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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4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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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45절-48절: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45절-46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성경 속에 담긴 뜻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시는 은밀계시이다. 이것이 우리의 진리생명의 양식이다. 믿는 사람은 이걸 잡고 사는 거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물질위주의 생각을 가지고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을 소원 목적하고 살기 때문에 자기의 주된 생각이 눈에 보이는 것, 세상 물질의 것, 자기의 외부 표면이다. 주가 그렇다.
안 믿는 사람들은 육의 생각, 세상생각, 눈에 보이는 생각,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한 그 기준으로 산다. 안 믿는 사람들은 ‘너의 영혼이 죽는다’ 하는 건 모르고 물질적 개념으로 자기의 몸과 생활, 앞으로의 노후대책 등 다 눈에 보이는 것을 목적하며 산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임시성이요 잠깐이다. 불에 타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 썩기도 하고, 지진 나면 진동이 돼서 무너지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이런 위주로 들어가 있다. 믿는 사람은 그런 걸 따먹으면 안 된다. 죽는다.
모든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 돼 있는데 영은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유전죄가 있고, 또한 그 유전죄 때문에 자범죄가 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영이 중생이 됐다.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
그 살아남의 질은 또 죽는 것으로 돼 있지를 않고 하나님의 질과 똑같은 질로서 하나님이 죽지 않는 한 우리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물론 마지막 날에 몸의 변화 부활이 있다. 중생된 영은 절대로 죽지를 않는다. 중생된 이 영은 예수님의 구속으로 중생이 된 것인고로 하나님은 아니로되 질적으로 하나님과 똑같은 영원히 가는 질로 돼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지금 죽어도 그 영은 천국에 들어간다.
만일 믿는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영이 지옥에 가게 된다고 하면 믿는 사람이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게 됐는데 그 사람이 다시 또 천국에 가려면 예수님이 다시 또 와서 33년간 사신 것처럼 또 그렇게 살다가 또 십자가에 죽어주셔야 한다. 그리고 중생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경우가 한 사람만이 아니라 수억 억만 명이니 그 모든 사람을 위해 매 번 그렇게 오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해야 한다는 말이 되니 이건 이치에 안 맞는 거다.
영이 중생한 우리는 이제 죽어도 천국은 간다. 문제는 천국이라는 고향에 들어갈 때 전장에서 이긴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들어가야 하겠는데 안 믿는 사람처럼 살다가 들어가면 그 꼴이 뭐가 될까?
성경에 보면 하늘나라에도 해와 같은 영광이 있고, 달과 같은 영광이 있고, 해와 별의 영광이 각기 다르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믿음실력, 영능의 실력에 따라 그 나라에서의 누림성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 실력은 하나님의 신적인 지혜지식성이나 신적인 도덕성이나 신적은 능력성으로 현세에서 인도자들의 바른 가르침으로 그게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그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 자기에게 많이 되느니만큼 속성적 인격적으로 진리말씀으로 자체화 실상화 되는 것으로서 이렇게 자기 자체화 실상화 된 것은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요, 하늘나라에 그대로 들어가는 것이요. 실상화 된 그것을 가지고 그 나라를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이 땅에 살면서 예수를 믿고 대신관계가 바로 되고, 대인관계가 바로 되고, 자아관계가 바로 되고, 대사관계가 바로 되고, 대물관계가 바로 되어야 한다. 이게 자기의 정복적 실력의 판도로 넓혀 들어가는 거다. 이게 정복이다.
‘네가 밟는 것을 너에게 다 주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했다. 롯은 유황불이 떨어질 소돔 고모라를 향해서 갔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자는 대로 천막 하나 들고 약대를 끌고 갈 때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 약속을 하신 것이다.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게 해 주겠다고 했다. ‘별처럼’ 하는 건 땅에 떨어진 별이 아니라 하늘에 뜬 별을 말한다. 즉 신앙 믿음의 사람으로, 영능의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 왕통계열, 제사장 계열, 선지자의 계열을 말한다.
이게 우리의 족보로 들어가는 거다. 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비상수단을 쓴 자들이 이 족보에 들어갔다. 마:에 있다. 비상수단을 쓰는 그 생명계대 그 구원계대로 죽 내려가니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다. 이게 생명계대요 구원계대다.
