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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올해 1월1일부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묵상하는 <예수어록-마태복음>을 시작하면서 '마태복음'을 주제로 한 책을 여러권 읽는 중에 책 제목이 '마태복음'이어서 내 손에 들어온 책이다. 그동안 조금씩 조금씩 틈 나는태로 한 챕트씩 읽었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이후 두번째 읽는 '스퐁'의 책이다. <기독교...>가 매우 강렬한 책이어서 이 책도 어느정도 '각오'하고 읽었다. 성경읽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확 열어주는 책이다. 

문자주의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일수도 있다. -최용우

 

존 쉘비 스퐁 지음, 변영권 옮김, 『유대인 예배력에 따른 예수의 의미 마태복음: 성서 문자주의는 이방인들의 이단』, 한국기독교연구소, 2020년 6월 15일, 신국판 429쪽, 값 16,000원.

원서: Biblical Literalism ? A Gentile Heresy: A Journey into a New Christianity Through the Doorway of Matthew’s Gospel (HarperOne, 2016).

 

1. 책 소개

미국 성공회 사제와 주교로 45년 동안 봉직하고 은퇴한 존 쉘비 스퐁 주교가 85세에 발표한 이 책은 공관복음서들이 목격자들의 증언이나 역사가 아니라, 놀랍게도 “예배 문서들”이라는 사실을 치밀하게 입증한다. 복음서들의 구성 원리가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력이라는 뜻이다. 안식일마다 예배력에 따라 읽는 구약성서 본문들에 상응하여, 매주 예배를 통해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한 독창적인 “예배 문서들”을 만들어낸 복음서 저자들의 비상한 지혜와 수고만큼, 저자 역시 심혈을 기울여 복음서 저자들의 본래적인 예수 메시지를 회당 예배력 순서에 따라 세밀하게 발굴해낸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한 많은 수수께끼들을 풀어주며, 특히 초자연적 기적들과 속죄론 해석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

 

저자의 논증은 분명하다. 복음서의 저자는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예수 이야기들은 회당 안에서 구전되다가 로마와의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마저 파괴된 이후에 복음서들이 기록되었다.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결국 회당에서 쫓겨나는 사태를 전후한 적대감 속에서 별도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회당 예배력에 맞추어 예수의 의미를 각 절기 순서대로 치밀하게 구성한 책들이 공관복음서들이다. 따라서 복음서들의 원래 청중인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문화, 상징, 절기, 이야기 전달방식을 잘 알았다. 그러나 2세기 중반 이후 교회가 유대인들 대신에 이방인들로 완전히 교체되면서, 복음서들의 유대적 특성을 알지 못한 청중들이 예수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따라서 성서 문자주의는 복음서 저자들의 메시지를 완전히 왜곡시키는 “이방인들의 이단”이라는 주장이다. 저자의 치밀한 분석은 이제까지 복음서들을 문자적으로 읽던 잘못에서 벗어나 예수의 의미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진정한 메시지를 찾도록 도와준다. 특히 예수가 가르친 철저한 은총과 무차별적인 사랑의 종교가 계산적인 응보와 심판의 종교로 전락한 신학적 뿌리를 뽑아내고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기초를 놓아준다.

 

2. 저자와 역자

존 쉘비 스퐁(1931- ) 주교는 교회의 신앙을 수호하기로 서약한 미국 성공회 주교로서 24년간 봉직한 후, 하버드대학교와 드류대학교 등에서 가르친 매우 진보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특히 다윈과 프로이드 이후 하느님에 대한 전통적 설명(초자연적 유신론)이 설득력을 잃어버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실 앞에서, 그는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확신 속에 평생 동안 철저하게 정직한 신앙을 추구함으로써 교회를 갱신하는 작업에 헌신했다. 그는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예수를 해방시켜라』, 『성경의 시대착오적인 폭력들』,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을 비롯해서 모두 25권의 중요한 책들을 발표했다.

 

옮긴이 변영권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예사랑감리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을 번역했다.

