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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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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예언과 방언.
‘예언’이란 일반적으로 육적 물질적인 면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알게 하는 건데, 성경의 예언은 육적인 면으로 말을 하는 것도 이면적으로는 영적인 면의 계시다. 즉 성도의 영인성장이 잘되라고 미리 가르쳐 주는 거다. 그러니까 예언한 사건 환경이 왔을 때 얻어맞고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자기의 영인성장, 즉 하나님의 지혜지식이나, 신적인 도덕성이나, 하나님의 옳음, 즉 능력성을 입으라는 거다. 능력성이란 죄와 사망성과 유혹과 미혹을 이기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 천하장사라고 해도 세상의 유혹과 미혹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왜냐? 세상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으로 살기 때문에 이 수준으로는 유혹과 미혹과 죄성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적으로 날고 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자에게 펑펑 넘어가고, 돈에 펑펑 넘어가는 거다. 지금 당장 안 넘어갔다고 해도 소원 목적성이 세상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넘어진 사람으로 사는 거다.
우리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유혹과 미혹과 죄에 넘어가는 것을 볼 때 이 사람의 이면의 그럴 수밖에 없는 마음중심을 봐야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데서 나오는 지식과 정신으로 살기 때문에 유혹과 미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미움도 나오고, 살인도 나오고, 저주도 나오고, 시기 질투도 나오게 되는 거다.
인간은 생명과를 먹은 지식, 즉 하나님의 지혜지식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을 가져야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고 정복할 수 있다. 믿는 우리는 생명과를 먹고 설령 내가 타를 정복을 못할지라도 타가 나를 정복하지 못하도록 방비책이 되어있어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예수 믿으면서도 맨날 얻어맞고 산다. 즉 세상의 염려 걱정 근심 유혹 미혹성 죄성 세상성에 배기지 못하고 케오를 당하게 된다.
성경의 예언을 종교적 표면적 역사로만 아는 사람은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표면적인 것만 안다. 그래서 계:을 보면서 ‘1차 세계전쟁을 말하는 거다. 2차 세계전쟁을 말하는 거다. 3차 세계전쟁을 말하는 거다’ 하고 푼다. 그러나 이건 틀렸다. 왜냐? 성경은 전부가 우리의 영인성장을 위해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 어디라도 우리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해석이 아니면 옳은 해석이 아니다. 만능의 능력자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창조는 못하지만 영적인 면에서 이룰구원의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 믿으면서 이룰구원이 없이 늘 얻어터지기만 한다면 사람 맛이 안 난다.
성경의 예언은 우리로 크고 작은 사건과 환경을 거치면서 영능의 실력적인 면을 잘 닦으라는 거다. 운동경기에서 일등을 하면 상이 있고, 또한 각 종목마다 일등을 하면 다관왕이 되는 것처럼 사건과 환경을 거치면서 영능의 실력을 잘 닦는 사람에게는 천국에서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 반면에 자기가 사는 환경에서 이런 저런 시험에서 지면 자기에게는 그만큼 사망성이다.
육신이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산 사람은 육신이 죽더라도 그 정신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후세의 사람들에게 계속 내려간다. 이것은 이 사람의 육신은 죽었어도 그 정신이 사람들에게서 역사가 되는 거다. 사도바울은 죽었지만 사도바울의 신앙정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있다. 죽었지만 역사가 되고 있다. 이런 우리라. 예수 믿는 속에는 이런 게 들어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은 임시성에 대한 소원 목적을 가지면 안 된다.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주님과 같은 좋은 친구를 사귀면 자기의 얼굴이 빛이 난다.
세상적인 교회에서는 사건이 왔을 때 이 사건을 물러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모든 사건을 이길 수 있는 재료가 다 들어있다. 그러니 성경을 보는 게 기도다. 설교를 들을 때는 말을 잘하고 못하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저 설교가 어디에 뿌리를 박고 나오는 건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을 할 때도 반드시 어디엔가 뿌리를 박고 말이 나오는 거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배우고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지식이 전부는 육에 속한 거다. 육에 관한 것은 다 시간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변개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일반적으로도 법 위에 산다. 세상법은 자체화가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말씀을 따라 순종을 하면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체화 인격화 실상화가 된다. 사람이 말씀으로 원료뭉치가 되는 게 하나님의 성품으로 실상화요 본질화다.
영의 생각은 안 죽는다. 그러나 육의 생각은 자꾸 죽는다. 육적인 세상생각 자식생각 등등 멀리 있는 것까지 끄집어 당겨서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느냐? 우리는 염려 걱정보다 그것과 맞닥뜨려서 깨지든지 이기든지 하는 거다. 염려 걱정을 하면 밥맛도 없고, 피도 마르고, 병이 든다. 이건 자기 스스로 자기를 망치는 거다. 몸 밖의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게 놔둬라. 그러면 시간을 따라 흘러간다. 제일 좋은 권면은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향해 가게 하는 거다.
예언을 정리하면 일반적으로 앞으로 어떤 사건이 올 것이라고 미리 알리는 거다. 일반인들을 이 정도밖에 모른다. 진리를 따르는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예언은 ‘사건을 통과한 후에 너에게 이런 면류관이 주어진다’ 하고 알려주는 거다. 성경의 예언을 구체적으로 모르겠으면 일반적인 것을 영원으로 늘어뜨려서 생각을 하라. 그러면 영적이 되고, 하나님께로 들어간다.
‘방언’이 무엇이냐? 구원의 말이 방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방언이다. 세상사람들은 이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도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은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을 방언으로 안다. 성경의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높이고, 구속이 나온다. 따라서 이 방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의사성을 아는 사람만이 알아듣는 거지 세상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다.
행:을 보면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을 하는데 경건한 사람들이 이 방언을 알아들었다. 그러면 누가 경건한 거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경건한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늘의 방언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무엇을 듣고 말을 하느냐?’에 따라 자기의 지식이 되고, 자기가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이 지식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지식의 수준이 낮으면 저질이 되고, 높으면 어디를 가도 존영을 얻게 된다.
북조 여로보암 왕이 자기 백성들이 안식일에 남조유다에 있는 성전에 못 가게 하려고 북조의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웠다. 송아지는 희생과 충성봉사의 의미다. 그러니까 금송아지를 세운 것은 지금으로 말을 하면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면 존귀 영광자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이 존귀 영광자가 되는 것은 충성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 교회에서 성경도 모른 채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면 교인들이 다 알아주고 높여주지만 그러나 이건 자기의 전부를 도둑맞은 거다. 자기의 일생을 도둑맞고, 건강을 도둑맞고, 자기의 투자성을 다 도둑맞은 거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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