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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3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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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39절-4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와 보라’ 해서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 가서 함께 있었던 곳이 어디인지 명확히 말을 해 놓지 않았는데 이곳이 어디일까? 바닷가 오막살이냐, 유원지냐, 기도원이냐? ‘와 보라’고 한 곳이 물질적 장소적 개념이냐? 우리는 신앙의 위치, 생각하는 위치, 영적 신령한 신앙의 상태를 봐야 한다.
사람을 볼 때도 ‘이 사람이 영적 신앙 면에서 바닥에 사느냐, 땅에 거하느냐?’ 하는 신앙 질적인 면이 있는데, 이게 그 사람이 거하는 곳이다. ‘저 사람의 신앙이 바닥이냐, 지하냐, 몇 층짜리냐?’ 이런 걸 볼 줄 알아야 사람을 바로 보는 거다. 신앙의 본질이 아닌 ‘물질적으로 잘 산다. 못 산다’ 하는 것을 보다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하게 된다. 이건 넓은 길이다. 예수 믿으면서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머무는 곳이 어디냐? 이 분의 말씀이 와서 당신의 삶의 정신을 보라고 하시는 건데, 이 분을 믿는 나는 지금 삶의 정신이 하나님 앞이냐, 세상 앞이냐, 마귀 앞이냐? 내가 사는 곳이 어디냐?
오늘날 기독교 안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많이 있는데, 구국주의, 사회주의, 구복주의, 신비주의, 초절주의, 극기주의, 극복주의, 은둔주의 현세주의 등등의 신앙이 보혜사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이룰구원과 관계가 있는 거냐? 예수이름을 부르고 성경을 이용할지라도 이렇게 나가는 신앙들이 하나님의 온전을 입는 참 신앙이냐? 우리가 사마리아 여자가 가진 신앙을 알려면 단과 벧엘의 금송아지 정신을 보면 되는데, 마찬가지로 ‘무슨 주의, 무슨 주의’ 하는 신앙들이 다 금송아지 신앙의 속성들이다. 이런 것들은 전부가 천국의 성질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거다.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제 육 시는 정오, 제 구 시는 오후 3시니까 제 십 시는 오후 4시다. 그러니까 오후 4시라면 그 날 하루의 일과가 거의 끝나는 시간이다. 그러면 두 사람이 언제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닌 거냐? 29절부터 보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강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를 했고, 35절에서는 그 이튿날 세례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예수님이 다니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또 다시 증거를 했다.
그리고 37절에서 39절까지를 보면 두 제자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으면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고 물으니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라고 했으니까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같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예수님이 두 제자와 함께 계셨던 장소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곳을 장소적으로 ‘가난한 집이냐, 부잣집이냐, 다리 밑이냐?’ 이런 면으로 보기 보다는 신앙 사상적인 의미에서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거한 영적인 차원을 생각해야 한다. 즉 두 사람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라고 하는 영적 신앙의 세계를 발견하고 이 영적 신앙 사상적 자리에 같이 거한 거다. 믿는 우리는 이렇게 깨달아야 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를 바로 증거 해서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다. 이 메시아를 전하고, 받는 사람도 이 도를 받아들이게 되면 두 사람의 생각이 주님과 같이 있는 거다.
성경에서 어느 지방이나 국경을 말하는 게 많이 있는데, 이건 계시적으로 그 구역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신앙정신의 라인을 말하는 거다. 어떤 사람이 국경 근처에 산다면 ‘아, 이 사람의 신앙이 어디쯤 되는구나. 위험한 곳에 살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된다. 아무렴 적군이 쳐들어오면 국경 근방이 먼저 피해를 본다. 그러니 이런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가운데로 쑥 들어와야 한다. 이것은 질적으로 보는 신앙의 위치와 신앙의 라인을 말하는 거다.