 

3. 목차

 

제1부 복음서들은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복음서들의 구성 원리

1장. 문제 서술, 무대 설정 / 27

2장. 예수를 역사적 상황 속에 설정하기 / 39

3장. 구전 단계: 침묵의 터널로 들어가기 / 55

4장. 공관복음서를 구성한 단서 찾기 / 71

5장. 마태가 의존했던 마가 / 83

 

제2부 유월절 이후부터 오순절까지: 초기 사역의 탄생

6장. 예수의 족보와 탄생 / 89

7장. 요셉: 신화인가 역사인가? / 111

8장. 동방박사들과 선물: 독창적인 설교? / 121

9장. 헤롯과 파라오 대 예수와 모세 / 131

10장. 예수의 세례: 모세의 재현 / 137

11장. 광야 속으로: 40년이 아니라 40일 / 143

 

제3부 오순절과 산상설교: 다시 시내산으로

12장. 상징적인 시내산으로 돌아온 예수 / 153

13장. 주님의 기도 / 165

 

제4부 신년절과 속죄일: 기적들과 가르침

14장. 오순절에서 신년절까지의 예수의 여행 / 179

15장. 마태의 예수 소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 189

16장. 하느님 나라를 위한 마태의 작업 / 197

 

제5부 속죄일: 속죄 신학에 대한 도전

17장. 욤 키푸르 소개: 속죄의 날 / 207

18장.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비신비화 / 219

19장. 속죄 신학의 저주 / 229

 

제6부 초막절 이후: 새로운 추수

20장. 초막절의 상징들과 굶주림을 채워주는 음식 / 253

21장. 세례 요한의 참수 / 263

22장. 빵과 물고기, 물 위를 걸으심: 모세 이야기들을 확장한다 / 273

23장. 두 인물, 두 통찰 / 285

 

제7부 수전절(하누카)과 주님의 변모: 하느님의 빛에 대한 재해석

24장. 수전절: 하느님의 빛의 귀환 / 301

25장. 예수의 변모: 수전절(하누카) 이야기 / 311

 

제8부 유월절을 향한 여행: 묵시와 심판

26장. 마태복음의 여행 부분에 대한 소개 / 323

27장. 여행의 핵심 / 333

28장. 실현된 묵시: 최후의 심판 / 347

 

제9부 유월절과 수난: 절정

29장. 수난 이야기의 절정 사건 / 357

30장. 해석의 단서를 찾기 위한 수난 이야기 탐구 / 367

31장. 전례로서의 수난 이야기 / 379

 

제10부 마태의 부활절 이야기: 새로운 관점

32장. 부활의 새벽: 신화인가 실재인가 / 395

33장. 생명을 향한 마태의 초청 / 411

 

4. 서평

 

“스퐁 주교는 복음서들을 철저하게 새롭게 보는 길을 열어준다.”-Publishers Weekly

 

“85세에 새로운 책을 발표한 스퐁 주교는 자신의 평생 동안의 중심 주제인 그리스도교의 유대적 특성을 다시 치밀하게 다룬다. 그는 그런 특성을 부인하는 것은 너무나 해로운 것이라서 21세기의 그리스도교를 파괴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읽기 쉽고 강렬하다.” Booklist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이 책은 마태복음 배후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우리가 예수를 보는 방식과 오늘날 그를 따르는 방식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스퐁 주교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예수 이야기를 납치했던 ‘이방인들의 이단’이 초래한 무지함에 맞서 진실을 밝히는 매우 정직한 성직자이다.”

? Matthew Fox, 『원복』(Original Blessing) 저자

 

“스퐁 주교는 철저하게 성서적인 관점에서 성서 문자주의자들을 논파한다. 흥미진진한 이 책은 합리적이며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찾는 이들을 해방시킨다.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추구하는 일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서적 뿌리를 존중하고 영예롭게 되살리는 일이 필수적이다.”

? Peter Francis, 웨일즈 그래드스턴 도서관 관장

 

“성서 문자주의에 도전하는 탁월한 명저로서, 스퐁 주교는 성서의 문자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이 초래한 비극적 결과들을 밝히고 성서 문자주의가 왜 오늘날 매우 큰 문제가 되는지를 설명한다. 매우 중요하며 시의적절한 책이다.”

? Michael Down, Thank God for Evolution 저자

 

5.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질문들

 

여든 살이 넘은 주교가 도대체 왜 4년 동안 마태복음 연구에 매달려 힘겨운 저술에 매진했는가?

율법을 엄격히 지켜 구별됨을 통해 거룩함을 추구한 백성들에게 예수는 왜 복음을 가르쳤는가?

어두운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의를 위한 타는 목마름을 예수는 어떻게 해소하라고 가르쳤는가?

무고한 생명들이 떼죽음당하는 시대에 우리가 기도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세울 수 있는가?

인류가 봉착한 전대미문의 위기를 돌파할 종교가 절실한 때에 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등지는가?

철저한 은총과 무차별적 사랑의 종교가 응보와 심판의 종교로 전락한 신학적 뿌리는 무엇인가?

 

예수가 호소한 “요나의 표적”은 왜 우리의 종교적 편견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고발하는가?

