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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4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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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42절-48절: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니라.
45절-46절: ‘만일 그 종의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은 율에 처하리니.’ 여기서 종들이 행한 일에 있어서 상벌을 결정하는 자는 누구냐? 종 자기냐, 주인이냐? 주인이다. 주인이 빨리 오고 늦게 오고 하는 것도 종이 정하는 게 아니라 주인이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선악 간에 행한 일에 대하여 ‘이게 생명적인 거냐, 사망적인 거냐?’ 그걸 생각을 하면서 살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깨달음으로 오는 건데 선악과 먹고 나온 타락되고 저주받은 자기 주관적으로 예수 믿으면서 감정과 흥분을 일으키는 것을 은혜 받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말씀을 들을 때 경험적으로 들은 것이 나의 주관적 지식이 돼서 판단을 하고 있지는 않은 건지, 아니면 말씀의 이치를 따라가고 있는 건지?
주인이 빨리 오고 늦게 오고 하는 것은 주인이 정할 일이지 종 자기가 정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수 믿는 자기의 신앙의 태도를 점검하면서 주님이 빨리 왔으면 좋겠는지, 늦게 왔으면 좋겠는지, 아니면 안 왔으면 좋겠는지? 이게 지금 자기의 신앙 믿음이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으로서는 ‘날마다 시험을 치면 좋겠다. 시험날짜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할 것이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시험 치는 날이 무섭다고 할 것이다.
본문의 청지기는 참 미련하고 어리석다. 왜냐? 여기 보니 종이 ‘주인이 빨리 오겠다. 늦게 오겠다’ 하며 자기 마음대로 생각을 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그런데 이 청지기의 그 어리석음도 어떻게 보면 나보다도 더 영리하다. 왜냐? 나는 그것조차도 생각을 못하고 살고 있으니까. ‘주님이 늦게 오겠다. 빨리 오겠다’ 하는 그 생각도 없이 세상이라는 땅에 붙어서 살고 있으니 이 말씀을 읽을 때 깨닫는 우리 입장에서 종을 욕할 일만이 아니로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이방인들이 사는 사고방식을 따라가며 그들과 같이 놀 게 아니라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에서 특수성의 성질이 들어있는 건데 그것조차도 모르고 세상과 짝지어 돌아다니고 있으니 본문이 비유이긴 하지만 이 청지기가 그런 나에게 말을 한다면 뭐라고 말을 할까? 이 어리석은 청지기가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할까?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것 같으면 ‘주인이 빨리 오는 것보다 늦게 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람마다 생각은 자유이지만 이치에 안 맞는 생각을 자기 자유로이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큰 봉변을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치에 안 맞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참 많다. 내일 모레, 몇 년 후의, 몇 십 년 후의 꿈을 가지는 건 참 어리석다. 왜 그러냐? 내일 날은 너의 날이 아닐 수도 있다. 오늘밤에 너를 데려갈 수도 있다. 네 마음대로 해를 뜨게 하고 지게 한다면 네가 그렇게 네 마음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해가 뜨고 지는 건 창조 때 인간이 건드릴 수 없도록, 내 마음대로 되지 않도록 천체의 법칙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놨다.
주인이 잠깐 집을 나간 게 무슨 마음을 가지고 나간 건지? 진짜 주인 자신의 일로 나가신 건지, 종의 위해서 잠깐 나가주신 건지, 악한 청지기의 증거를 잡기 위해서 나가셨다가 갑자기 들어오려고 한 것인지? 이해가 되느냐?
예수님께서 왜 부활 승천을 한 것이냐? 33년간 죽도록 일을 해서 이제는 몸이 아프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그 후유증을 치료하려고 부활 승천한 것이냐? 누구를 위해서 부활 승천한 것이냐? 나를 위해서이다. 각자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라면 그 분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게 있을 것이다. 어떤 면의 나를 위해서이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노라리 하고, 묻지마 관광도 가고, 중동에 여행이나 가고 그렇게 하라고 부활 승천한 것이냐?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심도 나를 위해서이다. 어떤 나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깨달으면 그게 구원이요, 그게 주님을 아는 거다. 예수님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당신처럼 만들어 주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온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속성적 온전을 만들어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만들어졌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하나님의 은밀한 뜻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가 나를 보던지 나와 사귀고 싶어 하고, 나를 경험한 사람은 “당신에게서는 하나님의 냄새가 난다. 당신의 마음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저럴 것이다’ 하는 생각이 난다” 그렇게 돼야 하겠는데 누가 자기를 사귀면 독사 같다고 하느냐, 곰 같다고 하느냐, 욕심쟁이라고 하느냐, 도둑놈이라고 하느냐, 사기꾼이라고 하느냐?