오늘날 많은 믿는 자가 있으나 구원계대로 가는 사람이 따로 있다.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성격적으로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예수님의 적중성의 질로 들어가는 신앙이라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건성건성은 안 된다.
영인의 성장은 예수를 믿고 생명의 영의 양식을 먹어야 되어지는 것이다. 이 영의 성장이란 성경 껍데기가 아닌 그 속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성 율법성을 먹으면서 순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늘의 만나를 먹었다. 그걸 먹으면 그 사람의 질이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의 영감으로 자기 속에 또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면 이게 바로 하늘의 만나다. 지금도 하늘의 만나는 역사하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담겨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면 이게 있어야 한다.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지 않느냐? 자기 몸은 깨지기 쉬운 항아리다. 그런데 이 항아리가 귀한 것은 그 안에 만나가 들어있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이게 법궤 속에, 말씀 속에 있다.
진리생명의 양식은 주인의 것, 주님의 것,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쉽게 말하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집의 종들에게 때를 따라 잘 나눠줘야 한다. 이건 본문을 보면 청지기 밑의 종들이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 전도사나 집사 등의 직위를 가진 사람으로 말을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평신도들까지 다 들어가는 것이다. 왜 그러냐? 청지기가, 쉽게 말해서 오늘날 목사님들이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서 진리이치를 캐내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보화와 같은 것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즉, 주님의 일에 수종드는 종들에게 주어야 한다. 본문은 그걸 말하는 거다.
성경은 교회에게 주는 거고, 교회는 바로 성도들이니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도 자기에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나오면 안 믿는 사람을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도 하고, 야단도 하고, 책망도 하고, 형벌도 할 때 당신의 백성에게 하더라. 남 얘기하듯이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천국곡간에는 즉, 알기 쉽게 말해서 성경에는 없는 게 없다. 신령한 하늘나라의 천국곡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교육의 깨달음에 있어서는 성경이 천국의 곡간이다. 또 계:에서 ‘하늘 문이 열린다’ 하는 게 있는데, 물론 우리가 변화 부활을 받으면 하늘 문이 열려서 천국에 들어간다. 그런데 교훈적 깨달음으로 들어갈 때는 성경을 통해서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이다. 하늘 문이 열리면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 건지 다 보이듯이 성경의 문이 열리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지 그게 보인다.
하나님의 천국곡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으로 자랄 수 있는 모든 게 들어있다. 하나님의 온전이란 마5:48에 ‘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온전하라.’ 그러니까 온전이란 하나님의 성품 또는 속성,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인격을 닮는 것을 말한다.
안 믿는 사람은 자기가 듣고 경험하고 배운 게 들어있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배우고 듣고 겪고 한 것을 넣는 게 아니라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순전한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들어가 놓으면 그 다음에 세상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고가 나온다. 원리가 그렇다.
하나님 당신의 만능의 능력의 속성을 가지고 말씀으로 세상을 만들고, 만든 그 세상에 이치와 법칙을 넣어 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인간 되어 오셔서 교훈을 하실 때에 세상에 있는 만물을 가지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더라. 공자가 석가가 이런 말을 했다더라’ 이건 게 있느냐? 없다. 그런데 속화된 목사들은 왜 그런 사람들의 말을 갖고 와서 설교를 하느냐? 소크라테스가 한 말 중에 ‘너 자신 알라’고 한 게 있는데,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전에 그 말을 한 사람이 없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누가 산을 물이라고 했느냐? 우리는 ‘그 산이 우리에게 뭘 가르쳐 주고 있느냐’ 그걸 아는 거다. 물의 흐름 등을 보고 얼마든지 신앙의 이치를 깨닫는 거다. 강의 물줄기가 얕으면 물이 흐르는 소리가 시끄럽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도 계속 떠들고 있는 사람은 속에 든 게 깊다는 말이냐, 얕다는 말이냐? 얕다.
얕은 물은 쉽게 건널 수가 있다. 그런데 깊은 물은 소리가 없이 흐르면서 사람이 건너가려고 하면 그 물이 사람을 몰고 가는구나. 깊은 강물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 그 깊은 강물 속에는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다. 이걸 신앙의 이치로 보자면 진리이치로 많이 들어가 있는 사람은 그 안에 살아있는 것이 즉, 살아있는 정신 마음 사상 지혜지식이 많이 움직인다. 그러니 생산적인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 상이다. 이런 게 다 머리가 될 사람이다.