왜 국경 근처에 살고 있느냐? ‘눈이 밝아서 경계지역에 망대를 세우고 적군을 감시하려는 건지, 외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고 경계에서 돌고 있는 건지?’ 이게 있는 것처럼 신앙 면에서도 ‘자기의 신앙사상이 어디 만큼이냐?’ 하는 신앙의 경계가 있는 거다. 이 경계가 모호하면 이 사람의 신앙은 위험하다. 구원 면에서 피해가 막심하다.
나는 우리교인들이 궁극적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구원계대의 가정이 되길 원한다. 이게 주님 앞에 바른 가정이다. ‘예수 믿어 부자 되고’ 하는 건 하나님의 진노에 들어가고, 세상바람에 다 날아간다. 이건 저주의 신앙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는 주님과 같이 거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같이 거할 수 있는 신앙의 질이 있는 것이니 그 신앙정신을 가지면 주님과 같이 있게 된다. 이곳이 주님이 계신 곳이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계신 영적인 세계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자기의 정신 사상과 소원 목적이 세상이라고 하는 땅에 거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리스도와 동행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지금까지 잘못된 신앙으로 예수를 믿어온 것을 깨닫고 신앙 질적인 면에서 바른 것을 찾아가고 있는 건지?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으니 자기의 정신과 사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모르면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면 마음과 정신과 인격이 말씀에 맞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 마음에 따라 역사를 하시게 된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말씀의 적중성의 신앙을 가져서 자기에게 주님의 역사가 임하게 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메시아께서 거하시는 자리도 모르고, 하나님의 온전을 향한 말씀의 이치도 모른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거냐? 이것을 모른 채 주님을 믿는다면 구원을 얻은 의미가 뭐냐? 뭘 보고 구원이라고 하는 거냐? 천국에 들어가는 게 다냐? ‘구원’이라고 할 때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서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장성하는 것도 성경은 구원이라고 한다.
‘이건 벼다’ 라고 할 때 쌀 알갱이는 없이 벼 껍데기만을 벼라고 하느냐? 알갱이를 염두에 두고 벼라고 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구원을 얻었다’ 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껍데기라고 할 수 있고, 천국을 주님과 함께 마음 것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 즉 영모의 미모성,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은 알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알맹이의 구원은 말씀을 따라 성령님과 유기적으로 살아갈 때 입어지는 거다.
40절-42절: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본 후에 형제 베드로에게 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거를 하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으면서 무엇을 발견했느냐? 전도자가 자기에게 처음 전도를 할 때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증거를 했으며, 자기는 그 말을 듣고 예수가 메시아이심이 믿어졌느냐? 이게 참 중요한 거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 된다’ 라고 전도를 하더냐,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자고 전도를 하더냐?
성경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계속해서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모든 기도를 다 들어준다’ 라고 한다면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거냐? 이런 사람에게는 성경이 필요가 없다.
성경은 사람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을 가진 사람은 자기 앞에 누가 있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세상의 학문이 아무리 높은 정신세계를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정신이 누구의 감화 감동을 받고 있는지를 지적해 낸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상대가 어떤 말을 할 때 성령의 눈을 가지고 상대의 정신 사상의 배후에서 누가 역사를 하는지를 안다. 이단자들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이들이 아무리 예수이름을 이용해도 이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오늘날 나는 메시아가 어떤 분이며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드는 이 구원을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전하고 싶으냐? 본문에 보면 안드레는 이 귀한 복음을 먼저 형제 베드로에게 전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안드레가 시몬을 데리고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라고 했다. ‘게바’란 ‘반석’이라는 뜻이다. ‘시몬’이란 ‘들음’이라는 뜻이다,
안드레가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가 아니라 적중적인 신앙을 가지고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했다. 무슨 말이냐? 사람을 주님께 인도를 해도 진리에게가 아닌 세상 인본주의나 무당정신으로 믿게 하는 곳으로 인도하는 자가 많다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되 천국복음에 적중이 되는 하나님의 본질로 인도를 한다면 이 사람은 천국의 전권대사라고 할 수 있다.