왜 속죄일의 유대적 의미에 대한 이방인의 오해가 은총의 종교를 심판의 종교로 둔갑시켰는가?

저자는 도대체 왜 성서 문자주의가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를 죽이는 사고방식이라고 역설하는가?

저자가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기초로 제시한 성서의 중요성과 하느님의 신비와 의미는 무엇인가?

 

복음서들이 역사가 아니라 회당의 예배력 순서에 따른 “예배문서”라는 분석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의 탄생, 세례, 시험, 설교, 기적, 처형, 부활 이야기는 어떤 절기 예배들을 위한 것이었는가?

마가복음은 어떻게 신년절부터 유월절까지 적합한 예수 이야기들을 찾아 순서대로 배열했는가?

예수가 유월절에 처형된 것은 역사적 사실인가, 아니면 유월절 예배를 위한 전례상의 연결인가?

군중들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한 것은 왜 속죄염소에게 죄를 전가하고 죽게 만든 것과 똑같은가?

 

마가 저자는 속죄일, 초막절, 수전절에 적합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들은 무엇이라고 보았는가?

마가복음에는 없는 유월절 이후 신년절까지의 안식일 예배자료들을 마태는 어떻게 구성했는가?

마태 저자는 어떤 이야기들을 통해서 구약과 마가복음의 신학을 창조적으로 더욱 발전시켰는가?

마태의 예수 이야기는 어떻게 유대인들이 기대해왔던 메시아의 역할을 성취하도록 만들었는가?

왜 바울을 비롯해서 40년 동안 예수의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들을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는가?

예수가 실제로 초자연적 기적들은 행했는가, 아니면 이사야의 표징들로 예수를 해석한 것인가?

 

그리스도교는 왜 유대인 학살을 반복했으며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인 종교가 되었는가?

왜 나치 SS대원들, 서북청년단, 남미 독재정권의 학살단 거의 모두가 세례받은 신자들이었는가?

“거듭난 복음주의자들”은 왜 가정 폭력과 인종차별에서 다른 미국인들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가?

대다수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왜 성서에 근거해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가?

세상 종말과 국가 개혁을 외치는 네오-파시스트들은 왜 항상 성경과 십자가를 앞에 내세우는가?

코로나19 이후 시대에도 왜 전능하신 하느님을 잘 믿는 사람일수록 생태계 파괴에 무관심한가?

왜 근본주의는 여성, 성소수자들, 타종교인 차별 및 과학에 반대하는 무기로 성서를 사용하는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기적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왜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인가?

 

7. 책 속으로

 

(pp. 27-28) 이 책에서 나의 사명 중 하나는 유대적인 것 전체에 대해 이방인들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지녀왔던 무지의 층들(the layers of Gentile ignorance)을 벗겨내는 것이다. 그런 무지함은 신약성서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접근방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사실상 성서 근본주의는 그러한 무지의 산물이라는 것을 밝힐 것이다. 또한 나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얼마나 깊이 유대적이며, 유대인들의 경전과 역사, 예배방식(Jewish patterns of worship)을 얼마나 많이 반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이제 복음서들을 올바르게 읽으려면 유대인들의 문화, 상징, 성상(icons), 그리고 그들의 전통적인 이야기 전달방식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미드라쉬(midrash)”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사람들만이 복음서들을 문자적으로 읽도록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이와 동일한 무지가 수세기 동안, 동정녀 탄생, 기적, 수난 이야기의 세부사항, 육체적 소생으로서의 부활 이해, 시공간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서의 우주적 승천 같은, 예수의 생애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 문자주의적으로 방어할 필요성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만들어냈다고 주장할 것이다.

 

(pp. 28-29) 나는 성서 문자주의를 이방인들의 이단(a Gentile heresy)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근본주의에 관한 나의 생각을 반드시 밝혀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그리스도교 교회 스스로가 성서 문자주의에 대해 확실하게 도전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죽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자주의는 그리스도교를 표면적으로 괴롭히는 가벼운 골칫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더 많은 사람들이 점차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사고방식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많은 문자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이 책을 통해 수행하려는 일을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성서를 문자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 외에는 성서를 읽는 다른 방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의 모든 교리”를 버렸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그런 비난을 여러 번 들었다. 심각하게 왜곡된 이런 관점은, 이 책이 얼마나 그리스도교적인지 볼 수 없게 만들 것이다.

 

(pp. 35-36) 결국 이것이 나의 딜레마이다. 나는 성서와 성서 연구가 내 삶과 믿음의 깊은 원천임을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또한 성서가 수세기 동안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일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성서에 대한 이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취할 수는 없다. 나는 현대사회에서 살기 위해 성서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성서를 붙잡기 위해 현대사회를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며, 앞으로 할 선택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내가 살아가는 이 축복받은 시대에 감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성서를 읽는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다.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성서의 단어들이 하느님의 입을 통해 말해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무식한 사람들이다.