하나님의 온전으로 자랄 수 있는 영의 양식이 성경에 많이 들어있다. 도덕 면의 이치, 지혜지식적인 면의 이치, 관계성 면의 이치, 우주만물의 이치가 다 들어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많이 읽고 있느냐? 연애소설이나 스포츠 신문 같은 건 많이 보지만 성경을 그렇게 보느냐? 성경을 자기의 자장가로 쓰는 사람도 있느냐?
성경의 창고 안에는 영의 양식이 가득 들어있는데 이 문을 따고 가져가서 나눠줄 줄 아는 청지기는 의롭고 신실한 청지기다. 오늘날 거짓 종들이 많은 이때에 하나님의 것으로 진리 진실로 나눠줄 신실한 청지가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것은 줄 줄을 모르고 세상 물질축복 충성봉사만 가르치고 있다면 이건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성경창고 안에 영의 양식이 많은 건데 이것을 부지런히 먹이지 않고 왜 물질 충성봉사 노력봉사 활동봉사로만 가르치느냐? 그렇게 되면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영인성장 면에서 수년 수십 년을 믿어도 하나도 자라지를 못한다. 그러니 성경에 대해서는 한 이치도 못 깨닫게 될 것이니 그런 사람이 말을 한다면 ‘교회생활을 얼마나 했다’는 둥, ‘뭘 어떻게 했다’는 둥 맨 그것만 자랑한다. 이건 교만이다. 목사님들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어떤 게 부지런하고 어떤 게 게으른 건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 잠:에 ‘은금을 가지는 것보다 지혜를 가져라. 지식을 가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네 목에 금사슬이니라’ 하는 것은 그걸 매달고 다니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를 그렇게 존귀히 여기겠다는 것이다.
세상 마지막 심판은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앞세우고 와서 책임추궁을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건강했다가 몹쓸 병이 왔다면 왜 온 것인가? 마귀가 갖다 줬다고 하면 안 되고, 그런 것도 다 하나님의 허락이라야만 되는 것인고로 내가 원치도 않는데 내 몸 안에 몹쓸 병이 온 것은 내 쪽에서 나의 미련을 생각을 한다면 ‘내가 병을 불러들였구나’ 이게 되는 거고, 깨닫는 면으로 생각을 하면 ‘네가 네 몸을 왜 못 다스리느냐’이다.
자기가 자기의 몸을 못 다스리면 그 사람은 침대 위에 눕혀진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와서 짚어보고 바늘로 찌르고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인지라 안 아플 수는 없으나 한 번이라도 아프다면 어쨌든 자기에게는 그만큼 손해다. 내가 내 몸을 못 다스리게 되면 남이 나를 다스려 주어야 한다. 내가 밥을 못 떠먹으면 다른 사람이 와서 떠먹여 주어야 한다.
우리 앞에는 병이라는 사건, 또는 사고의 사건 등 사건이 참 많다. 이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추궁이 들어오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에게 건강을 주었더니 어디에 돌아다니며 누굴 위해서 그 몸을 썼느냐? 왜 악의 병기로 쓰면서 하나님 앞에 얻어맞을 짓을 하느냐?’ 하는 것도 있는 거다. 그럴 때 혹 ‘나는 죄를 안 지었는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행동 죄만이 아니라 너의 소원 목적이 세상으로 들어가 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제일 먼저 뭘 따먹었느냐?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뭘 안 먹었다는 것이냐? 생명과를 안 먹은 거다. 하나님의 기준을 안 먹은 거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준이다. 그런데 그 성경은 안 먹고 의례히 눈으로 보는 것, 사람들이 판단해서 좋다는 것, 맨 그 위주로 내 기준을 삼고 갔다면 그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이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데 교과서에 나오는 문제의 정답대로 써야 만점이 되는 거지 내 생각대로 쓰면 얻어맞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면 그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왜 생명과를 안 먹었느냐? 생명과는 먹으라고 했는데 생명과를 안 먹은 게 죄다. 인간 아담을 만들어 놓고 코에 하나님의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건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입김으로 기운으로 사는 너다’ 그런 뜻이다. 그런데 네가 무슨 기운으로 살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얻어맞고 책임추궁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가만히 생각을 하면 살아온 그동안에 자기에게 큰 사건이건 작은 사건이건 ‘하나님께서 사건을 갖고 찾아오신 것이로구나’ 하는 게 느껴지느냐? 미미한 것이었지만 ‘날 깨닫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겠느냐?