뒤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너는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라고 한 것을 보면 베드로는 안드레의 바른 인도로 영능의 실력자가 되어서 주님의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가 된 거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본질로 적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건지, 적중으로 들어간 신앙노선에서 성경을 깨달은 건지가 아주 중요한 거다.
43절-45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림을 만나서 그냥 두고 지나칠 수가 없다. 주님의 이 심정을 생각해 봐라. 왜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적중적으로 인도할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나에게는 예수님께서 지나쳐 가시다가 ‘내가 너를 만나보고 가야겠구나’ 이러실 런지, 아니면 ‘에이, 그냥 두고 가자’ 라고 하실 런지? 빌립은 ‘나를 좇으라’ 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뜸을 들이지 않고 즉시 따랐는데, 지금의 나는 진리가 와서 ‘높은 데로 올라가자’ 라고 하면 뜸을 들일 거냐, 즉시 따를 거냐?
도마는 의심이 많고, 빌립은 나중에 보면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라고 했으니 계산이 아주 빠른 사람이다. 이런 빌립이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실 때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살이가 어떻게 될까? 안 따라가면 안 될까?’ 이런 계산을 하면서 따랐을까? 빌립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기의 계산이 맞기 때문에 따른 거냐, 예수님의 계산이 맞으니 따라간 거냐?
‘즉시 따랐다’고 하는 여기에 자기의 계산이 들어 있느냐? 인간 나를 만드신 분이 나를 부르실 때는 어떤 목적을 품고 찾아 오셨겠느냐? 한 마디로 영원히 최고의 존귀 영광자 능력자로 만들어 주시려는 게 들어 있다. 창조의 주님께서 빌립의 장래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과, 빌립이 자신의 장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비교한다면 누구의 생각이 빌립에게 더 가치가 있고, 더 좋고, 더 영광이겠느냐? (계속)
1장 39절-4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와 보라’ 해서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 가서 함께 있었던 곳이 어디인지 명확히 말을 해 놓지 않았는데 이곳이 어디일까? 바닷가 오막살이냐, 유원지냐, 기도원이냐? ‘와 보라’고 한 곳이 물질적 장소적 개념이냐? 우리는 신앙의 위치, 생각하는 위치, 영적 신령한 신앙의 상태를 봐야 한다.
사람을 볼 때도 ‘이 사람이 영적 신앙 면에서 바닥에 사느냐, 땅에 거하느냐?’ 하는 신앙 질적인 면이 있는데, 이게 그 사람이 거하는 곳이다. ‘저 사람의 신앙이 바닥이냐, 지하냐, 몇 층짜리냐?’ 이런 걸 볼 줄 알아야 사람을 바로 보는 거다. 신앙의 본질이 아닌 ‘물질적으로 잘 산다. 못 산다’ 하는 것을 보다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하게 된다. 이건 넓은 길이다. 예수 믿으면서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머무는 곳이 어디냐? 이 분의 말씀이 와서 당신의 삶의 정신을 보라고 하시는 건데, 이 분을 믿는 나는 지금 삶의 정신이 하나님 앞이냐, 세상 앞이냐, 마귀 앞이냐? 내가 사는 곳이 어디냐?
오늘날 기독교 안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많이 있는데, 구국주의, 사회주의, 구복주의, 신비주의, 초절주의, 극기주의, 극복주의, 은둔주의 현세주의 등등의 신앙이 보혜사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이룰구원과 관계가 있는 거냐? 예수이름을 부르고 성경을 이용할지라도 이렇게 나가는 신앙들이 하나님의 온전을 입는 참 신앙이냐? 우리가 사마리아 여자가 가진 신앙을 알려면 단과 벧엘의 금송아지 정신을 보면 되는데, 마찬가지로 ‘무슨 주의, 무슨 주의’ 하는 신앙들이 다 금송아지 신앙의 속성들이다. 이런 것들은 전부가 천국의 성질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거다.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제 육 시는 정오, 제 구 시는 오후 3시니까 제 십 시는 오후 4시다. 그러니까 오후 4시라면 그 날 하루의 일과가 거의 끝나는 시간이다. 그러면 두 사람이 언제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닌 거냐? 29절부터 보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강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를 했고, 35절에서는 그 이튿날 세례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예수님이 다니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또 다시 증거를 했다.
