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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벧후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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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사람이 숨을 쉬고 있으면 생명이 산 거다. 살아있는 사람은 머리카락이나 피부가 떨어져 나가면 속에서 산 것이 솟아 올라온다. 이건 세포가 활동하는 거다. 손톱이나 발톱은 자라면 잘라버리는데, 그래도 육신의 생명은 죽지 않는다. 육신이 모든 활동을 마치면 죽는데, 육신이 죽으면 물질로 된 육체는 삽시간에 분해가 되고, 기능과 지능, 그리고 모든 감각과 활동도 죽는다.
인간인 나는 이런 존재인데, 그렇다면 나라고 하는 게 뭐냐? 일반적으로 생명이 있을 때 내가 되는 거다. 신앙적인 면으로 보면 육신은 영적인 면을 깨닫는 보조계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이 있는 신앙을 가진 게 나다. 이렇게 보는 게 정확한 거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내가 된다. 영적인 생명, 신앙정조, 진리생명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나’라고 하는 거다. 육신이 살아있으면서 생명력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은 ‘살았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하신다.
영 자체는 죽는 일이 없다.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 영은 이룰구원 면에서 늘 성장이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살아있는 말씀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온전으로, 신적 지혜지식과 선 사랑 거룩 진실 의와 주권이 기능적 지능적으로 성장이 되어야 한다. 이게 영인성장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영인성장이 없이 세상을 바라보며 현실주의로 산다면 하나님 앞에 나라고 하는 게 안 된다.
우리는 사람의 생각을 가를 줄 알아야 한다. 세상사람들의 생각이 구정물인지, 나쁜 물인지, 죽은 물인지, 아니면 생명수인지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영적인 면에서 성분적으로 구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도 수질검사를 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은 영적인 면의 수질을 검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입히신다는 것은 두루마기를 입히듯이 사람 자체를 영인화 하는 것을 말한다. 말씀으로 자체화 시키는 거다. 믿는 우리가 말씀을 먹으면 영적인 면에서 말씀으로 자체화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으로 자체화 되면 하나님께서 이걸 벗겨서 가져갈 수 없다. 우리가 말씀으로 자체화 되면 어디든 가서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예수 믿으면서 말씀으로 자체화 되지 않으면 일반화가 된다. 시대가 흐를수록 교회가 문화 예술화로 일반화가 된다. 이러면 외모 외형은 화려할지라도 사람의 심령은 말라간다. 문화 예술적으로 아무리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진다고 해도 이것으로 성경의 깊은 뜻을 깨닫는 게 아니다. 갈수록 유형교회는 많아지겠지만 생명의 말씀을 내는 곳은 극히 드물어진다. 교회가 이렇게 흐르면 일반적인 도덕성도 무시가 되고 성적 혼란이 온다. 이러면 세상이 온통 짐승처럼 살게 된다.
믿는 우리가 진리로 자체화 되면 일반적으로 도덕성을 벗어난 게 아닌 것은 진리정신을 가지고 다 할 수 있는 거다. 이 사람은 심령 자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서 생활이 곧 믿음생활이 된다. 이 속에는 일도 사건도 사람도 관계성도 다 들어있다. 자체화가 안 된 데서는 이게 안 된다.
우리의 신앙은 생활 속에 녹아 들어있어야 한다. 그러니 사람끼리 원수를 맺어서는 안 된다. 사람끼리 원수를 맺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힌 거다. 이러면 은혜를 못 받는다. 우리는 기본구원으로 갚지 못할 큰 은혜를 받았으니 인인 간에 사소한 것은 큰 가치가 없는 거다. 그런데도 물질적인 것으로 인해 인인관계가 막히면 하나님의 은혜는 없다.
믿는 우리는 죽으면 육신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기본구원을 얻은 생명은 천국에 들어갈 존재인데 세상의 것으로 인해 인인 간에 원수를 맺고 살면 하나님의 것을 못 받는다. 자기가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으로 충만해지면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는 따먹지 말고 생명과를 따먹으라고 하셨는데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갖도록 슬슬 유혹을 했고, 아담과 하와가 이 유혹에 넘어갔다. 이게 인본주의요 세상주의인데,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유혹이 많다. 아담과 하와는 부부이면서 ‘저 사람 때문에’ 라고 핑계를 댔는데, 이건 마귀에게 넘어간 거다.
‘저 사람 때문에’ 라고 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보면 마귀의 꾐에 넘어간 거다.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한다고 해도 육적으로 하게 된다. 자기의 마음이 예수님의 정신과 사랑에 녹아져서 자연스럽게 이 사랑이 나와야 하는데 이게 안 되면 물질적으로 아무리 잘 살아도 사는 게 그만큼 힘들고 고통과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다.
예수 믿으면서 현재에서 이룰구원을 이뤄가는 것은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말씀에 해당이 되는 거다. 또한 세상주의로 사는 것도 역시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말씀에 해당이 되는 삶이다. 그런데 세상주의로 사는 본인은 이걸 모른다. 세상주의로 살게 되면 육신적인 면은 보고 듣고 만져지기 때문에 빨리 인식이 되지만 영적인 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믿는 우리는 영의 눈으로 영적인 자기를 보고 자기가 영인성장 면에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지 살펴야 한다. 육신의 것을 기준으로 살면 안 된다.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은 전부가 불타고 썩을 것이니 사망계로 버려라. 이런 게 없이도 지금까지 살았다면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섰으면 누가 자기의 좌우에서 헐고 밟고 해도 상관하지 말고 내가 할 일만 하면서 하나님께 달려가라. 하나님께 달려갈 때 옆의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같이 있을 때는 구원의 관계를 지어라. 그리고 내가 상대와 떨어져 있는데도 상대가 나를 자꾸 원수 시 한다면 그 사람을 대적하다가 그 사람으로 인해 나의 구원이 좌우되어서는 안 되고,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놓고 사느냐. 붙들고 사느냐?’이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나간다면 상대가 나에게 뭐라고 해도 상대를 하나님께 맡겨야지 내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면 절대로 안 풀린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라도 당신이 아시고 좌우지한다. 당신의 주권으로 왕으로 앉힐 사람은 왕으로 앉히고, 군대로 나가게 할 사람은 군대로 나가서 죽게 해 버린다. 그러니 구원이 아닌 것에 동원되어서 마음 빼앗기고 손해를 볼 필요가 없다. 문제는 내가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홍해를 건너기 전에 애굽의 군대에게 죽는 거다. 말씀에 순종해 나가다가 홍해가 열렸을 때 빨리 건너가야 한다. 성경의 한 사건 속에는 많은 구원의 이치가 들어있어서 구원에 활용할 수 있다.
사랑의 마음은 넓고 평안하고 기쁘고 원수가 없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 이게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도 교인들끼리 싸워서 ‘교회에 나오네. 안 나오네’ 하는 것은 못 쓴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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