허리가 구부러진다고. 키가 작으면 작다고 걱정. 왜? 맞는 옷이 없다고. 결혼할 나이가 되어도 걱정. 왜냐?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 평생 고생할까봐. 돈이 많으면 ‘어디에 숨길까’ 걱정, 없으면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걱정이다. 산다는 자체가 모든 것이 염려 걱정이다.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됐느냐?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서 생명과는 먹으라고 했는데 그건 안 먹고 먹으면 죽는다고 하는 선악과를 먹고 그 날로 영은 즉시 죽었고, 육신은 점차로 죽어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 모든 인간은 육신이 죽을 때까지 염려 근심 걱정 속에 살다가 걱정 속에서 죽는 거다.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살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처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무엇을 염려한들 해결이 되겠느냐? 예수 믿는 기독자라도 비진리를 먹으면 영인성장 면에서는 즉시 중지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인간입장에서 보면 자기 키를 한 자나 더 크게 늘린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매우 큰일이다. 그런데 왜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까? 인간 자기가 밤새도록 염려 걱정을 하면 키가 1센티가 더 커지느냐? 엄청나게 어려운 건데 하나님의 말씀은 왜 ‘지극히 작은 것을 능치 못하는 너희들인데’ 라고 하시느냐? 누가 보기에 지극히 작은 것이냐? 하나님이다. 만능의 능력자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극히 작은 것이다. ‘그러니 그건 네가 생각할 게 아니라 나에게 맡겨라’ 그 말이다. 자기가 한다면 그건 불가능이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왜 지극히 작은 것이냐? 만능의 능력자의 말씀 한 마디에 생겨지고 없어지고 한다. 또한 지극히 작은 것이란 값지고 중요하고 값나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물질 풍부성은 값있는 게 아니다. 세상에 흔해 빠진 거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부자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그 자체가 이미 타락된 성질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도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되게 해 줘야 되겠다’ 한다면 이건 값진 인생이다.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마음 정신 영적인 면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 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먹고 마시는 그 면으로 치닫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답답한 줄을 모른다. 왜? 배부르게 하루하루를 사니까.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세상살이를 걱정하는 것은 값어치가 없고 하찮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돈을 잘 버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너는 공부만 해라. 돈 벌 생각은 하지 말고 공부만 해라’ 한다면 일반적으로 옳은 말이다. 왜냐하면 공부 속에는 돈이 들어있는 거다. 그런데 공부는 안 하고 자꾸 돈 생각만 한다면 돈이 어떻게 오겠느냐? 아무 것도 모르는 너를 누가 붙잡아 일을 시키겠느냐? 일을 해야 돈이 나오는 건데. 예수 믿는 기독자가 이치가 어그러지면 상식도 어그러지게 돼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쓰시는 이용물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니까 하나님께서 먼 이웃나라 군대를 불러서 이스라엘 안으로 정복해 오게 하신다. 그런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구원싸움을 얼마나 좋아하시면, 얼마나 기쁘셨으면 그 싸움에서 이기라고, 지는 꼴을 못 보겠다고, 이기고 있으니까 지는 해도 세웠다. 해가 넘어가면 어두워서 못 싸우니 해를 멈춰놓을 테니 밝을 때에 부지런히 싸워라 그 말이다. 그 하나님의 소원성이 우리를 향해 있다. 진리가 있을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있을 때에 열심히 구원의 일을 하라 그 말이다. 역사 속의 그 사건을 교훈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에 입각해서 보면 그 이치는 틀림이 없다.
남이 볼 때 우리가 비록 이상하게 생겼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코에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으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걸 계시적으로 보면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다’ 그 뜻이다. 그럼에도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사느냐? 하나님을 떠난 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세상에서 알게 달게 꾸미고 살아봐라. 어느 정도 올라갈까? 부자가 되면 어디까지 올라갈 것 같으냐?
이 세상 물질계의 만물도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우리로 사용토록 하신 것이고,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도 당신이 알아서 주관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일을, 당신이 하실 이 일을 네가 왜 그런 걸 신경을 쓰느냐’ 하는 것이다.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인데 왜 네가 신경을 쓰느냐’ 그 말이다. ‘이룰구원 영적 면에서 신경을 써야지 염려해도 안 될 일에 왜 신경을 쓰느냐’ 그 말이다?
27절-28절: 들의 백합화를 유심히 살펴보았느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실을 만드는 소리, 뿌리에서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 꽃잎 쪽으로 물이 가는 소리들이 다 들린다. 사람의 귀에 들리는 소리의 파장은 20-20000헬츠다. 눈이 내리는 소리도 들린다.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는 시적표현이라고 하겠지만 계시적인 눈으로 보면 우리는 오늘 밤에서 내일 낮으로, 내일 낮에서 내일 밤으로 가는 게 느껴져야 한다. 무슨 소리로 전달이 되고 있는지 느껴져야 한다.
