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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3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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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35절-39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35절-36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예수님께서 왜 다니시는 거냐? 괜히 다니는 게 아니라 ‘뭐 하러, 무슨 뜻으로 다니느냐?’ 하는 게 있는 건데, 다니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이뤄드리려는 거다.
세례요한이 33절에서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라고 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다니시는 것을 보자마자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이뤄드리는 예수님의 정신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길거리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가죽가방을 들고 두 외국인이 서 있으면 뭘로 보이느냐? ‘아, 저 사람들은 몰몬교도로구나’ 하는 냄새가 난다. 그런 것처럼 육의 맛이 아니라 영의 맛이 나는 말씀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33년의 삶은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놓여지는 제물의 삶이라는 뜻이다. 그냥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는 게 아니라 그 삶의 걸음걸이가 제물의 삶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 거다.
제물의 삶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언행심사가 하나님의 지공법에 100% 통과가 되어야 한다. 이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100% 정확하게 지켜야 하는데, 우리들에게 단 하루만이라도 이 삶을 살아보라고 하면 살 수 있겠느냐? 혹 표면적으로 지켰다고 해도 못 지킨 거다. 왜냐? 말씀 속의 은밀한 뜻을 지켜야 지킨 게 되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말씀을 지켰다고 해도 은밀한 뜻을 따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입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그 날로부터 계속 이룰구원의 삶으로 나왔다면 모르긴 해도 구름을 타고 다닐 정도가 될 거다. 하나님께서 최고의 대우를 해 주실 거라는 뜻이다. 번제물로 놓여지는 삶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거다. 예를 들면 자식 하나를 낳고 젊어서 과부가 된 어머니가 이 아이 하나를 훌륭하게 키워보려고 여러 유혹과 미혹을 다 이기며 살아가는 그 정신이 어떻겠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놓인 완전한 제물이다. 인간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가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인간의 죄를 위해 제물이 될 자는 너밖에 없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왜 내가 꼭 해야 합니까?’ 라고 했다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되느냐? 구원 얻을 모든 백성이 구원이 안 되고, ‘지옥이냐, 천국이냐?’ 할 때 전부가 지옥에 가게 된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거룩하게 살다가 죽는 날 하나님 앞에 깨끗이 놓여진 제물이 되면 좋겠는데 이렇게 살지를 않아서 ‘너는 더 이상은 안 되겠구나. 앞으로도 깨끗하게 되기에는 틀렸으니 이제 그만 가자’ 해서 죽는다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다.
37절: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세례요한 증거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 때 세례요한이 두 제자를 향해 예수님께 가지 말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느냐?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백성들이 당신을 잘 맞이할 수 있게 하려고 세례요한을 당신보다 앞서서 보냈고, 그리고 36절에서는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하며 예수님을 증거했다. 이게 세례요한의 역할이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들이 왜 예수님을 좇은 거냐? 예수님이 좋아서 따르는 건지, 아니면 무엇이 궁금해서 따르는 건지? 이 물음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묻는 물음이다. 이들은 계시 등용물로서 우리가 대답할 말을 그들에게 물은 거다. 어쨌든 내가 그 분을 따른다면 늘 그 분과 만나기 마련이고, 늘 그 분의 말씀을 듣기 마련이고, 늘 그 분을 생각하기 마련이고, 이러면 그 분으로 감염이 되기 마련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분을 깨닫고 알게 된다.
오늘날 예수 믿는 나는 누구로부터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소개를 받고 믿는 건지? 진리진실의 참 종의 전도나 가르침을 받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건지, 세상에서 부자 되라고 하는 가르침을 받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건지?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님을 따르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붙잡고 살아라’ 라고 해야 옳은 거다. 교회는 사람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이런 교훈을 받으려고 나가는 거다. 세상적, 종교적, 비진리적, 거짓적인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따른다면 이 사람의 신앙성은 예수님의 의사성과는 다른 목적이 되어버린다.