이방 불신자들이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법이 없이 제 멋대로 사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청지기인 목사님들이 성경창고에서 때를 따라 영의 양식을 나눠줄 줄 모른다면 그런 목사는 예수이름을 이용해서 목사가 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괘씸죄까지 포함해서 그 목사에게 들어간다. 말을 한 번 하고 두 번 해서도 안 들을 때 벌을 주게 되면 그 벌을 주는 사람이 손에 힘이 더 들어가는 매질이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표현적으로 말하자면 아파도 살짝 아픈 게 있고 깊게 들어가는 게 있다.
47절-48절: 이게 앞에서도 말했지만 책임추궁이다. 그런데 ‘청지기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창고에 있는 것만 준다면 이건 옳은 것인데 그건 줄 줄을 모른 채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하는 게 아니라 이방인들처럼 세상 것을 구하도록 하면서 ‘그걸 이뤄야 영광이고 그게 믿음이다’ 하며 성경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꾸 족치면 그 교훈을 듣는 사람은 영인성장 면에서 깨닫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쉽게 말하면 옛날에는 자식을 공부시킬 때 농번기 때는 학교에 안 보낸다. 자식을 공부를 못하게 하려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을 시키면 된다. 그런 것처럼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회는 ‘일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상급 많다. 죽어서 상이 많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영인성장 면은 다 죽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와 같이 목숨을 바쳐서 일을 했지만 예수님은 ‘난 너를 모른다’고 했다. 영인성장 면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성장되고 장성되고 하나님을 향해서 그 속성이 깨달음이 돼 들어가야 되겠는데 그런 면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난 너를 모른다’는 말은 그 사람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정신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다.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있고 들어갈 수 없는 게 있는 거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체로 거르는 것이다.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 닮은 것만 들어간다. 하나님으로 닮은 것이란 신령한 것, 신령한 지식, 신령한 도덕성을 말한다. 이런 것만 들어간다. 못 닮은 것은 부활 때 다 빠진다. 육의 생각, ‘세상에서 부자, 세상에서 행복’ 하는 이건 땅에 속한 것이다. 이런 건 못 들어간다.
원래 세상에는 하나의 지식밖에 없었는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둘로 나눠졌다. 안 믿는 사람은 선악과 먹은 그 지식 그대로이고, 옳은 진리이치로 나가는 교회는 생명과를 먹는 지식이다. 생각도 영의 생각이 있고 육의 생각이 있다. 우리가 영의 생각이라야 신앙 면에서 옳은 것이냐, 육의 생각을 하며 예수 믿는 게 옳은 것이냐? 육의 생각은 선악과를 먹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은 되었는데 자라가는 면에서 육의 지식을 먹게 되면 영의 지식으로 자라지를 못하고 안 믿는 사람처럼 육의 지식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학생이 공부를 잘 하는 친구와 같이 다니면 공부도 되고 하는 건데 학교에 안 다니는 애들과 놀고 오락실이나 가고 하면 학교공부의 실력이 언제 자라느냐? 장래가 문제가 된다. 그런 것과 이치가 똑같다.
예수를 믿는다는 게 교회에서 뭘 배우느냐? 교회에 간다는 게 뭐냐?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말씀 속에서 자기의 갈 길이 고속도로처럼 나와야지 예수 믿으면서도 맨 넓은 길 사망 길로 휩싸이고 하면 이건 예수 믿는 사상 자체가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붙잡은 충성. 진리를 붙잡고, 하나님의 옳음을 붙잡고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그것을 놓지 않고 생명을 내대며 나가는 것이 충성이다. 진리를 붙잡고 나가다 보면 일 충성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기도 하는 거다. 학생의 입장에서의 충성은 학교공부를 잘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집에서 청지기라면 청지기이고 종이라면 종이다. 종이면서 이 종에도 어린 종도 있고 나이 든 종도 있다. 하나님의 집에는 종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예수님이 누구들을 보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을 보고 한 말이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보고 하신 말씀이냐? 제자들을 보고 하신 말씀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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