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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묵상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날이고, 이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기 위해 우리가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어떤 식으로 묵상하는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잘못된 방식으로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금요일 예배에 참석하기만 해도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여러 유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영적인 유익이라는 건 우리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어서 하루에 한 번 이상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기만해도 은혜가 자동으로 몸에 쌓이고, 점점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십자가 그림이나 모형을 거실 잘 보이는 곳에 놓거나,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그것이 악한 기운을 막아준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자기네 불행을 막는 방패나 부적으로 사용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작은 나무 십자가를 손에 쥐고 시험을 치르면 성적이 잘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런 것들은 십자가의 바른 묵상법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제대로 묵상하려면, 주님이 골고다 언덕에 참혹한 모습으로 올라가실 때 그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 슬퍼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처참한 모습에 동정심을 갖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게 바른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슬퍼하던 여인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차라리 너 자신과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입니다. 왜, 자기 자신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슬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십자가를 부적으로 여기거나 죄 없는 예수님의 수난이 안타깝고 가련하다고만 생각한다면, 아무리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수백 번 십자가를 붙들고 찬송하고 기도한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상관없습니다.
성금요일 함께 모인 이 자리에서 십자가 말씀을 듣고 바르게 묵상할 때 첫 번째 반응은 우선 우리의 심장이 공포로 얼어붙어야 합니다. 배신과 모욕, 매질과 구타, 호산나 환호가 죽음으로 내모는 군중들의 함성, 그리고 선명하게 들리는 못 박는 소리에서 죄인을 가혹하고 엄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8에서 “그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무로 인하여 고난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그 공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6-37에서 베드로가 유대인을 향해 “너희가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고 외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포에 떨면서 사도들을 향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떨며 부르짖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손을 꿰뚫은 못을 보면서, 그 못이 바로 우리의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예수님의 머리를 찌르고 있는 가시관을 보면서, 그 가시가 바로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든 우리의 악한 생각들이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바로 우리가 매달려야 할 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여인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울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최주훈 목사(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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