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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역설
히브리서 11: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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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결국 인간은 더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마치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기갈이 심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삶의 목표를 쾌락에 두게 되면 반사회성과 반도덕성 때문에도 망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결국 자멸에 이르고 맙니다. 이것을 ‘쾌락의 역설’이라고 합니다. 현대의 세속주의는 욕망을 크게 가져야 성공에 이른다고 부추깁니다. 교회도 비전과 꿈을 크게 가지라고 합니다. 결국은 망하라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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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강이 고난 속에서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진리를 붙잡고 역경을 헤쳐가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철학에 에피쿠로스학파가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처럼 민주정의 요람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시대처럼 철학의 온실도 아니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지중해와 오리엔트를 정복하는 시대였습니다. 인류 문명과 정신이 힘에 의하여 왜곡될 조짐이 보일 때 사람들은 두 가지 기로에 섭니다. 하나는 현실 세계와 단절하여 고립공동체를 꾸려 독자적 길을 걷는 것입니다. 에세네파의 쿰란 공동체가 그런 예입니다. 다른 하나는 현실을 인정하되 개인의 행복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경우가 이에 가깝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행복을 추구하는 유파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쾌락주의라고도 부릅니다. 하지만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던 주전 4세기의 키레네학파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에피큐리언들은 단순한 욕망의 충족만을 추구하지 않고 정신적 쾌락, 즉 육체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불안이 없는 상태인 ‘아타락시아’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결국 인간은 더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마치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기갈이 심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삶의 목표를 쾌락에 두게 되면 반사회성과 반도덕성 때문에도 망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결국 자멸에 이르고 맙니다. 이것을 ‘쾌락의 역설’이라고 합니다. 현대의 세속주의는 욕망을 크게 가져야 성공에 이른다고 부추깁니다. 교회도 비전과 꿈을 크게 가지라고 합니다. 결국은 망하라는 소리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11:24~25 새번역)
모세는 행복 대신에 고난을 택하였습니다.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모세의 교훈까지는 아니더라도 욕구를 극대화하기 보다는 소박한 자족을 강조하였던 에피쿠로스에게서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11:27 새번역)
모세는 모욕과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고난을 자처하며 고행의 길을 걷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은 행복의 역설입니다. 성경은 행복의 역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 물질과 감각으로만 측정되는 행복을 거부할 용기를 주시고 행복의 역설을 맛보게 하옵소서.
찬송 : 212 겸손히 주를 섬길 때
https://www.youtube.com/watch?v=oLfHrRJQ1hM
2022. 7. 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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