예수 믿는 부모가 자녀를 기르는데 있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사람소리 말고 소리가 아닌 살면서 무언적인 소리가 자식에게 건너가는 게 있다. 이건 귀에 안 들리는 소리다. 이건 소리가 안 나는 소리다. 그런 소리도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가 몇 킬로로 돌고 있는 것이냐? 엄청나게 빠르게 돌고 있다. 해를 중심해서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지구가 해를 중심해서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는데 그 소리가 들리느냐? 이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이 생각을 좀 하고 살자는 말이다. 남이 못하는 생각을 좀 하고 살자. 구원을 향한 그 생각을 하고 살자.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만들었는지? 그래야 모든 만물 속에서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모든 만물 속에서 구원도리 구원이치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다. 언제 어디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네가 어디를 가던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입어지는 이치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하는 의미이다.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배만 부른 것만 생각하느냐’ 그 말이다.
우리는 만물이 고통 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그냥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보는 게 아니라 영능의 실력,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그들이 나타나길 기다린다는 것이다. 만물의 이 소리를 들을 줄 알아라. 너보고 하는 소리다. 만물이 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내가 너에게 기꺼이 쓰임이 되겠다. 나를 좀 써줘라’ 하는데 만물을 하나님의 구원의 뜻에 합당히 쓰는 자가 없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만물이 우리 주님이 오시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할까?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귀처럼 돼 있으니 만물이 너희들에게 쓰이기 싫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쌀을 가지고 막걸리를 만들어서 그걸 먹어놓으면 속에 술이 들어가서 발작을 한다. 발작을 하니 사람을 통해서 도깨비짓을 하게 된다. 왜 발작이냐? 구원을 위해 쓰여질 쌀이 도깨비짓을 하는데 쓰여지니 한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술 먹은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이 도깨비 국물을 먹었구나’ 이렇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만든 만물을 인간들이 해가 되게 쓰는구나’ 이렇게도 되는 거다. 그래서 만물이 사람 속에 술이 되어 들어가서 데모를 일으키는 거다. ‘이런 사람은 도깨비 같은 사람이다’ 하고 속에서 뒤집어 놓는 것이다.
꽃을 보면 아름답다. 꽃을 보면서 ‘이 꽃이 누구 얼굴처럼 생겼다’ 하는 것도 있다. 달을 보면서 ‘누구 얼굴처럼 생겼다’ 하는 것도 있다. 여자를 주로 꽃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요즘 보면 이 꽃에 전부 페인트칠을 해 놨다. 꽃나무가 속에서 맑은 물을 빨아올리고 강한 햇빛을 받으니까 색깔이 영롱하고 향기가 날리는 아름다운 꽃이 핀다. 그런데 온상 속에서 키운 것과, 밖에서 키운 것과는 맛도 다르고 향도 다르다. 그런 것처럼 사람도 속에서부터 정신이 병이 없고, 마음이 병이 없고, 그러니 그 정신 마음으로 자기 몸을 잘 다스려 나가면 이건 칠을 안 해도 잘 익은 복숭아 얼굴 같다. 아가서는 겉으로 본 말이 아니라, 물론 겉도 그럴 런지 모르겠지만 속을 들여다 본 성령님의 말씀이다. 그 고운 빛깔 색깔. 꽃의 색깔을 인간이 100% 똑같이 내지를 못한다. 사람이 살아있는 그 자연의 색깔을 나타내기가 쉽지 않고, 향기 또한 그렇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땅을 만드셨고 백합화를 만드셨다. 누구 보라고? 내가 보고 깨달으라고.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해서 백합화의 얼굴을 씻겨주고, 뿌리로 그 물을 빨아올리게 했고, 햇빛으로 말리게 했고, 바람을 불게 해서 향기를 날리게 하니까 벌과 나비가 찾아온다. 그 광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참 아름답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렇게 길렀다. 하나님께서 꽃을 그렇게 아름답게 내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은 더 아름답고 섬세하겠구나. 아름다운 마음에서 아름다운 것이 나오는구나. 쌓은 선에서 선이 나온다. 창고에 든 대로 나오는구나.
솔로몬의 영광을 백합화와 비교해 보면 솔로몬은 그 아름다움성이 백합화의 아름다움성에 훨씬 못하다. 백합화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솜씨다. 그런데 솔로몬의 영광은 외부로 나타난 것 즉, 왕으로서의 입은 옷, 건물, 물질의 풍요 등으로 된 것이다. 이런 건 전해지는 소문이다. 솔로몬이 아무리 지혜롭고 물질이 풍부해도 살아있는 백합화는 만들지 못한다. 백합화는 신의 솜씨다. 솔로몬 왕의 영광은 인간들의 솜씨자랑이다.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니다.
28절: 우리가 확실히 그 소리를 듣게 생겼느냐? 인간 자기가 꽃보다 귀하냐, 꽃보다 못하냐?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을 백합화 한 송이와 바꾸자면 바꾸겠느냐? 열 송이와 바꾸자고 하면 바꾸겠느냐? 자기 아내와 백합화 한 송이가 그 아름다움이 비교가 될 만한 것이냐? 오히려 아내의 머리에 들국화나 코스모스를 한 송이 꽂아주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거다. 아내의 머리에 하나님의 솜씨를 얹어주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하나님의 안수성,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얹어지면 더 아름다워진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셨고, 우리 코에 하나님께서 입김을 불어넣어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을 말고,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의 지혜지식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능력적인 면에서 성장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닫도록 하시느라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해도 그걸 다 빼앗아 가 버릴 거다. 그리고 자기 몸에다 위험신호를 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눈치를 알아채지 못하고 교만히 산다면 어찌 되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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