 

(pp. 39-40) 예수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성서가 무엇이라고 말하건 간에 현대인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사실들에 대한 몇 가지 서술에서 시작한다. 별들은 인간의 탄생을 알려주지 않는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이 쫓아갈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별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천사들은 깊은 밤, 하늘에서 내려와 언덕의 목동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지 않는다. 처녀는 임신하지 않는다.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세례받는 사람 위에 임하도록 하늘이 열리지도 않으며, 세례받은 사람이 정말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구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지도 않는다. 한 소년의 점심식사인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기적으로 증식되어 수많은 사람을 먹일 수도 없다. 어느 누구도 물 위로 걸을 수 없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무덤에 묻혀 있는 나사로를 불러내 이승의 삶을 다시 살게 할 수는 없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시력을 회복할 수도 없다. 기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는 없다. 금요일에 십자가 처형을 당해 무덤에 묻힌 사람이 기적적으로 소생하여 일요일에 무덤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어느 누구도 삼층 구조 우주로 날아 올라가서 하느님의 처소로 돌아갈 수 없다.

 

(p. 68-69) 그러한 배경을 몰랐던 이방인들은 예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복음서의 원저자들이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들 원저자들은 예수를 히브리 경전과 연결시켰고, 그에 관한 기억을 유대인들의 제의적 관례와 결합시켰다. 그들은 예수 경험에 대한 유대적 해석을 기록한 것이지, 위인전을 쓰거나 역사적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날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교의 문자주의나 근본주의는 “이방인들의 이단(a Gentile heresy)”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회의 “이방인 포로기(Gentile captivity)”라고 부르게 된 기간에 태어난, 유대적 가르침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다.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복음서의 구절을 보게 되었을 때, 1세기 유대인들은 이것이 티쉬리월 10일에 있는 속죄일(욤 키푸르, [Yom Kippur]) 의식에 관한 언급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 유대인들은 이 익숙한 유대교의 제의적 표현들이 그토록 심각하게 왜곡되어, 그리스도교 왕국의 기초가 되어버린 “대속(substitutionary atonement)”이라고 부르는 것의 근거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p. 76) 고울더의 결론은 회당의 예배생활(the liturgical life of the synagogue)이 세 공관복음서의 기본 구성원리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나는 이것이 정확한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이 가설을 특별히 마태복음에 적용해 볼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이 복음서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극적이고 새로운 빛을 비춰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앞 장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교는 회당 안에서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 신봉자들은 회당에서 예배하는 유대인들로서 유대인 예수를 유대 경전들의 성취일 뿐 아니라 이 경전들이 말해왔던 것으로서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이전의 구전 기간 동안, 예수의 말씀들뿐 아니라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살아 있었던 환경이 회당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제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매우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pp. 77-78)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것처럼, 마태복음이 유대력의 안식일과 거룩한 절기(holy days)에 읽기 위한 예수 이야기들을 제공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면, 유대인 예배력의 기본 형태와 구조에 대한 인식 없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예배력에 대해 알고 있을까? 우리는 유월절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식료품점들은 사순절 식단(diets)과 유월절 식단을 함께 광고하니까 말이다. 우리에게 유대인 친구들이 있다면, “신년절(로쉬 하샤나, Rosh Hashanah)”과 “속죄일(욤 키푸르, Yom Kippur)”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절기들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는 이 절기들이 과거와 현재의 유대인들의 예배에서 어떻게 지켜졌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밖에도 오순절(샤부옷, Shavuot), 초막절(수코트, Sukkoth), 수전절(Dedication)의 의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무지를 생각한다면, 복음서들이 회당에서 형성된 전례용 책들(liturgical books)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편견을 갖고 있으며,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유대적인 모든 것에 대해 반대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들을 유대 경전에 대한 지식과 유대인 예배공동체 안에서 잘 알려진 예배방식에 기초한 책으로 보기 전까지는, 복음서들이 담고 있는 보물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를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p. 108) 그는 예수 조상들의 족보에서 시작했다. 그는 이 족보가 문자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을 합치면 마태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우리는 예수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했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는 예수가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이 그의 근원이며 그의 삶의 아버지였다고 믿는다. 비록 그것은 어떤 문자적인 방식으로도 입증될 수 없는 주장이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불완전한 상징, 약점, 심지어는 악함에서도 거룩함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태는 말한다. 하느님은 근친상간, 성매매, 유혹, 간음에서도 거룩함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니 예수 운동의 대적자들이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의 출신이 천하다고 주장하며 예수의 성품을 모욕하게 내버려 두어라.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이 삶에서 거룩함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간의 어떤 환경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pp. 174-75)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는 우리의 눈이 인간 내면의 신성을 볼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가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고,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고, 우리 존재의 가능성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권능을 받을 때,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과업은 인간의 온전함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과업은 인간성을 폄훼하거나 원죄(original sin)와 인류의 “타락(fall)”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를 우리의 죄를 위한 처방전으로 사용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예수를 그렇게 우리의 죄를 위한 처방전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특징짓는 것처럼 보인다.