말씀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하지는 않고 성경에 있는 믿음 좋은 선조들이나 선지자들의 이름만 똑똑 따서 써먹으려고 하느냐? 인격적 속성적으로 진리 자체화 되려고 하지는 않고 껍데기만, 외모 모양만, 형틀만 따라 하려는 걸 외식자라고 하는 거다.
우리들의 마음이 악한 청지기처럼 돼 있지는 않나? 제 멋대로 막 하는 건 자기 세상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자기 세상으로 세상을 산 사람을 새의 밥으로 기르는구나. 새의 밥으로 기르는 사람도 있구나. 동물원의 사자나 호랑이에게 밥을 주려고 토끼나 닭을 키우는 것도 있다. 복날은 개를 잡는 날이다.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주의 날’ 하는 것도 있는데, 은혜 받는 날이 주의 날이지만 반대로 심판의 날을 의미로 둔 ‘주의 날’도 있으니 ‘이때까지는 너의 날로 살았다. 오늘은 심판의 날, 나의 날이다. 내가 주권행사를 해야 되겠다’ 하는 주의 날도 있다. 이 주의 날은 내가 때려 잡히는 날이다.
자기가 출생한 날도 있지만 자기가 죽는 날도 있다. 죽는 날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죽는 날을 이룰구원을 놓고 생각을 하면 슬프다. 육신이 죽으면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는 이룰구원을 더 이상은 못 이룬다. 그러니까 너는 이제 끝났다. 그래서 이룰구원을 생각하면 참 슬프다.
몸에 병이 들면 이룰구원 면에 수종을 못 든다. 그러면 몸이 건강할 때 말씀을 잘 받으려고 애를 썼느냐? 대개가 몸이 건강할 때는 제 멋대로 다니고, 자기 계획대로 자기 생각대로 한다. 우리교회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고 은혜 받는 걸 중심으로 하고 모든 것을 짜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세상 프로그램에 짜놓고 예수를 믿으려고 하니 어떻게 예수가 따라지느냐? 쉽게 말하면 세상기준에 맞춰놨는데 예배시간이 어떻게 지켜지겠느냐? 이건 예수 따르는 게 아니다. 정신자세부터가 기본적으로 벗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넓은 길 사망 길을 가면서 제 소원을 이뤄달라는 식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다’ 할 때 첫째는, 존재적으로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 둘로 쪼개고, 그런데 중간이 아닌데 중간처럼 보이는 게 뭐냐 하면 예수님 당시 때도 있었지만 바리새교인들 서기관 율법사들 대제사장들 사두개인들 이게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을 심판을 왜 하느냐? 쉽게 말하면 부모가 남의 자식을 데리고 와서 두들겨 패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식을 데려다가 패듯이 하나님도 그렇다. 안 믿는 사람은 도매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가는 게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교훈적으로 보면 그 안에 이치가 들어있으니 그 이치를 따라서 사는 게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할 때는 교훈이 들어간 의미의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정신과 마음이 들어가게 되니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악한 청지기는 그것도 저것도 모른 채 주인이 자기 눈에만 안 보이면 그만 그 속성이 드러난다. 자기 집에 엄마 아버지가 안 보이면 애들의 속성이 그냥 막 드러난다. 학교 교실에서 선생님만 잠깐 나가면 책상 위로 뛰어다니고 본성이 다 나온다.
주인집에는 남녀 어린 노비도 있고, 처녀 총각도 있고, 늙은 남녀 종들도 있다. 그런데 청지기가 왜 종들을 충격을 주고 때리고 상처를 내느냐? 이건 필경 주인에게 원망불평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청지기가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노비들을 때리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때리고, 주인이 집을 비우면 자기를 주인대우 안 해 준다고 노비들을 때리고, 나이 따지고, 서열 따지고, 배움 따지고, 신체 따지고, 키 따지고, 재산 따지고.