3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세례요한의 예수님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따랐다. 이게 정확한 거다. 잘 한 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 라고 하셨다. 즉 왜 ‘나를 따르느냐?’ 라고 물으셨다. 여기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를 했는데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건지가 중요하다. 예수님을 이질적으로 증거를 했으면 이질적으로 따르게 된다. 육적으로 증거를 하면 육적으로 따르게 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증거를 하니까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즉시 예수님을 따랐는데, 오늘날 나는 무슨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건지? 어린 양이신 주님의 삶이 좋아서 나도 그렇게 살려고 따르는 거냐, 세상살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따르는 거냐? 사람은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죄 문제 해결이 가장 큰 거다. 자기의 죄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이 안 되면 이건 핵폭탄이 터지는 것보다 더 큰 거다.
오늘날 많은 기독자들은 어떤 예수를 따라가고 있으며, 무엇을 구하며 사는 건지? 세상사람들은 세상의 염려 걱정 근심을 하며 하는데 천국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근심 걱정을 하는지? 하나님의 일을 놓고 염려 걱정 근심을 하면 자기에게 생명이 되고, 이 근심 걱정을 하다가 죽는 법은 없다. 그러나 세상의 염려 걱정 근심은 하면 할수록 살이 점점 빠지고, 눈이 쑥 들어가고, 몸에 병이 나 버린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세례요한의 두 제자에게 ‘무엇을 구하느냐?’ 라고 물으니까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 앞에 계신데도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냐? 이들의 눈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서 존재적 장소적으로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는 거냐? 사실은 질적 사상적인 면으로 묻는 거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의 소원 목적과 정신 사상은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 사상이 천국의 성질이냐, 세상 땅 물질성이냐? 이들은 땅에 사는 자들이요, 땅에 거하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께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는 것은 ‘질적 정신적 신앙 사상적으로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거다. 그러면 당시에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 거냐?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은 천국에서 이 땅에 오셨으니 자나 깨나 우리의 구원에 신경을 쓰고 계시고, 당신의 정신과 사상은 그 질이 천국의 질로서 늘 천국에 머물고 계신다.
계:에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라’ 라고 했는데, 땅에 거한다고 하는 게 장소를 말하는 거냐, 신앙사상을 말하는 거냐? 신앙사상이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걸 말한다. 본 절에 ‘어디 계시오니이까?’ 라고 하는 게 장소적으로 묻는 거라면 당신이 이들 앞에 계시니까 우리가 깨달을 게 없다. 우리는 이걸 이룰구원 면으로 깨달아야 한다.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주님께 ‘어디 계시오니이까?’ 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궁금하면 와 보라’ 라고 하신다. 와 보라? 이건 어느 장소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라는 거다. 즉 이들에게 당신의 마음은 흔쾌히 보여주고 싶으신 거다.
그러면 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고 싶으신 걸까? 물질적 부요함을 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무슨 영적인 깨달음을 주기 위함일까? 육적인 것을 보여주시려는 거냐, 영적인 것을 보여주시려는 거냐?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기에게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여주시면 좋겠느냐?
예수님께서 어느 교인에게 ‘내가 오늘 너희 집에 가겠다’ 라고 하니까 ‘집이 누추해서 안 됩니다. 나중에 어느 다방에서 만납시다’ 라고 한다면 이건 이 교인이 주격이냐, 주님이 주격이냐? 교인이 주격이다. 그러면 이 교인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정신 사상이 영이냐, 육이냐? 육이다. 또는 어떤 교인이 ‘오늘 예수님의 집에 가겠습니다. 그러니 오늘 어디 가지 말고 집에 계세요’ 라고 한다면 누가 주격이냐? 교인이 주격이다.
또는 ‘예수님, 제가 오늘 집에 없으니 모레 낮에 오십시오’ 라고 하니까 예수님 왈, ‘모레 아침에는 내가 전도를 나가야 하는데 전도를 미루고 너부터 만나주지’ 라고 한다면 누가 주격이냐? 이것도 교인이 주격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집에 갈 적마다 너를 못 만났으니 네가 만날 장소를 정하라’ 라고 한다면 누가 주격이냐? 이것도 교인이 주격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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