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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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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이게 무엇을 말하는 거냐? 의사단일을 말한다. 이 의사단일은 창조의 목적을 둔 구원의 단일을 말한다. 우리는 주님과 의사단일이 되어야 하는데, 이 의사단일은 천국복음에 의사단일이다. 이러려면 나의 모든 언행심사를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야 한다. 여기에 빼거나 덧붙이면 인본주의로 흐르게 된다.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의사단일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느냐? 마찰 충돌 대립이 일어난다. 이러면 이 가정은 바로 서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부모의 말씀에 순종을 잘하는 자식이 있기도 하지만 사람은 개체 개별적이라서 대부분의 가정이 부모와 자식 간에 마음이 달라서 의사단일이 되지 않는다. 한 편으로는 자식이 어릴 때부터 부모와 의사단일로 성장을 하면 이 자식은 사회적인 면으로 발전이 힘들 수도 있다.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는데 개발력이나 순발력이 없는 학생은 학교생활을 무난하게 하고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지만 사회생활을 할 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위한 사역을 하는 것을 주님의 사랑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님 밖의 인본주의 사랑이다. 사람을 성품과 인격적으로 최고의 실상의 사람으로 올리는 게 구원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사람이 되면 모든 언행심사가 지혜롭게 나온다.
우리가 생명과를 먹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나온다. 사람마다 당하는 사건이 같지 않고 차원이 같지 않지만 생명과를 먹는 사람은, 즉 하나님의 진리지식을 먹는 사람은 지혜가 나와서 그 어떤 면에서도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게 된다. 그런데 생명과는 먹지 않고 행동이나 활동위주로 나가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게 보면 성경과 비슷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이런 것에 많이 속는다.
세상의 사랑은 항상 전제가 붙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면서 절대적인데, 지식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혜가 있는 무조건의 사랑이다. 이렇게 된 사람은 상대가 어떻게 나오던 요리를 잘해서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린다. 이게 복음이고, 성경이고, 예수 믿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자기의 성격 성질을 하나도 못 고치고 세상풍습을 좇는 것도 못 고쳤다면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어떻게 예수를 믿어왔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의 교훈을 받으면 자기를 생각할 수 있다. 젊었을 때 어른이 앞일을 내다보고 해 주는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살다가 어른이 되어서 고생을 하게 되니 ‘그 어른의 말씀을 들을걸’ 하는 사람도 있고, 젊어서 부모의 강압으로 자기 마음대로 못해서 부모에게 불만이 많았는데 자라서 보니 ‘그때 부모님이 잘 하셨구나’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깨닫고 바르게 산다고 해서 바로 살아지는 거냐?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면 이빨이 빠진 것처럼 허점이 많다. 죽을 때까지 올라가도 하나님께 100% 도달이 안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노력한 만큼 닮아갈 수는 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바로 하려고 해도 이질적인 교훈을 받고 이질적인 신앙상태에서 바로 하려고 하면 이는 거짓된 신앙이고, 이단자도 될 수 있고, 실컷 하고도 얻어맞고 심판을 당하게 된다.
세상은 ‘공부를 잘한다. 못한다’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 양심이 무엇을 붙잡고 있나? 어디로 치우쳐 있나?’를 보신다. 그래서 교회 인도자는 사람마다 성질이 급하고 느린 것을 보기보다는 제일 중요한 것은 ‘복음의 본질로 나가느냐, 이질로 나가느냐?’ 하는 것을 봐야 한다. 이게 옳은 거다.
세상은 행동을 기준 삼아서 말을 하는데, 복음의 사람은 이런 말을 들을 때 이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를 보고 보고 자기의 속을 살피면서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야 한다.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면 마음이 가볍고 기쁘고 즐겁고 걱정 근심이 물러간다. 이 마음은 하늘보다 더 높고 넓기 때문에 자유롭다.
‘사랑’이라고 할 때 아가페, 필레오 스톨게, 에로스 사랑이 있는데, 필레오 스톨게 에로스 사랑은 인적인 세상 속화된 사랑이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모르고 인적인 사랑만 아는 사람은 행동으로 사랑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건 인간을 나타내는 것이라서 몹쓸 사랑이다. 아가페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인적인 사랑을 주면 의지성만 늘어나서 사람이 망가진다. 그래서 교회에서 구제할 때는 신경을 써야 한다.
필레오 스톨게 에로스 사랑은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람에 따라 써먹는 사랑이고, 아가페 사랑 속에는 이 세 가지 사랑이 들어있다. 교회 성도들은 형제이기 때문에 형제의 사랑을 써먹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니 아가페 사랑을 기준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형제의 사랑을 써먹어야 한다. 아가페를 중심 하지 않고 형제 사랑으로 나가면 그만 육으로 빠지게 된다.
어느 나라 사람이던 아가페 사랑으로 되면 모두가 내 형제고, 천국백성이고, 부모 형제가 된다. 그런데 육적인 개념으로 들어가면 ‘이왕이면 한국사람을 더 사랑해야지’ 하게 된다. 이건 육으로 돌아가 버린 거다. 아가페 사랑은 인간의 표현으로 전 우주적이다. 그래서 아가페 사랑으로 된 것은 편견이 없다. 이게 옳은 사랑이요 넓은 마음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육적인 개념으로 편견이 되어서 ‘이왕이면 우리 형제부터’ 라고 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옳은 말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자기 집에 믿는 가족이 있고 안 믿는 가족이 있다면 믿는 나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느냐? 예수님은 어느 편을 들겠느냐? 또는 나는 예수를 믿고 다른 형제는 안 믿는데, 명절에 부모가 이방풍습을 지키려고 할 때 믿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안 믿는 형제가 누구 편을 들겠느냐? 이런 일을 당할 때 믿는 우리가 이겨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이런 것을 이기고 나왔다면 이기고 나온 숙달성의 성품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속성이 되는 거다. 옳은 습관과 버릇은 어릴 때부터 되는 거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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