그리고 37절에서 39절까지를 보면 두 제자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으면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고 물으니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라고 했으니까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같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예수님이 두 제자와 함께 계셨던 장소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곳을 장소적으로 ‘가난한 집이냐, 부잣집이냐, 다리 밑이냐?’ 이런 면으로 보기 보다는 신앙 사상적인 의미에서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거한 영적인 차원을 생각해야 한다. 즉 두 사람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라고 하는 영적 신앙의 세계를 발견하고 이 영적 신앙 사상적 자리에 같이 거한 거다. 믿는 우리는 이렇게 깨달아야 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를 바로 증거 해서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다. 이 메시아를 전하고, 받는 사람도 이 도를 받아들이게 되면 두 사람의 생각이 주님과 같이 있는 거다.
성경에서 어느 지방이나 국경을 말하는 게 많이 있는데, 이건 계시적으로 그 구역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신앙정신의 라인을 말하는 거다. 어떤 사람이 국경 근처에 산다면 ‘아, 이 사람의 신앙이 어디쯤 되는구나. 위험한 곳에 살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된다. 아무렴 적군이 쳐들어오면 국경 근방이 먼저 피해를 본다. 그러니 이런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가운데로 쑥 들어와야 한다. 이것은 질적으로 보는 신앙의 위치와 신앙의 라인을 말하는 거다.
왜 국경 근처에 살고 있느냐? ‘눈이 밝아서 경계지역에 망대를 세우고 적군을 감시하려는 건지, 외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고 경계에서 돌고 있는 건지?’ 이게 있는 것처럼 신앙 면에서도 ‘자기의 신앙사상이 어디 만큼이냐?’ 하는 신앙의 경계가 있는 거다. 이 경계가 모호하면 이 사람의 신앙은 위험하다. 구원 면에서 피해가 막심하다.
나는 우리교인들이 궁극적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구원계대의 가정이 되길 원한다. 이게 주님 앞에 바른 가정이다. ‘예수 믿어 부자 되고’ 하는 건 하나님의 진노에 들어가고, 세상바람에 다 날아간다. 이건 저주의 신앙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는 주님과 같이 거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같이 거할 수 있는 신앙의 질이 있는 것이니 그 신앙정신을 가지면 주님과 같이 있게 된다. 이곳이 주님이 계신 곳이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계신 영적인 세계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자기의 정신 사상과 소원 목적이 세상이라고 하는 땅에 거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리스도와 동행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지금까지 잘못된 신앙으로 예수를 믿어온 것을 깨닫고 신앙 질적인 면에서 바른 것을 찾아가고 있는 건지?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으니 자기의 정신과 사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모르면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면 마음과 정신과 인격이 말씀에 맞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 마음에 따라 역사를 하시게 된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말씀의 적중성의 신앙을 가져서 자기에게 주님의 역사가 임하게 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메시아께서 거하시는 자리도 모르고, 하나님의 온전을 향한 말씀의 이치도 모른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거냐? 이것을 모른 채 주님을 믿는다면 구원을 얻은 의미가 뭐냐? 뭘 보고 구원이라고 하는 거냐? 천국에 들어가는 게 다냐? ‘구원’이라고 할 때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서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장성하는 것도 성경은 구원이라고 한다.
