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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3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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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35절-42절: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35절-40절: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러니까 인자 되신 이 분은 아무 광고도 없이 뉴스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지 않고 있을 때 오신다는 것이다. 즉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등불을 켜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문을 듣고 읽고 생각을 좀 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안 되겠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니까 첫째는, 우리가 인자 되신 그 주님을 평소에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고, 모르면 광고를 하고 와도 잘 모른다. 평소에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고. 어떻게? 그 분의 소원 목적을. 말하자면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교인들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씀이니까 누구든지 자신이 평소에 그 분을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분명히 오신다’ 하는 여기에는 책임추궁이 따르는 것으로 보여진다. 예를 들면 오늘날 속화된 많은 교인들이 ‘예배당 건물을 몇 개나 지었느냐’ 하는 그걸 따지는 줄 알고 예배당 짓기 운동을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으로 봐서 재림 예수님은 그게 아니시다. 그런데 세상에 속화된 교회 목회자들은 ‘가견적으로 종교활동과 업적을 얼마나 많이 이뤄놓았느냐?’ 그걸 따지고, 또 흔히들 종교단체에 감사패를 주는데, 예수님은 그 감사패가 몇 개나 있는지 그거 보러 오는 분은 아니시다.
세 번째는 다시 오시는 그 분은 ‘세계 인류 문화 문명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느냐’ 그걸 따지러 오는 분도 아니다.
네 번째는 ‘세상축복 즉, 먹고 마시는 물질적 소유적인 축복을 받아서 얼마나 노후대책을 잘 세워놨느냐’ 그거 따지러 오는 분도 아니시다. ‘네가 얼마나 영능의 실력적 존귀영광자로 만들어졌느냐’ 그걸 보신다.
모든 인간은 영육 결합체이다. 인간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데, 육신은 물질에 속한 것이라서 시간이 흐르면 노후 되고, 죽고, 죽으면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은 또는 영혼은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게 아니다. 자기 속의 영 또는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요, 선지 사도들이 이 말씀을 받아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신의 감화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니, 이렇게 하심은 자기 속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이 하나님이 말씀을 전할 때는 사람의 영혼에 호소하는 것이다. 전하는 그 말씀을 성도들이 듣기야 이성적으로 듣는 거지만, 이성적으로 들을 때에 그 말씀이 ‘이치적으로 옳다’ 하고 들으면 그거는 자기 영혼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영혼의 지식, 영적 지식은 세상에 속한 지식이 아니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지식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늘의 지식을 가지고 이 땅의 모든 사물들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 되어 성육신으로 오셔서 하늘의 이해타산 평가성을 가지고, 하늘의 지혜지식성과 하늘의 도덕성과 하늘의 능력성을 가지고 이 땅의 모든 사물을 보는 거다. 그래야 땅의 모든 사물을 다스릴 수가 있는 거다. 땅의 지식을 가지고는 사물들을 못 다스린다. 땅의 지식을 가지고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느냐? 자기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먹고 마시고 기쁨을 누리는 것뿐이다. 그것도 잠깐이다.
영적 면에서 영능의 사람으로 성장이 안 돼 놓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시간 따라 시대 따라 환경 따라 움직여질 때 자기 눈에서는 고통의 눈물, 한숨의 눈물, 세상 원망의 눈물, 사람 원망의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 만들어지길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왜 그러냐? 영능의 사람으로 깨닫지를 못해서이다.
하늘의 사람으로 되어서 사물을 보고 깨닫는다면 그 사물에서 구원이치가 보여지고, 그렇게 되면 움직이는 세상 것을 붙잡지를 않을 텐데 하늘의 지식은 모른 채 땅의 지식만 가지고 살면 땅의 것만 보게 되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움직이는 세상과 같이 움직이다가 그 일생을 허망하게 끝내고 만다.
성경에 인간을 만들어 놓을 당시 뭐라고 했느냐? 당신의 입으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한다. 인간의 코에 당신의 기식을 불어넣은 것은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인간 너다’ 하는 이치가 들어가 있는 거다. 그런데 땅의 지식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물질성적 코로 바람이 들어가는 숨 쉬는 목적으로 살았다 그 말이다. 그렇게 되니 이 사람은 환경이 움직이는 대로 환경 밑으로 들어가서 환경의 다스림을 받으니 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냐? 사람이 정신력이 힘이 없으면 아무리 몸이 건강해도 그 기쁨이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나 정신력이 강하다면 몸이 좀 아파도 그걸 초월하고 나가는 힘이 있다.