 

(p. 219) 마태복음 12장은 회당 예배력의 속죄일에 상응한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 11장이 예수와 신년절을 연결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고, 이제 곧 13장에서 예수와 초막절 추수축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속죄일은 신년절 10일 뒤에 오고, 초막절 5일 전에 온다. 따라서 이 복음서가 회당 예배력을 근거로 해서 구성되었다는 이론이 입증되려면, 최소한 마태복음은 그 두 장 사이에 반드시 속죄일을 다뤄야만 한다. 만일 그 원칙에 대한 확실한 예외가 존재한다면, 이 책 전체가 근거로 삼고 있는 이론은 신빙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11장(신년절)과 13장(초막절) 사이에서 속죄일과 관련된 본문을 찾는 것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이 원칙을 시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pp. 225-26) 요나서는 과장된 세부사항들로 가득 차 있다. 멸망한 도시인 니느웨가 부활하고 확대되었다. 요나서는 니느웨를 “둘러보는 데만 사흘 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라고 설명한다(욘 3: 3). 역사상 가장 전성기를 누리던 때에도, 이 도시의 인구는 1만 명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나는 허드슨 터널 입구에서 시작해서, 뉴욕시의 이쪽에서 맞은편 끝까지 3일 안에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 뉴욕은 성서의 이 도시보다 거의 천 배는 인구가 많다. 니느웨의 크기는 분명히 과장되었다.

 

그 이야기는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고, 그 사람이 그 뱃속에서 3일 밤과 낮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물고기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 또한 과장법의 특징이다. 성서의 문자주의적인 이해 속에 갇혀 있는 서방세계의 이방인들만이 요나의 이야기를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그렇게 믿는 것으로 보인다. 요나서가 전하는 가르침은 훨씬 더 심오하며, 유대인들은 그것을 속죄일에 관한 가르침으로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마태는 12장의 속죄일 이야기에 요나서를 끌어들인다.

 

(pp. 241-242)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속죄에 관한 유대적 개념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대리적 속죄(대속, substitutionary atonement)”로 둔갑시켰던 것은, 이 과도기의 운동 속에서였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오해에 뿌리를 둔 고대의 신화와, 그 뒤에 이어진 그 오해에 관한 문자적 이해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과도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타락”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 안에서 권력을 갖게 되던 시기에 이르러 매우 지배적인 생각이 되었고, 대리적 속죄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의 초석이 되었으며,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신학은, 내가 앞에서 밝혔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주문(mantra)이 되어버린 표현에 가장 잘 담겨 있다: “예수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주문은 그리스도교라 불리는 모든 것에 결합되었다.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이 된 대리적 속죄는 궁극적으로, 처벌하는 괴물인 하느님, 하느님의 영원한 희생자인 그리스도, 죄책감으로 나약해진 특성을 지닌 인간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런 종류의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실을 믿는 최후의 추종자들을 설득하는 데 또 한 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리스도교가 일반적으로 오해되어 온 방식에는 미래가 없다. 나는 매우 헌신적이며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을 공언한다. 그리스도 교회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유대인들의 속죄일 관습으로부터 잘못 도출해 낸 속죄 교리에 대한 오해를 문자화했을 때 시작된 것이다.

 