이 악한 청지기가 주인을 미워하면서도 주인의 것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고 취하고 있으니 정말 나쁜 자이다. 청지기로서의 본문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다. 영의 눈을 가지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오늘날 자기의 그림자가 보인다. 종들이 마땅히 자기 할 일은 안 하고 주인의 가산을 탕진하고 있다면 이는 악한 청지기라고 보는 것이다. 이게 교회에 주는 말씀이고,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고, 특히 교회를 인도한다고 하는 목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46절: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악한 청지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면 주인이 가만 두겠느냐? 법에 회부가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저렇게 살다가는 이방인의 법에 걸리겠는데’ 하는 게 있다.
이 악한 청지기가 주인집에 있으면서 무엇 하나 똑바로 가진 생각이 있느냐? 노비를 잘 보살폈느냐? 인격적 관계성을 바로 가졌느냐? 자기의 인생관을 바로 가졌느냐? 공과 사를 공의롭게 가졌느냐? 시간관을 바로 가겼느냐? 축복관을 바로 가졌느냐? 사람의 존재 가치관을 바로 가졌느냐? 무엇 하나 똑바로 가진 게 없다. 그러니 이 악한 종은 이성 없는 짐승과 같다고 보는 거다. 피부 골각 모양새가 사람이지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속성적으로 보면 사람다운 데가 없다. 일반적으로도 사람이면서 사람을 해코자 하면서 사는 건 사람다운 데가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자기는 자유하며 산다고 하겠으나 그 자유 뒤에는 반드시 행한 대로의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소가 사람을 치어서 죽이면 소를 감옥에 가두는 게 아니라 주인을 가둔다. 심판은 인격성을 가진 존재에게 가해지는 거다. 인격성을 가진 존재라야 선이던 악이던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거다. 따라서 인격성을 가진 인간의 언행심사의 자유 뒤에는 반드시 네가 원하던 원치 않던, 알던 모르던 심판이 들어간다. 어린아이가 사이다인줄 알고 농약을 마시면 어린아이라고 해서 농약이 봐주느냐? 몰라서 먹건 일부러 먹건 행위대로 들어간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집의 종과 같다.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다 만들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먹고 마시고 쓰는 거다.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모두가 그 만드신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걸 쓰면서 이용하고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물질세상을 만들었는데 이걸 계시적으로 보면 그 두 사람은 인류의 대표요, 모든 인류가 그 옆구리에서 나왔으니까 모든 물질은 모든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똑같은 이치로 모든 인간은 쓰고 먹고 마시고 사용하고 활용하고 이용할 수 있는 물질을 사람을 위해서 쓰게 돼 있는 거다. 그런데 이 물질을 사람을 위해서 쓰지는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에게 온 물질을 하나도 밖으로 안 내보내고 움켜쥐고 있다면 세상이 잘 살아질까, 지옥 같은 세상이 될까? 지옥 같은 세상이 된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은행이라는 것을 인간들로 통해서 만들어 돈이 돌게 한 것이다.
장사꾼이 장사를 하면서 돈이 들어오는 대로 그 돈을 농속에 다 집어넣으면 장사가 잘 될까? 그 집은 망한다. 들어오면 새로운 좋은 물건을 싸게 사서 싸게 팔면 그 집은 성공하고 자꾸 돈이 벌어진다. 이치적으로 말하면 나무뿌리에서 물을 빨아 당겨서 기둥으로 보내고, 기둥은 가지로 보내주면 그 나무는 자꾸 커진다. 그런데 나무뿌리가 ‘내가 빨아 당겼는데 왜 위로 보내느냐’ 하게 되면 그 나무는 썩는다. 그런 것처럼 일반적으로도 물질을 쓸 줄을 모르고 끌어 앉고만 있으면 자기 옆에 사람이 안 붙는다. 그러면 자기가 행복하냐? 외톨이가 된다. 병들고 죽는다. 병이 들어도 들여다 볼 사람이 없다. 아프면 엎어서라도 병원에 갈 사람이 있겠느냐?
