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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와 초월
히브리서 4:1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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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종교는 내재와 초월 가운데 대개 하나만 강조합니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나약한 종교가 되거나 초월성만 강조하여 신을 무서운 심판자의 모습으로 만듭니다. 구원의 의지가 없거나, 있더라도 사람 스스로 구원에 이르라는 냉소적이고 무책임합니다. 그런 종교가 여전히 번성하는 것을 보면 의아합니다. 인간의 내면이 그만큼 허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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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강이 고난 속에서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진리를 붙잡고 역경을 헤쳐가는 주의 제자들에게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내재성과 복음의 초월성은 기독교를 여타 종교와 구분 짓는 가늠자입니다. 복음의 내재성이란 죄로 인하여 죽은 인간이 격는 극한의 아픔과 처절한 절망을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하나님의 끔찍한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다는 하나님의 뜨거운 의지이자 열심입니다. 이것이 인간 구원의 시발점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율법으로도 할 수 없고 종교 생활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내재적 사랑만이 인류 구원의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복음의 내재성이 구체적으로 행동한 것이고 가장 실효적인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여 베들레헴 구유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초월성이란 인간 구원의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아무리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의 의지가 특심하다 하여도 무능한 신이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물에 빠진 자녀를 구해야 하는데 정작 자신은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한다면 그 의지의 뜨거움 못지않게 절망도 큰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셔서 구원의 강한 의지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행할 강한 능력 또한 소유하고 계십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종교는 내재와 초월 가운데 대개 하나만 강조합니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나약한 종교가 되거나 초월성만 강조하여 신을 무서운 심판자의 모습으로 만듭니다. 구원의 의지가 없거나, 있더라도 사람 스스로 구원에 이르라는 냉소적이고 무책임합니다. 그런 종교가 여전히 번성하는 것을 보면 의아합니다. 인간의 내면이 그만큼 허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울러 교회가 본질에 충실하기보다 규모와 외형 등 비본질에 몰두하다 보니 사람들은 기독교와 일반 종교를 같은 통속으로 보는 듯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4:15 a)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복음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이라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죄인이라도 긍정하며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기대합니다. 시편 110:4의 인용구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5:6 새번역)의 표현 역시 복음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뜻합니다. 구원의 진정성과 능력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인류 구원의 진정성과 능력의 복음을 스스로 살아낼 힘을 주십시오. 섬세한 사랑과 당당한 믿음을 살고 싶습니다.
찬송:388 비바람이 칠 때와
https://www.youtube.com/watch?v=Vq5JdkpbXQM
2022. 7. 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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