편집자주1: 현재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있는 인류는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급격한 대멸종 사태 때문에 지구 역사상 신생대의 마지막 단계를 살고 있다. “공멸이냐, 상생이냐?”를 선택할 절박한 순간이다. 생태계 파괴로 인한 각종 감염병과 기후재앙들은 가난한 사람들부터 떼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에, 인류는 석유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 평균기온이 이미 섭씨 1.2도 상승했다. 파국을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인 섭씨 1.5도 상승까지의 탄소예산은 2030년까지 완전히 소진될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의 안보 전문가들은 2020년대부터 미국 중부와 멕시코 남부에서 농업이 “실질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며, “2040년대부터 북반구 대도시들에서 식량폭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따라서 앞으로 10년간의 정책은 수천 년간 지구와 인류의 생존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며, 폭력적 원리주의자들은 이런 혼란과 파국을 적극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기업정치와 연결된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문자주의에 입각해서, 한국의 개신교회 목사들 대다수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에 몰두하며, 미국의 대다수 복음주의자들(82%)이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 자체를 부인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극단주의 정치를 지지함으로써, 인류가 봉착한 전대미문의 최대 위기에 매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처럼 “초자연적인 전능한 하느님” 신앙이 강할수록 생태계 파괴에 무관심하다. 더 큰 문제는 “하느님은 왕”이라는 군주적 이해에 근거해서 근본주의자들이 갖는 폭력성이다. 미국 남부의 “거듭난 복음주의자들”은 아내구타, 인종차별에서 훨씬 폭력적이다. 또한 나치 시대 학살에 앞장선 SS 대원들, 한국전쟁 당시 서북청년단은 거의 모두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사태가 악화될수록 인간의 책임성과 합리적 해결을 방해하는 근본주의자들은 희생양을 찾는 한편 예수의 폭력적 재림(계 19장)이나 휴거를 통해 구원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네오-파시스트들은 흔히 국기와 함께 성경과 십자가를 내세운다. 따라서 성서 문자주의에 입각한 근본주의와 초자연주의 신학에 기초한 독선적이며 배타주의적 신앙과 극단주의 정치에서 벗어나, 성서에 대한 심층적 이해와 보편주의적 사랑 중심의 종교로 변화되는 길은 그리스도교의 진리만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도 매우 절박한 과제다. 응보와 심판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가 가르친 철저한 은총과 무차별적 사랑을 살아내는 과제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찾는 과제다.

 

 

편집자주2: 복음서 학자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 대한 제1차 반란(66- 73년)에서 수십만 명이 학살당하고(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반란 당시 예루살렘에 255만 명이 있었으며, 그 중 110만 명이 학살당했다, War 6.425, 420.) 예루살렘 성전마저 파괴된 사건이 초래한 엄청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복음서 기자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예수를 약속의 메시아로 선언한 복음이 당시의 처절한 시대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구절들을 통해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복음서 기자들은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의 복음을 통해 시대적 어둠을 돌파하려고 애를 썼는지, 반란 전에 예루살렘 크리스천 공동체가 요단강 건너 펠라로 도망갔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이 동족이 겪은 비극적 사건에 대해 의도적으로 외면했다면 구약성서의 민족주의 전통을 어떻게 해석한 때문이었는지에 대해 사회학적 분석은 차치하고 신학적으로 분석한 학자들은 찾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로마와의 전쟁은 가족들과 공동체들을 분열시켰으며 또한 서로 다른 모든 종파들은 성전 전통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천들은 성전 파괴를 기뻐한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또한 마가는 자신의 교회 구성원들이 회당에서 매를 맞고, 유대인 장로들 앞에 끌려나와 욕을 먹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복음서들과 미슈나가 당시의 이런 끔찍한 절망과 짙은 어둠을 종교적으로 돌파한 작품들임을 암시한다. 참조. Karen Armstrong, The Bible: A Biography (New York, New York: Atlantic Monthly Press, 2007), p. 69. 배철현 역, <성서 이펙트: 읽을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최초의 경전>(세종서적, 2013).

 

편집자주3: 예루살렘 제1 성전은 솔로몬왕이 기원전 966년경 예루살렘에 건축한 성전으로서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 제2 성전은 페르시아 시대에 바빌로니아 포로생활에서 귀환하여 516년경 건축한 성전으로 마카비(마카베오) 반란 중에 일부 파괴되었다가 기원전 10년, 헤롯대왕이 증축하고 62년에 완공된 성전으로서 기원후 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성전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뜰”은 20미터 높이의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지성소는 무려 50미터 높이였다. 또한 성전의 제단 자체는 엄청나게 큰 한 개의 네모 난 돌로, 높이는 8미터, 폭과 길이는 각각 25미터 크기였다(War 5 § 196, 207, 225. 그러나 미슈나 Middot 3:1에 따르면, 제단이 그보다는 좀 작았다). 특별한 절기들마다 성전에는 매일 많은 동물들이 바쳐졌기 때문에, 도살하는 작업만이 아니라 제단 위에서 그 고기들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부어가며 큰 갈고리들로 뒤집어가면서 불에 살라 바치는 일은 제사장들의 특권이었지만, 뜨거운 열기와 연기 속에 작업하는 매우 힘든 노동이었다. 황소 한 마디를 도살해서 제물로 바치는 작업에만 제사장 24명이 필요했다(미슈나, Yoma 2:7). 이처럼 고기가 익는 냄새와 기름이 튀는 소리를 토라는 “reach nichoach”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기쁨의 향기(the aroma of pleasure)”였다. 야훼 하느님이 그 향기를 맡고 콧구멍을 더욱 넓게 벌리신다고 믿었다. Bruce Chilton, Rabbi Jesus: An Intimate Biography (New York, N.Y.: Image Books, 2000), 216-17.

