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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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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창: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라고 하셨는데, 왜 이 말씀을 했을까?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었다는 건지? 어떤 뜻으로 ‘우리 중 하나 같이’ 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게 좋은 뜻이냐, 나쁜 뜻이냐? 불순종에서 나온 말이냐, 순종에서 나온 말이냐? 불순종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나쁜 뜻이다.
하나님처럼 하나가 되면 좋은 일임에도 여기서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나쁜 뜻이다. 그러면 어떤 나쁜 뜻이냐? 절대자는 하나님뿐이고, 절대적인 선과 의와 사랑과 거룩과 진실은 하나님의 것뿐인데 불순종한 인간을 향해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했으니까 이건 못된 자식이 아버지의 주권을 침범하고 밀어내고 나라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절대권에 도전을 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타락한 인간을 향해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가치판단 평가성을 선악과 따먹은 자기의 타락되고 저주받은 주관성대로 내리고 사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노릇을 하는 거라는 뜻이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더더군다나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이 되었고 저주를 받았으니 더 말할 게 없다. 설령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생명과를 따먹었다고 해도 존재적으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거다. 다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질 수는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가져야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거다. 이런 존재인 인간이 자기 속에서 타락된 인간의 주관성을 따라 가치판단 평가를 내린다면 자기 속의 이 주관성이 하나님으로 작용을 하는 거다. 이건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 설령 이들이 생명과를 따먹으려고 개구멍으로 들어가려고 할지라도 다시는 에덴동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불 칼로 막고 있다. 사람이 생명과를 따먹고 영생을 하면 좋은 건데 영생을 못하도록 생명과를 못 따먹게 에덴동산 주위에 불 칼이 돌게 했다.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라고 했다.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생명과를 못 따먹게 하려는 것인데, 타락한 인간에게 왜 생명과를 못 따먹게 하는 거냐?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영생과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것인데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에게는 영생을 주기 싫다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생명과를 따먹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럼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생명과를 먹는 대신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니 이런 불순종적 주관성을 가지고는 말씀의 은혜를 못 받는다. 즉 이런 사람에게는 당신의 은혜를 주기 싫다는 선언이 되는 거다. 회개를 하고 자기 속에 있는 불순종성을 내어버려야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이게 은혜를 받는 이치요 고쳐지는 이치다.
믿는 사람이 누가 자기에게 옳은 말을 해 주면 들을 줄을 알면 자기에게 복이 되겠는데 자기 속에서 타락되고 저주받은 성질이 하나님처럼 들어 있어서 옳은 말을 거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애정권 안에서 쫓겨나고, 얻어맞고, 심판을 받게 된다. 안 믿는 사람은 전부 하나님처럼 산다. 어린아이의 고집도 그게 하나님이다.
예수를 믿으면서 좋은 고집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의라고 하겠으나 나쁜 고집은 자타가 해롭다. 그 고집은 피워봐야 자기에게 고통이요 슬픔이요 근심이요 걱정이요 괴로움이다. 자기에게 이렇게 작용이 된다.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독약으로 작용을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의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니 숨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코의 숨을 빨아들이면 인간은 죽는 거다.
자기 몸에 병이 들었으면 마음부터 고쳐라. 마음이 고약하고 고집스러우면 전부가 병으로 들어간다. 반면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면 기름부음이 되어서 그 마음이 유하고 부드럽고 매끄럽게 돌아간다. 부딪히는 게 없다. 그러니 진리의 교훈을 받는다면 자기부터 쳐다보고 고쳐라. 예수를 믿으면서 진리를 따르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가는 거다. 그런데 성경을 가지고 자타를 세상에 빠지게 하고, 말로 사람을 지옥에 처박는 것은 사람의 정신을 죄에 묶이게 하는 것이니 악한 일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진리권 애정권 사랑권 안으로 인도해야 하나님의 약속이 임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했는데, ‘우리의’ 라고 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었다’ 라고 해도 될 텐데 마치 세 분이 한 것처럼 왜 ‘우리의 형상을 따라’ 라고 한 걸까? 여럿이 할 때는 마음을 모으고 의논을 하면서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니 다른 만물을 만들 때와는 달리 인간에게는 특수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특수도모로 만들었다는 뜻이 들어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인간은 만물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특수하게 만들어진 거다.
세상에는 늘 사건 환경이 교체되고 있는데, 믿는 우리는 이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을 기준으로 놓고 자기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자기에게 사건 환경이 닥칠 적마다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과 얼마나 머냐, 가까우냐?’ 하는 게 있는 거다. 이걸 아는 게 성경을 깨닫는 거다. 이런 걸 깨닫는 것은 신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신학도 필요한 거지만 신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성경 구구절절 속에서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이 이렇게 돌아가면 저 쪽 사람은 어떻게 돌아갈까?’ 하는 것도 있는 거고, 현재의 자신을 보면서 과거의 자신을 볼 수도 있는 거다. 인간은 이런 걸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그래서 자기의 과거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서 잘못된 것이 발견이 되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는 도덕성은 언제 키우느냐?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키워야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부모공경의 구원은 중단이다. 이룰구원은 이런 거다. 부부간에, 부자지간에, 모녀간에, 형제간에, 식구들 간에도 이런 게 다 있는 거다. 이룰구원은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걸 생각하는 거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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