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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9:1~11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강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따라 오롯이 사는 주님의 백성 가운데에 함께 있기를 빕니다.
우리 역사에는 일제에 부역한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국 해방은 꿈속에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뜻 일본의 생각과 가치에 휩쓸려 그 앞잡이가 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그들로서는 불행하게)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당연히 일제 부역자들에게는 일제에 가담한 정도와 경중에 따라 책임을 물어야 했습니다. 반드시 징계와 반성과 성찰이 있고 난 후에 용서와 화해가 잇달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상식이고 순리입니다. 하지만 그 상식을 따라 흐르지 못한 것이 우리 근대사입니다. 나의 스승인 역사학자 박정신은 그것을 ‘뒤틀린 역사’라고 했습니다. 도리어 일제 부역자들이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여 재건의 전면에 섰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이들이 제복을 벗고 국군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일제 부역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면피하기 위하여, 또는 의심하는 자를 응징하기 위하여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시로 정하였습니다. 죄가 없어도 불온의 가능성만으로 상대를 핍박하였습니다. 일제의 야망을 노래하고, 일왕을 찬양하는 글을 쓰던 이들이 여전히 독립된 세상에서도 건재하였습니다. 민족을 폄훼하고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던 이들이 독립된 조국에서도 여전히 잘못된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민족정신과 독립 의지는 구겨지고 망가졌습니다. 자유는 자취를 감추었고, 정의는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생명과 재산을 바쳐 독립을 위해 일하던 지사들의 명예는 먹칠을 당하고, 그의 후손들의 고통과 인내는 조롱당하였습니다. 그 수치와 굴욕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살다 보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처지가 그 형국입니다. 발을 내딛자니 앞은 청천 벼락이고 뒤는 호랑이가 달려들고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한 지 한해가 넘었습니다. 그동안 블레셋 남방의 경계를 튼튼히 하며 아기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아기스는 사울과의 전쟁에 다윗을 참전시킵니다. 하지만 블레셋의 방백들이 이를 강하게 반대합니다. 그 반대가 너무 심하여 결국 아기스는 다윗을 전쟁에서 배제 시켰고, 다윗은 못 이기는 채 돌아왔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다윗이 명분 없는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얼마 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입니다. 그런 다윗이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인 블레셋을 편들어 제 민족과 싸웠다면 다윗 권력의 정당성은 흔들렸을 것이고 역사는 뒤틀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방백들의 심한 반대가 반가운 대목입니다.가 반가운 대목입니다.
하나님, 불의에 편승하는 일을 막아주시고, 억지로 악에 가담하는 일에서 저희를 건져주십시오.
찬송:393 오 신실하신 주
2022. 6. 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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