 

편집자주4: 예수의 비합법적 출생(사생아)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자들은 꽤 있지만, 예수 출생 전후에 갈릴리에서 벌어진 반란과 참혹한 학살의 기억이 예수의 자의식 형성과 하느님 이해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자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쟁의 테러리즘을 먼 기억 속에서나 간직하고 있던 예수”(김진호, <예수의 독설>, 162)의 혁명적인 메시지를 어떻게 비폭력적 생명의 하느님 신앙에 기초해서 정의와 평화의 대안적 하느님 나라 질서로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미국의 대표적 학자들은 월터 윙크, 존 도미닉 크로산, 리처드 호슬리 등이다. 학자들은 예수가 기원전 4년 헤롯대왕이 죽기 직전에 태어난 것으로 본다. 헤롯대왕이 죽자마자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갈릴리의 세포리스 역시 반란의 한 거점이었다. 로마제국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바루스 총독의 지휘 아래 약 18,000명의 정예 병력과 2,000명의 기병대와 15,000명의 보조 보병대를 파견했고, 바루스는 일부 병력을 가이우스의 지휘 아래 갈릴리로 출병시켜 모든 반란자들을 궤멸시키고 세포리스를 불태웠고 그 주민들(8천?1만2천 명)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바루스는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2천 명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세포리스에서 약 6km 떨어진 나사렛에서 예수 당시에 “중요했던 사건은 로마인들이 덮친 날이었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기까지, 그는 로마인들이 덮친 날에 관해서 되풀이해서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멀리 떨어진 신화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예수가 태어났을 무렵에 나사렛의 뒷마당을 유린한 군인들이었다.” 이처럼 마커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오랜 내전을 끝내고 로마제국을 세워 41년간 통치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기적적인 출생 이야기를 훨씬 능가하는 신화적 이야기로서 원시 교회의 선교적 필요성 때문에 만든 이야기로 설명한다. 참조. <첫 번째 크리스마스>, 김준우 역(2011), p. 105-108;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김기철 역(2001), p. 59; 존 도미닉 크로산 ? 조나단 리드, <예수의 역사: 고고학과 주석학의 통합>, 김기철 역(2010), pp. 110, 256; 리처드 호슬리, <예수와 제국>, 김준우 역(2004), p. 57.

 

편집자주5: 브루스 칠턴은 갈릴리의 베들레헴(유다의 베들레헴이 아니다)에 살던 목수 요셉이 아내와 사별한 후 홀아비로서 마리아 가족의 집을 수리하기 위해 나사렛에 왔다가 열세 살 정도된 마리아와 혼인을 약속했을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의 임신이 알려져서 나쁜 소문이 돌자, 요셉은 마리아를 갈릴리의 베들레헴으로 데려왔다고 설명한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 등은 요셉의 전실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Bruce Chilton, Rabbi Jesus: An Intimate Biography (New York: Image Books, 2000), 6-7.

 

편집자주6: 여기서 스퐁 주교는 착오를 일으킨 듯하다. 칠턴은 예수가 열 살 때부터 아버지 요셉을 따라다니면서 목수 일을 도왔지만, 열두 살 정도 되었을 때 요셉이 갈릴리를 휩쓸었던 결핵이나 말라리아로 사망했으며(p. 20), 그 후 마리아가 나사렛의 원로들과 의논하여 초막절에 예루살렘 순례를 결정했다(p. 23)고 본다. 예수는 어려서부터 ‘사생아’라는 소문 때문에 나사렛 회당에서 배척당하는 모욕을 자주 겪었기 때문에(p. 16),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바’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한 후 “마음이 충만해진” 그는 “북적대는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p. 32)고 말한다. “반항적이며 모험적인 정신의 소유자”(p. 33)였던 예수는 혼자 몇 달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뼈저린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굶주림과 싸움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강렬하게 믿게 되었고, “마지막 희망”으로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를 찾아가 몸을 의탁한 것(p. 37)으로 설명한다. 칠턴은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계약을 살아낼 ‘길’(halakhah)을 배우고 싶어 했다”(p. 33)고 주장한다.