예수 믿는 것은 신령천국에 가는 건 분명한 거고, 그 신령천국에 들어가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쌓은 영능의 실력대로 신앙실력대로 믿음실력대로 그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는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사관계 대물관계를 적절히 가지게 되면 그게 바로 그 나라를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이 되는 거고, 이 땅에서는 그로 인해서 행복한 거다. 사람은 사람으로 통해서 행복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단순히 돈이 많다고 행복? 이건 네가 뭘 모르는구나.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는 것은 우리를 골탕 먹이고 일만 죽도록 시키고 차버리려는 게 아니라 영원히 행복하고 존귀 영광스러운 주님처럼 닮은 사람, 하나님처럼 닮은 사람,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되게 해 주시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가 성경대로 따르는 건지, 성경 밖에서 살고 있는 건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만들어 놓고 인간 자기를 그 가운데서 살게 한 이유가 뭐냐? 모든 물질을 사용 활용하면서 무엇을 키우라는 것이냐? 모든 인간은 대신관계를 바로 놓은 상태에서 대인관계를 바로 가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아관계도 있다. 자아관계가 잘 되면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구속으로 기본구원은 전제가 되고, 예수 믿는 자기 속에는 옛사람이 있고 새사람이 있으니 자기가 세상물질이 좋아서 물질을 따라가고자 하는 옛사람의 속성이 있고, 주님의 말씀이 좋아서 주님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속에는 두 존재가 아닌 두 성분이 자기 속에서 싸우는데, 그 싸움에서 이긴 쪽이 자기의 주격이 되는 거다.
믿는 우리가 새사람으로 살면 생각이 새롭고, 모든 사고방식이 새롭게 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면 자기는 모른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잠재의식 속에서 예수님을 바로 믿고 바로 따라가다 보면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나는 새 것이 있는 거다. 이렇게 되면 그 자기의 모든 소원 목적과 사고방식과 지혜지식성과 도덕성이 새 것으로 돼 나오니 다른 사람은 세상을 보고 못 살겠다고 야단인데 예수 믿는 자기는 ‘보라. 새 하늘이로다’ 한다. 보는 각도가 달라진다. 사는 각도가 달라진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보라. 새 하늘이로다’ 그렇게만 생각지 말아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예수 믿으면서 자기의 출생목적 존재목적, 목적관이 그 전과는 달라졌다면 이건 새로운 거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룰구원의 재료감이 엄청나게 많다. 다른 사람은 제 좋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새사람은 자기 앞에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이거는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고’ 재미가 있는 거다. 그런 면에서 꼬리가 아닌 머리다. 이게 멋있고 매력 있는 사람이다.
주님이 보시는 눈은 인간들이 보는 눈과는 다르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모른 채 ‘내 형편이 이러니 내 뜻대로 해 주십시오’ 하는 게 예수 믿는 거냐? 이건 예수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신앙의 주격이 다른 거다.
우리는 대인관계를 바로 가져야 한다. 대신관계를 바로 놓은 상태에서 대인관계가 바로 되어야 한다. ‘네가 발로 밟는 대로 내가 다 주겠다’ 라고 하셨으니 대신관계가 바로 된 상태에서 대인관계를 바로 가지면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적 관계 즉, 주종관계가 바로 돼야 횡적 관계가 바로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타락적 선악과 먹은 지식을 가지고 이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는 부르는데 그 사람의 지식의 기준이 인간이요 세상이다. 그러니 주님을 불러다가 세상에 맞춘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을 그렇게 들어가 있다. 성경은 하늘나라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고, 썩지 않는 것, 영원히 가는 것, 존귀영광성이 들어있는데 이걸 세상으로 바꾼다. 이게 거짓 종이요, 이게 이단자들이요, 이게 마귀의 수법이다. 이 마귀수법을 어디에서 쓰느냐? 교회 안에서 쓴다. 계:에도 있다.
대신관계 대인관계, 또 대사관계가 있는데 사건이 오면 안 믿는 사람은 주로 사건 쪽으로 치우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을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또 대물관계가 있는데, 물질을 쓰는 것도 대신관계를 바로 하고 써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식당을 하면서 벽에다 ‘처음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 하는 걸 붙여놓고, 달력도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달력을 걸어놓고서는 주일날도 안 쉬고 장사를 한다. 이건 기본자세도 안 된 거다. 이걸 못 고치면 나중에 자기에게 큰 앙화가 된다.
대물관계가 바로 돼 있어야 바른 청지기가 되겠는데, 청지기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가지고 온 게 있느냐? 하나도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청지기와 같다. 그리고 또 하나, 교회들을 보면 교회의 모든 인도자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청지기와 같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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