네가 예수님을 믿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느냐? 그렇다면 영능의 실력을 얼마나 쌓았느냐? 영능의 실력은 어디서 나오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에서 나온다. 이치가 밝은 사람은 정확도가 높다. 우리 기독자들은 말씀의 이치를 많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왜 감정과 흥분을 일으키는 그 위주로 살려고 하느냐? 거기에는 기준이 없는 거다. 귀신들리기 딱 알맞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게 보이지 않느냐?
일반적 차원으로 볼 때도 이치에 밝은 사람이 되면 예수를 안 믿더라도 다스려 나간다. 그런데 이치는 모른 채 감정과 흥분으로 늘 자기 성격대로 산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다스림을 받게 되고 이용당하고 너는 그 길로 끝나는 거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어도 일반적 차원으로 사람은 배워야 산다고 한다. 배우지 않고 감정과 흥분과 자기 나이 든 것만 가지고 사람이 살아지는 것이냐? 이런 사람은 이치에 밝은 사람에게 자꾸 뒤떨어진다. 감정과 흥분으로 제 멋대로 하면 그 사람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 누가 그 사람 밑에서 배우려 하고 다스림을 받으려고 하겠느냐?
우리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가정을 하고 일반적인 것을 보고 사물의 이치를 얼마든지 깨달을 수가 있지 않느냐?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면 더더욱 말씀의 이치를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왜 예수 믿는 것을 감정과 흥분으로 떠들고 돈을 가지고 하려고 하느냐? 예수님은 그렇게 안 가르쳤다. 예수님은 당신의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종교적 사역과 업적을 크게 만들어 놓지 않았다. 오직 사람의 속성을, 사람의 성품을, 사람의 인격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놨다. 그게 성령님의 일이고, 그게 하나님의 일이고, 그게 예수님의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은 ‘예수 믿는 사람이 영능의 실력적 존귀영광자로,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하나님의 본질로,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잘 만들어져서 깨어있는 사람이냐’ 하는 이것을 보러 오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예수를 수 년 수십 년을 믿으면서 사람이 얼마나 똑똑해졌느냐?
사람이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발이 있고 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교인들을 만날 수 있고 목사님들도 만나서 말씀을 들을 수가 있다. 더더군다나 신분이나 테레비로도 나오기 때문에 다 볼 수가 있고 들을 수가 있다. 그래서 눈 멀고 귀 먹지 않은 이상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왜 가치판단 평가를 바로 못 내리느냐 그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가치판단 평가를 내리는 게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면 너는 예수 잘못 믿었다. 헛 믿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세상 사람이 서 있다면 예수 믿는 너는 세상사람 쪽으로 옳다고 하게 생겼다. 오늘날 예수 믿는 게 거의가 그렇다. 이게 마지막 시대라고 하는 거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말세에는 예배당이 하나도 없다는 게 아니라 깨어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말이다. 교인이 없다는 게 아니라 교인들은 많은데 깨어있는 사람을 보기가 참 드물다 그 말이다. 이게 말세현상이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여지는 예배당은 천지다. 모르긴 해도 인공위성을 타고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대한민국에 십자가가 제일 많을 것이다. 그런데 신앙정신들이 어떻게 돌아갔느냐? 전부가 귀신집이 되어 있다.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구세군, 천주교, 오순절 교회 등 왜 이렇게 갈라진 것이냐? 일반교인들은 모른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가지고 보면 왜 달라지고 쪼개졌는지 그 이치가 밝히 드러난다. 역사적으로야 물론 칼빈주의니 알미니안주의니 하며 신학적 싸움이 붙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 건 역사적 표면일 뿐이고 그 속에 들어있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정신이 있는 것이다.
성경을 같이 보는데, 똑같은 성경을 보고 있는데 왜 그렇게 다른 거냐? 모두가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이 되었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믿는다고는 하는데 각자가 자기 주관성을 가지고 믿었기 때문에 자기가 본 대로 나가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같은 교파인데도 그 교파가 또 갈라지는 일도 있다. 같은 교파인데도 왜 갈라지느냐? 그 이유는 성격들이 문제다. 성격이 안 맞는다. 성경이 틀린 게 아니라 예수 믿는 성격들이 안 맞는다. 그러니까 ‘한 교파 안에서 싸우지 말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가자’ 해서 또 갈라지는 거다.