 

편집자주7: 고고학자들은 1세기에 예루살렘 인구는 아마도 10만 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로마에 대한 제1차 반란이 일어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는 순례자들로 인해 255만 명이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예루살렘 탈무드에는 성전이 파괴될 당시 예루살렘 안에 회당이 480개 있었다고 말하는 반면에,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394개 있었다고 말한다. 로마에 대한 1차 반란으로 70년에 제2 성전이 파괴된 것이 기원전 586년에 제1 성전이 파괴된 이후보다 영적인 공백상태가 덜 심했던 이유는 이처럼 수많은 회당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Louis H. Feldman, “Palestine and Diaspora Judaism in the First Century,” in Christianity and Rabbinic Judaism: A Parallel History of Their Origins and Early Development, ed. by Hershel Shanks,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and Pearson, 2nd ed. 2011), pp. 6-7, 11-12, 24.

 

편집자주8: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유대교는 성전 없이 새롭게 정체성을 확립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약속된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신학적 주장들에 대해 평상시처럼 여유를 갖고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기 어려웠고, 배타적 입장이 우세하게 되어 정통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 사이에 적대감이 증가했다. 크로산은 이렇게 말한다. “65년 동안에, 즉 처음에는 C.E. 70-73년에, 그 다음에는 113-115년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132- 135년에, 유대교는 각각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와 그 주변지역에서, 그리고 또다시 팔레스타인에서, 로마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이 세 차례의 전쟁을 통해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났는데, 그 결과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 똑같이 중요한 결과였을 것이다. 첫째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유다에서 추방되었다. 둘째로, 이집트의 유대교가 괴멸되었다. 이로 인해 율법적(levitical) 유대교로부터 랍비적 유대교로 바뀌게 되었으며, 배타적 유대교가 포괄적 유대교보다 우세하게 되었다. 이런 나의 평가는 옳든 그르든 간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중립적 판단이며, 암묵적인 도덕적 고발이나 간접적인 종교적 비판이 아니다.” 존 도니믹 크로산, <역사적 예수>(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pp. 664-65. 그들 사이의 적개심이 마태복음 안에 어떤 폭력적인 수사학으로 표현되었는지는 본서 345쪽의 편집자주를 참고할 것.

 

편집자주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종교에 빠지는 신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반면에 왜 많은 보통의 젊은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알레르기”를 갖고 반종교적 세속주의자들이 되는가? 또한 교회 안에서 “종교적 진리의 절대성과 불변성”을 믿는 보수주의자들은 왜 흔히 반지성적이며 폭력적인가? 반면에 “모든 진리는 다 포용된다”면서 이성과 과학을 통해 종교의 해체를 주장하는 상대주의자들은 왜 흔히 권력과 이윤과 쾌락만 추구하는 일원론적 절대주의자들이 되는가? 문자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제3의 길”은 없는가? 캐서린 켈러는 과정 속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분별하는 “제3의 길”을 모색한다.

성서의 진리(truth)는 억압과 절망 속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해방과 사랑의 신비를 경험하고 미래의 새로운 창조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믿음(faith)과 희망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 믿음과 희망을 이방인들이나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기 위해 부득이 간단한 명제들(beliefs)로 바꾸고, 특히 로마제국 시대에 제국의 통일에 관심을 기울였던 황제들이 주도하여 그리스의 본체 형이상학(substance metaphysic)에 근거한 정통적 교리를 확립함으로써 절대적 진리로 획일화, 추상화되고 폐쇄적 진리 주장(truth claims)이 되었다. 따라서 정통 교리들로 표현된 신학적 진리는 교회 공동체 안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관계와 그 신비와 사랑에 대한 생생한 경험들로 확인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추상화되고 박제화된 교리는 전체주의적 폭력뿐 아니라 모든 무신론의 온상이 된다. 캐서린 켈러는 사도신경 자체가 “성서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추상화시킨 것”으로서, 추상화는 “성찰 과정에서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은유, 역사, 철학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것을 너무 쉽게 덮어버린다”고 지적한다. 즉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된 “전능하신 하느님”과 같은 은유를 무한성과 혼동하는 잘못이 문자주의로서, “문자주의는 신학을 단 하나의 의미 속에 동결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리스도, 주님, 구세주,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와 같은 은유들이 추상화되고 절대화되면, “그 은유들이 불변의 진리 속으로 가루가 되어 묻혀버린다”고 지적한다. Catherine Keller, On the Mystery: Discern- ing God in Process (Minneapolis, MN: Fortress, 2008), pp. 3, 8, 14-16. 이 책은 <길 위의 신학>(박일준 역, 동연, 2020)으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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