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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몽둥이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모내기를 끝냈을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은 몽둥이였다. 잠자고 있었던 조선, 무참히도 짓밟히고 무참히도 빼앗겨서 꿈도 희망도 잃고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도 상실하였던 조선, 가까스로 일본에게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또 다른 지배자 미국에 의하여 우리의 정신이 솟아날 싹이 잘리고 도무지 소망이 없이 말라 죽어가고 있던 이 땅에 한국전쟁은 하나님이 주신 채찍이고 몽둥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해야 했다. 여인들은 몸을 팔고, 남정네들은 목숨도 기꺼이 팔았다. 자존심도 팔고 자식도 팔았다. 무엇이든지 살기 위해서는 다 팔았다. 한국전쟁은 얼빠진 얼간이에게 준 역사의 얼차려였다.
한국전쟁의 결과로 많은 이들이 죽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의견이 분명한 이들이 죽었다. 그리고 독기 어린 지도자들과 멍청이들만 남아서 역사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전쟁으로 말미암은 독기가 남북의 골을 더욱 깊고 깊게 만들었으며 그 원한의 분풀이를 베트남에 가서 풀었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을 정신병에 시달리게 했다. 남북이 서로에 대해서 엄청난 증오를 품었다. 때로는 증오심이 삶의 역동성이 된다. 그 증오심이 국가 목표가 되고 삶의 의미가 된다. 복수하기 위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수 갚고 승리하기 위해서가 목표이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윤리의식을 바꾸었다. 사람은 마땅히 사람답게 살아야 하건만 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낭만적인 용어가 되어 버렸다. 짐승처럼 이라도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해야 했다. “살기 위해서 살인했다.”, “살기 위해서 몸을 팔았다.”, “살기 위해서 인육을 먹었다.”, “살기 위해서 자식을 버렸다.”, “살기 위해서 동료를 배반했다.” 이 “살기 위해서…”라는 처절한 명분에 모든 것이 묵인되고 용서되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였다.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자살행위로 알고 철저히 함구하였다.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에게 “나서지 마라”, “중간에 서라”라는 부모의 경고는 살기 위한 최선의 처세술이었다. 무고한 친척이, 무고한 아비가, 무고한 형제가 죽어가는데도 아무변명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가슴에 묻었다. 평생을 비겁함과 비굴함에 살아야 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위안했다.
전쟁이 끝나고 보니 어느덧 우리 민족의 눈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지혜의 빛이 아니다. 창의력의 빛도 아니었다. 지옥훈련을 받고 휴가 나온 특수부대 병사의 눈빛이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절체절명의 때에 얻게 되는 야수의 눈빛이었다. 더 이상 조선말기의 흐리멍텅한 눈이 아니었고 일제 치하의 체념의 눈도 아니었다.
북조선의 경우는 어떠한가? 남조선을 해방시키고자 일으킨 민족해방전쟁이었지만 명분도 의기심도 첨단 신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폭탄 속에 온 국토가 초토화 되었다. 40만 명 살던 평양에는 약 42만 발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사람 사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도록 파괴되었다. 미국인들은 북조선이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했다.
북조선의 많은 이들이 남으로 내려왔다. 살기 위해서 내려왔다. 친일파들은 북조선의 친일파 숙청에 재산을 빼앗기고 지위도 빼앗기도 목숨도 위태로워서 내려왔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내려왔다. 일반 민초들은 미군의 가공할 폭격과 핵폭탄의 공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려왔다. 고향을 등지고 내려온 그들은 살기 위해서 남한의 사람들보다 더욱 극성스러워야 했다. 더욱 극성스럽게 반공했고 더욱 극성스럽게 친미 했고, 더욱 극성스럽게 종교적이었다.
한국전쟁은 이상한 전쟁이었다. 수도 서울이 두 번이나 함락되었던 전쟁이다. 평양도 한번 점령되었던 전쟁이다. 통상 수도가 함락되면 전쟁의 승패가 갈리지만 이 전쟁은 외세의 개입으로 그것과는 관계없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이상한 전쟁이 된 이유는 내전으로 시작했건만 외세의 개입으로 국제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다. 아니 모두 다 패자인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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