그러니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하고 갈라지는 것은 각자의 주장이 달라서 그렇게 된 건데, 그런데 주장이 다른 것과 성격이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안 믿는다’가 아니라 믿기는 믿는데 성경대로가 아닌 자기가 본 대로의 주장을 하기 때문에 서로가 달라지는 거다. 그래서 의견충돌과 대립이 일어나는 거고, 서로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도 분석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고 사는 곳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의사단일성으로 살았다면 이 두 사람이 어느 날 만나게 되어 대화를 하게 된다면 마치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온 친구처럼 잘 통하게 된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경험해 봤느냐? 이런 경우를 나쁘게 말한다면 서로 의사단일성이라 할지라도 둘 다 성격이 나쁘다면 만나자마자 헤어지게 된다. 제 성질과 똑같은 데도 안 맞는다. 그런 사람도 봤느냐?
살아오면서 처음 만났는데도 몇 번 얘기를 하면 착 달라붙는 사람도 있다. 느낌적으로 오래 사귄 사람처럼 착 달라붙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한 집안에서 한 방에서 그렇게 오래 살아도 남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왜 그럴까? 성격들이 안 맞아서 그렇다. 성격이 안 맞는다는 것은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서로가 나에게 맞추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가 잘못돼 있는데 누가 상대에게 맞추려고 하겠느냐? 서로가 그러고 있으니 한 집안에서 같이 밥 먹고 살아도 남과 같은 거다.
우리가 사는 게 뭐냐? 서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라. 그러면 각자가 남이 아니다. 하나다. 성경대로 보면 정신을 맞추고 사상을 맞추고 하나님께로 온 집안이 맞춰라. 하나님에게는 전부는 좋은 것만 있다. 좋은 생각, 좋은 지혜, 좋은 지식, 좋은 도덕성이 다 들어있다.
성경에 보면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이 나타났는데, 그 세 분이 만나자마자 척 하고 알아봤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나서야 알아본 것이 아니다. 시대적으로 연대적으로 세 분은 각기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척 하고 알아봤다. 오늘날 우리도 자기가 평소에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살았다면 아닌 말로 우리 모두가 마지막 날에 변화 부활을 안 입었어도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서로가 만나면 의사단일로 척 하면 알아지는 거다. 그게 예수 믿는 거다. 척 하고 친해지는 것은 너랑 나랑 의사단일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도 좋은 친구는 말을 하다보면 ‘어쩌면 네가 내 마음과 똑같으냐’ 하게 된다. 그러면 재미가 있다. 부부끼리도 ‘어쩌면 당신의 마음이 내 마음과 똑같습니까’ 해야 되겠는데 왜 그게 안 되느냐?
의사단일이 아닌 것은 질적으로 본질과 본성이 달라서 안 통한다. 질이 다른 것은 안 통한다. 질이 같다면 통하는 것이고, 통하는 거기에는 의사단일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설령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안 주고 오신다고 해도 예수님과 의사단일이라면 그 사람은 예수님과 본질이 같은지라 오시는 줄을 안다. ‘내가 네 안에 네 안에 내가’ 하는 것은 인격적 결합을 말한다.
그리고 온 인류에게 심판이 오면 예수님을 믿는 기독자들은 큰 책임감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전체 기독자들에게 심판이 온다고 하면 여기서 먼저는 하나님의 종들이, 목사들이,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통감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예수 믿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가정의 자녀들이 잘못되면 그 책임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부모에게 돌아간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니 먼저 믿고 먼저 아는 사람 즉, 예수님을 믿는 기독자들은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 인간의 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목사님들은 오늘날 시대상을 보고 책임을 통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각 교회마다 주님 오시는 준비에 사람바탕 정신바탕 모든 도덕성적인 면에서 교훈적으로 바로 세워놔야 한다.
41절-42절: 41절의 베드로의 물음에서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 기독자들은 인자 되신 주님이 믿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진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냐? 먼저 진리지식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지식이다. 진리지식을 먼저 알고 그 진리지식을 자기의 인격화, 자기의 속성화, 자기의 자체화, 자기의 실상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사람으로 네 마음이 만들어지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모든 언행심사가 밖으로 활동되어 나와져야 그것이 진실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나는 거짓 없이 한다. 나는 정말 진실하게 말했다’ 하는 그 지식은 선악과 따먹고 나온 지식의 수준이다. 그 지식의 수준은 하나님의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이다. 그러니까 그 지식은 땅의 성격과 성질로 들어가 있다 그 말이다.
