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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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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예레미야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책에 기록을 해서 바벨론에 가는 시종장 스가랴에게 주어서 바벨론에서 읽고 난 후에 이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에 던지라고 했는데, 책을 물 속에 집어던지면 어떻게 되느냐? 이게 무슨 상징이냐? 미래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행동이 이상하다고 보기보다는 행동은 과정인데, 앞뒤로 보면서 이게 재앙으로 나타난 건지, 좋은 면으로 나타난 건지를 염두에 두고 해석을 해야 한다. 그 책을 물에 던지면 그 내용이 물에 다 지워질 것이니 책에 예언을 기록한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라는 말이 되는 거고, 바벨론에 대해 안 좋은 예언이라면 바벨론의 멸망을 상징하는 거다.
그런데 영해를 하는 사람들처럼 ‘물은 뭐다’ 하게 되면 이상한 해석이 된다. 책을 물 속에 집어던지라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있는 것이니 이 마음을 알아서 거기에 맞게 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물은 하나님의 은혜다. 사망의 물이다’ 하게 되면 책을 물에 던지라고 한 예레미야의 마음이 나오지 않는다. 이러면 계시가 없어져 버린다. 이런 해석을 취하면 안 된다.
‘누가 새를 하늘에 날렸다’ 라고 한다면 ‘큰 새냐 작은 새냐, 봄에 나는 새냐 여름에 나는 새냐’ 하고 새 쪽으로만 생각을 하고 새를 쫓는 사람의 마음이 안 나타나면 잘못된 거다. 성경에서 물질이나 사물이나 사람을 말하는 것은 다 방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도록 해석이 되어야 한다.
또한 성경의 어느 문자 하나만 잡고 해석을 하면서 그것이 정확한 것처럼 하다가는 이단자가 될 수도 있다. ‘너의 죄를 사했고 너의 병을 낫게 했다’ 라고 할 때 부분적인 면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말인지, 아니면 완전히 나은 것을 말하는 건지? 그리고 육이 나았다고 할 때 영적인 면이 나았다는 말을 하려는 건지, 육적인 면이 나았다는 말을 하려는 건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건 없이 단순히 ‘이 사람이 생전에 다시는 병이 안 걸리게 고쳤다’ 라고 말을 하게 되면 뒷감당이 되지 않는 엉터리 해석이 되고 만다. 예를 들면 솔로몬이 지혜를 구해서 지혜를 얻었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다른 면이 벌어진다. 이 때 만일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전혀 변하지 않는 100% 완전한 지혜자로 만드셨다면 그 즉시로 솔로몬을 세상에서 데려가야 한다. 이런 면을 생각을 하지 못해서 성경을 잘못 해석을 하다가 이단자가 된다.
믿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온전을 이루며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자가 없다. 자기가 죽기 전까지는 이룰구원의 기회인데, 세상에 사는 동안에 믿는 자기의 정신과 마음의 중심이 어느 쪽으로 무게가 놓여지느냐에 따라 이룰구원이 달라진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일을 생각하는 쪽으로 자기 마음을 기울이고, 이 면으로 기도도 하고, 이 면으로 물질을 투자하게 되면 그만큼 이룰구원이 많이 이뤄진다.
◆ 엡6: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는데,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자녀를 훈계해야 한다. 그래서 부모는 ‘어떻게 지혜롭게 교육을 해야 할까?’를 늘 생각해야 한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이의 비위를 맞춰주라는 게 아니라 말씀의 교육을 하라는 뜻인데, 이게 안 되면 부모는 하나님을 노여워하시게 하는 거다. 어린아이를 노엽게 안 하려면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지혜롭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니 계속 깨우쳐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셨다.
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라는 말씀도 있는데, ‘초달’은 양육을 의미한다. 초달이란 뼈가 부서지도록 때리라는 말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은 말귀는 못 알아들어도 엄마가 화난 얼굴을 하거나 큰소리로 말을 할 때 우는 것은 뭔가를 느낀다는 뜻이니 어린아이에게는 이런 면으로 교훈을 하는 게 초달이다. 어려서부터 아이에게 교육이 안 되면 커서도 식당에서나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자녀가 된다. 사람은 ‘저 성질을 가지고 자라면 미래적으로 어떻게 되겠구나’ 하는 게 있는 거다.
◆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 지어졌는데, 창1: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었다고 했고, 2장에는 흙으로 지었다고 했는데, 1장의 인간창조와, 2장의 인간창조가 각각 다른 거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모양이 있느냐? 인격체의 활동을 표현하는 거다. 인격체를 두고 하는 말이지 인격체가 없이 그냥 육신의 모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을 흙으로 지었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어진 영을 따라 움직이는 육신을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을 생각할 때는 껍데기 모양만 생각할 게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 육신을 움직일 수 있는 인격체를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라고 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피조물을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표현으로 하나님은 본질이요 원형이고, 인간은 본질이요 원형이신 하나님의 모형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하는 거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이 영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영이고, 우리는 피조물로서의 영이다. 이룰구원을 이뤄서 영을 성장시켜서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처럼 그 나라를 누리게 하려고 인간의 인격체에 육을 입힌 거다. 그래서 영이 중생한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전이라고 하는 것은 영을 기준으로 하고 육신으로 이룰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는 거다. 사람에게는 이 면이 있기 때문에 ‘당신의 입으로 사람의 코에 숨결을 불어넣어서 생령이 된지라’ 이렇게 말씀을 하는 거다.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해도 영 주격이다. 따라서 영육 결합체인 믿는 자기는 그 말씀을 받아서 영을 주격으로 육신이 순종을 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했는데, 이 ‘우리’라는 게 육신을 말하는 거냐, 몸 이전에 인격체를 중심으로 육신까지 말하는 거냐? 후자다. 인격을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육신은 인격체에 따라붙는 거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사’ 라고 한 말씀을 육신에 기준을 두고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나라 사람이겠느냐? 답이 없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인격을 주격으로 생각을 하면 육신은 어떻게 생겼던, 어느 나라 사람이던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다.
‘생령이 된지라’ 라고 하는 것은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영 주격으로 움직일 자다’ 라는 거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격으로 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생령이 된지라’ 라고 하는 말씀이 필요가 없다. 이러면 도덕성도 필요가 없는 거고, 명령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니 짐승과 다른 게 없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중생된 영이 있고,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게 있기 때문에 ‘생령이 된지라’ 라고 하는 거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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