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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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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요: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라고 하셨고,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사람을 죽이는 기준과, 유대인들이 사람을 죽이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간 거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니까 이것이 미워서 예수님께서 전하는 말씀을 싫어하고, 전하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업신여겼는데 예수님은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은 하늘로부터 오셨고, 이 땅에서 하늘의 일을 하셨는데, 이 일은 영육 결합체로 된 우리의 영인성장이 잘 되게 하는 것임에도 유대인들이 이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은 성도들의 영인성장의 일을 못하게 막는 것이기 때문에 이 면을 놓고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라고 하신 거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의 육신을 죽이는 것보다 영적인 면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살인을 더 심각하게 보신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율법은 주님께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모세로 통해 주신 거다. 이 율법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입어서 영적 신령적인 하나님의 뜻을 담아서 인간의 용어를 들어서 기록을 한 거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문자적 성문적으로 열심히 지키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너희가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율법을 지키지 않고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라고 하셨다.
유대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문자적으로 잘 지킨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율법을 지킨다는 게 무슨 뜻이냐? 율법의 문자 속에는 영적인 면이 들어 있다. 영적인 면이란 물질적인 것보다 오래 가고, 영원히 가고, 썩지 않고, 불타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신령한 거다. 율법 속에는 이런 성질들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시는 율법을 지킨다는 게 무슨 뜻이고, 안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성문적인 율법은 임시적인 것을 말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된 영원한 것이 들어 있으니 율법 속에서 이 영원한 것을 깨달아서 자기의 정신 사상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율법 속에 들어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을 의미하고,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율법을 성문적으로만 알고 지키게 되면 영적인 면의 감각성이나 도덕적인 면이 막히고 죽고 만다. 예수님은 이 면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거고, 이 일이 하늘의 일인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여서 예수님을 미워하고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거다. 예수님에게는 몸을 죽여도 영원히 죽지 않는 게 있는 건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예수님을 핍박을 한 거다.
율법에는 영원한 뜻이 들어 있는데 이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면 영원한 것을 놓치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키는 거다. 율법을 글자 그대로 보면 임시적, 육적, 세상적, 물질적 사고방식으로 깨닫게 되지만 율법에서 영원한 것을 찾으면 영적인 면으로 들어가게 되고, 영적인 면을 붙잡고 나가면 율법을 지키게 되는 거다. 다시 말하면 율법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소원과 목적, 즉 영원한 것, 영적인 것, 하나님의 것을 깨달아 나갈 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지키게 되는 거다.
일반적으로 자식이 칼이나 연장을 가지고 부모를 죽이려고 하면 부모는 ‘이 자식 놈이 나를 죽이는구나’ 라고 한다. 그런데 실지로 연장을 가지고 부모를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것도 부모를 죽이는 거다. 이렇게 되면 자식도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거다. 정신적인 면을 놓고 하는 말이다. 이런 것은 일반적인 비유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정신적인 면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두 정신 사상이 흐르고 있다. 교회가 세상적으로 외치면 성도의 신앙이 죽는다. 이런 교회에서 어느 사람이 영적으로 외치면 육적 세상적으로 흐르는 다른 교인들이 이 사람을 언행심사로 핍박을 하고 방해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영적으로 외치는 사람을 죽이는 거다. 대인관계적으로만 이런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속에서도 개체적으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옛사람이 자기의 주격이 되면 자기의 새사람이 힘을 못 쓴다. 이러면 자기의 새사람이 자라지 못한다. 이건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거다. 우리의 이룰구원의 정신 사상은 영의 눈을 가지고 분초찰나 순간적으로 자기의 안팎에서 자타의 이룰구원을 죽이고 있지는 않은지를 보는 거다.
우리의 이룰구원은 오늘 이뤄야 할 구원은 오늘 이뤄야 되는 거지 오늘의 구원을 놓치면 내일 이루는 게 아니다. 내일은 내일 이뤄야 할 구원을 이루는 거지 오늘 이루지 못한 구원을 내일 이루는 게 아니다. 오늘 이루지 못한 구원은 그대로 사망계로 흘러간 거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주어진 현실에서 영적인 면에 수입을 보지 못하면 거기에서 이룰구원을 못 이뤘으니 구원으로 살아날 그 부분이 그대로 죽은 거다. 세상에 많은 직업이 있는데, 사람을 영적인 면에서 죄에서 끄집어내서 생명계로, 하나님께로 옮기는 일을 세상의 용어로 직업이라고 한다면 하늘의 직업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존귀 영광스럽게 해 준다고 했다. 당신의 이름을 두고 하신 약속이다. 그러니 당신이 이 약속을 어기신다면 당신의 얼굴은 똥이 되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에서 제일이 되기를 원하고,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세상의 존귀영광을 원하니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를 들어주실 리가 없는 거다.