진리지식에서 나온 언행심사는 하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 그 도덕성,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진실한 사람이 됩시다’ 하면 척 하고 그렇게 알아들어야지 세상을 구하는 교회에서 ‘우리 진실하게 삽시다’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기준적으로 다르고, 성격과 성질적으로 다른 거다.
예수 믿는 우리는 그런 걸 분별해야 한다. 왜 그러냐? 세상에는 가짜나 거짓 종들이 많기 때문에. 마귀가 그런 지식을 쓴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성경에 있는 말을 할지라도 그 의미와 뜻이 달라지면서 목적이 완전히 세상으로 들어간다. 이건 마귀 짓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목사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의 말씀이거니’ 하는 게 아니다.
거짓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이치가 나오지 않고 ‘세상 복 복’ 하며 땅에다 처박는다. 이게 거짓 종이다. 이건 그 속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거다. 다른 말로 하면 이건 자칭이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고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는 제 혼자 자칭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의 성정의 사람으로 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칭이다. 자칭은 거짓의 사람이다. 안 알아준다.
진리지식에서 나온 진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감화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처럼 진실의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인자 되신 주님과 그 속성이 진실적으로 똑같다. 예수님이 사람 되어 오신 것은 사람인 나를 보고 ‘너도 나처럼 만들어질 수가 있다’ 하는 것이 오심의 이유 중에 하나다.
이 진리진실을 가져야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종들을 맡게 된다. 종 위의 종, 그러니까 이 종은 차원이 높은 종이다. 주님의 집에 청지기도 있고 종도 있다. 주님의 집에는 종들이 수없이 많다. 종들은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 지혜는 진리지식에서 나오는 지혜다.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에서 나오는 지혜다.
일반적인 지혜는 사물을 보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교회 목사님의 정신이 어디로 흐르느냐? 교인들의 정신이 어디로 흐르느냐? 이렇게 나가다가는 필경은 하나님의 몽둥이가 날아오겠구나’ 하는 걸 알게 된다. 이게 하나님의 지혜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눈치 볼 수 있게 하는 게 하나님의 지혜다.
지혜는 진리지식에서 나온다. 교인들은 진리지식에서 지혜가 나와야 한다. 메시지도 또 그래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지혜는 선악과 먹은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방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나온 지혜요 지식이다. 물질세계에서만 쓸 수 있는 임시적인 지혜요 임시적인 지식이다. 이 지혜는 하늘에까지 해당이 안 된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물질의 혜택을 얼마나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느냐’ 그런 지혜지식이다.
이성을 가지고 아무리 세상학문을 연구한다고 해도 사람이 참 설 수 있는 바탕은 없다. 진리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참 서지를 못한다. 이 말이 이해가 되느냐? 예수를 믿는데 왜 그렇게 성격과 성질이 사람이 안 고쳐지느냐? 문제는 그것보다 앞서서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지식의 기준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고쳐야 되겠는데 하나님의 지식으로 고치지를 않고 세상의 그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니 제가 좋은 대로 성경을 해석하게 된다. 그러면 그게 어떻게 해석이 되느냐? 세상적으로 나가게 된다.
사람이 영원히 참 서는 바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그 기준에서 사람이 바로 서게 돼 있다. 이게 원리다. 왜 그러냐? 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야 사람이 바로 서는 것이냐? 그것은 사람을 만들기 전에, 인간 나를 만들기 전에, 영원 전에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만들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참 사람으로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설계를 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분의 설계를 놓고, 이 분을 바탕으로 놓고, 이 분의 성정을 놓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인간 너로 만들었다 그 말이다. 그런데 어디다가 사람을 세우느냐? 세상에 맞추면 그게 사람이 세워지는 것이냐?
교회에서 선악과 따먹은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 종교활동은 거창하게 될 런지 모르나 사람이 안 세워진다. 사람부터 세워야 일을 하던지 하는 거다. 예를 들어서 세상에서 기술자로 만들어놔야 일을 하던지 하는 거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일을 하게 되면 일이 더 어렵게 커지게 된다. 그러니 문제는 사람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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