‘이건 벼다’ 라고 할 때 쌀 알갱이는 없이 벼 껍데기만을 벼라고 하느냐? 알갱이를 염두에 두고 벼라고 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구원을 얻었다’ 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껍데기라고 할 수 있고, 천국을 주님과 함께 마음 것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 즉 영모의 미모성,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은 알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알맹이의 구원은 말씀을 따라 성령님과 유기적으로 살아갈 때 입어지는 거다.
40절-42절: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본 후에 형제 베드로에게 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거를 하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으면서 무엇을 발견했느냐? 전도자가 자기에게 처음 전도를 할 때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증거를 했으며, 자기는 그 말을 듣고 예수가 메시아이심이 믿어졌느냐? 이게 참 중요한 거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 된다’ 라고 전도를 하더냐,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자고 전도를 하더냐?
성경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계속해서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모든 기도를 다 들어준다’ 라고 한다면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거냐? 이런 사람에게는 성경이 필요가 없다.
성경은 사람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을 가진 사람은 자기 앞에 누가 있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세상의 학문이 아무리 높은 정신세계를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정신이 누구의 감화 감동을 받고 있는지를 지적해 낸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상대가 어떤 말을 할 때 성령의 눈을 가지고 상대의 정신 사상의 배후에서 누가 역사를 하는지를 안다. 이단자들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이들이 아무리 예수이름을 이용해도 이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오늘날 나는 메시아가 어떤 분이며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드는 이 구원을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전하고 싶으냐? 본문에 보면 안드레는 이 귀한 복음을 먼저 형제 베드로에게 전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안드레가 시몬을 데리고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라고 했다. ‘게바’란 ‘반석’이라는 뜻이다. ‘시몬’이란 ‘들음’이라는 뜻이다,
안드레가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가 아니라 적중적인 신앙을 가지고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했다. 무슨 말이냐? 사람을 주님께 인도를 해도 진리에게가 아닌 세상 인본주의나 무당정신으로 믿게 하는 곳으로 인도하는 자가 많다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되 천국복음에 적중이 되는 하나님의 본질로 인도를 한다면 이 사람은 천국의 전권대사라고 할 수 있다.
뒤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너는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라고 한 것을 보면 베드로는 안드레의 바른 인도로 영능의 실력자가 되어서 주님의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가 된 거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본질로 적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건지, 적중으로 들어간 신앙노선에서 성경을 깨달은 건지가 아주 중요한 거다.
43절-45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림을 만나서 그냥 두고 지나칠 수가 없다. 주님의 이 심정을 생각해 봐라. 왜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적중적으로 인도할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나에게는 예수님께서 지나쳐 가시다가 ‘내가 너를 만나보고 가야겠구나’ 이러실 런지, 아니면 ‘에이, 그냥 두고 가자’ 라고 하실 런지? 빌립은 ‘나를 좇으라’ 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뜸을 들이지 않고 즉시 따랐는데, 지금의 나는 진리가 와서 ‘높은 데로 올라가자’ 라고 하면 뜸을 들일 거냐, 즉시 따를 거냐?
도마는 의심이 많고, 빌립은 나중에 보면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라고 했으니 계산이 아주 빠른 사람이다. 이런 빌립이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실 때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살이가 어떻게 될까? 안 따라가면 안 될까?’ 이런 계산을 하면서 따랐을까? 빌립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기의 계산이 맞기 때문에 따른 거냐, 예수님의 계산이 맞으니 따라간 거냐?
‘즉시 따랐다’고 하는 여기에 자기의 계산이 들어 있느냐? 인간 나를 만드신 분이 나를 부르실 때는 어떤 목적을 품고 찾아 오셨겠느냐? 한 마디로 영원히 최고의 존귀 영광자 능력자로 만들어 주시려는 게 들어 있다. 창조의 주님께서 빌립의 장래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과, 빌립이 자신의 장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비교한다면 누구의 생각이 빌립에게 더 가치가 있고, 더 좋고, 더 영광이겠느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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