오늘날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지혜를 구한다고 해도 돈 잘 버는 지혜를 구하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상의 지혜를 백 날 구해도 이 지혜는 자기 살아생전에만, 또는 인류가 생존하는 동안에만 자기에게 유익을 줄 뿐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걸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지혜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면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이 안에는 먹을 거, 입을 것도 다 들어 있다.
믿는 우리가 사람을 알고 사람의 마음을 안다면 이 사람에게 뭐가 없겠느냐? 그런데 믿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자꾸 세상으로 낭비를 하게 되면 자기는 그만큼밖에 안 되는 거다. 믿는 사람이 자기의 세상의 목적대로 사람을 어떻게 하려고 하면 사람의 마음이 제각각인데 들어먹느냐? 그러니 우리는 신앙의 사고를 바로 가져라. 성경에는 무한한 축복이 들어 있다. 세상사람들은 돈이 최고라고 하지만 믿는 우리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다. 사람은 자기 머리의 명령을 따라 자기 몸을 움직이듯이 믿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명령이 먼저다.
안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죄 아래, 사망 아래 놓여 있는데도 이 사실을 모른다. 예수 믿는 사람도 정신과 사상이 세상을 따라 살면 영은 중생이 되었지만 자기의 이성과 몸은 여전히 죄와 사망 아래 놓여 있는 건데 이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 면에 대해 어두우면 마음이 자꾸 세상에 가서 논다. 이런 사람은 금방 시험에 걸린다.
자기의 몸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의의 병기다. 정신과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귀히 쓰신다. 그러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기의 삶이 개척이 되고, 일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를 높여주신다.
◆ 안식교에서는 안식일 날짜를 지키는 것을 중요시 하는데 우리는 토요일을 지키던 일요일을 지키던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날짜만 지키면 소용이 없다. 안식 후 첫 날에 주님이 살아나셨는데, 정통교회에서는 이 날을 주의 날, 즉 주일로 지키는데, 이 주일을 안식교인들처럼 날짜만 지킬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아나신 날을 기념해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니 주일예배를 드린다면 신앙 면에서 산 것이 뭔지를 알고 산 정신과 산 사상을 받고 깨달아야 주일을 지키는 거다.
성수주일이란 예배를 통해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깨달아서 자기가 이 정신과 사상을 가지는 거다. 이게 예수 믿는 거고, 주일을 지키는 거다. 그런데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사람이나,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사람이나 이 뜻을 모른 채 자기 기준으로 지키는 사람이 많다. 그런가 하면 주일에 예배를 통해 산 것, 산 이치를 알게 하는 주님은 발견하지 못하고 얼른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서 쉬고, 먹고, 쇼핑하고, 놀러 다니는 날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믿는 우리는 신앙을 위한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하는데, 믿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기본인 주일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산 정신이 들어가겠느냐? 오늘날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을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산 정신을 받는 날이 아닌 자기의 날이요, 자기의 사무를 보는 날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날로 삼고 사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리게 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이 안 된다. 믿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러면 그냥 하나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일 뿐이지 성격 성질 성품이 주님의 것으로 변하는 것은 없게 된다. 우리는 다른 날은 일을 하느라고 바쁘니까 주일이 되면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교회에 안 나온 교인도 찾아가 보고, 성경도 보고 하는 게 경건의 활동이다.
단:에 오늘날의 아파트를 말하는 것 같은 말씀이 있고, 말세에는 교통이 빠르다고 했는데, 지금은 도로도 좋아졌고, 전철이나 대중교통이나 자가용도 많으니까 다른 날은 일을 하느라고 바쁘더라도 주일이 되면 예배를 마치고 성경도 보고, 차를 가지고 심방도 하면 얼마나 좋으냐? 이게 아브라함의 정신이다. 믿음의 조상들의 삶의 걸음걸이다. 그런데 주일이 되면 예배에 빠지고 차를 가지고 놀러 다닌다면 언제 신앙이 성장하겠느냐?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면 결국은 자기의 영인성장은 다 죽고 망해버린다. 이런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 면에서 현재의 일이요 실질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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