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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5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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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53절-57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53절: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서로가 지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식이 다르면 분쟁이 일어난다. 여기에는 소원도 목적도 주장성도 다 다르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나면 상대가 가진 지식의 질이 ‘선악과 따먹은 지식이냐, 생명과 따먹은 지식이냐’ 하는 이걸 먼저 봐야 한다. 왜 그런가 하니 세상 모든 사람들은 생명과 먹은 지식이 아니면 선악과 먹은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 둘밖에 없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선악과 따먹은 지식에서 성경구절을 둘러쓰고 있다. 그걸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안 그러면 분쟁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고 한다.
54절-57절: 겨울이 지나고 남풍이 불면 꽃나무들이 몽우리가 진다. 일기를 봐서 산천초목이 어떻게 되는지를 안다.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철칙으로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알아야 하고, 아는 거다. 방향감각이 어두운 사람은 동서남북을 잘 모른다. 자기가 정 북쪽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른쪽은 무조건 동쪽이다. 이걸 모르면 나침반을 들고 다녀야 한다.
서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면 소가기가 오고 날씨가 궂다. 남쪽에서 남풍이 불어오면 더워진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추워진다. 이건 법칙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이처럼 법칙적으로 정해진 것은 상식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상식을 알면 준비를 해야 하는 것도 상식이다. 상식을 무시하며 살면 자기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외식하는 자여.’ 표면 껍데기만 보고 사는 것이 외식이다. 사람을 표면 껍데기만 보고 논하게 되면 그거는 사람을 외식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을 외식으로 보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식으로 보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신앙양심을 보신다. 외식신앙은 표면, 외모 모양, 눈에 보이는 그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외식적인 눈을 가지고 사람을 본다든지, 교회의 신앙이나 자기 신앙의 기준을 외식신앙으로 즉, 껍데기 표면 위주로 본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속는다. 속게 돼 있다. 이렇게 속는 것은 자기가 뭘 모르는 거냐? 교회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과거적으로 보면 많이 속아왔고 스스로 속고 한 것이 많다.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이 천지의 기상은 창세 이후로 눈으로 보고 배워서 경험적으로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어찌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천기는 일반적인 상식이기 때문에 분변할 줄 알아야 한다. 아침에 안개가 자욱하면 그 날은 해가 뜨면 바람이 분다. 요즘 낮에 기온이 16, 17, 18도가 되면 봄기운을 느끼지만 15도 정도로 내려갔는데도 자기 몸 꼴을 내겠다고 몸을 내놓으면 감기 들기 십상이다. 알고 보면 자기의 상식이 빈약해서 감기가 들어서 병원에 돈을 갖다 주는 경우가 많다.
기상의 분별이 중요하다. 왜 중요하냐?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라고 하셨으니 하늘의 천기를 통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모든 사고방식을 빨리 분별을 해야 한다. 사람을 볼 때도 외모 모양보다 마음분별, 정신분별, 특히 그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교회적으로 목사님들의 설교 속에서 나오는 목사님들의 신앙정신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거짓 목사가 참 많다.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내가 한 설교를 퍼다가 팔아먹는 목사도 있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성경을 모르면 목회를 못하는 거다. 그런데 요즘 목사들을 보면 성경을 몰라도 하는 거다. 어떤 잡된 프로그램이나 악세서리를 순서 속에 잔뜩 집어넣어서 한 시간만 때우면 되는 거다. 설교의 내용 면에서는 일반 사회적 윤리도덕성의 말을 몇 마디 하면 된다. 이건 그 질이 교회가 할 일은 아니다.
과거에는 교회라 하면 좋게 말해서 대표적으로 장감성이 각 교파별로 뚜렷한 성격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저것도 없다. 과거의 장감성이 다 옳은 것도 아니고 하니 거기에서 자꾸 연구를 해서 하나님의 본질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건 없고 교파만 가지고 싸우고 있으니 성경이 어떻게 깨달아지겠느냐? 지금은 완전히 어느 교회가 커지면 무조건 그걸 따라가는 거다. 그러니 장감성이니 해도 독특한 게 없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들은 모세오경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대드는 거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중심을 놓고 지적을 하고 고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때에 예수님은 천국복음의 독특성이 있는 것인데 율법사들은 천국복음의 독특성이라기보다 종교적인 세상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그게 외식신앙이다.
성경의 문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자 속에 들어있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가’ 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는 건데 지금은 외식이고 뭐고 없고 오구잡탱이다. 그러니까 신앙이라고 해도 바탕이 없다. 기본구원에서 이룰구원으로 성장해서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없다. 그러니 성경에서 깨달아진 사상은 없고 성경문자를 자기 기준에서 보고 자기 감정대로 믿는 것이다. 그러니 기준이 없다. 오늘날 교회가 이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감히 목사라고 부르기가 참 어렵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호고, 거룩한 호칭이고 직분으로 되는 건데 이건 아무나 목사다. 그나마 성경을 안다면 ‘목사거니’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자기 장기자랑뿐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말을 하는 우리교회를 ‘백파’라느니 하는데 ‘백파’는 부산의 서부교회 백목사님 계열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을 향해서 자꾸 올라가야지 ‘교회에 사람이 많다’ 하며 안심할 게 아니다. 네가 바로 서야 한다. 사람이 많고 적은 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바로 서야 한다. 바로 못 서면 하나님 앞에 찍히는 거다.
이론을 많이 아는 것도 좋고 학식이 높은 것도 다 좋은데 그게 다가 아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 인격과 성품적으로 바로 만들어졌느냐’ 하는 그 의식을 가지고 이룰구원 면에서 바로 돼 나가면서 이단자들의 여러 주장성이 있기 때문에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모르면 안 된다. 틀리다고만 말하지 말고 상대에게 물어서 모르면 옳고 그른 것을 바로 쪼개줘야 한다.
자기의 신앙은 둘째치고라도 학적 이론적으로도 이단이 뭔지를 모르면서 다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죄 받는 짓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니려면 어영부영 다니는 게 아니다. 자기 속을 어지럽게 만들면 안 된다. 정확하게 질서정연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학식적으로도 그렇고 지식적으로도 그렇고. 그리고 상대로부터 말을 들을 때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자기 속에서 사상을 혼돈시키지 말고 정확한 것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 그런데 상대의 말도 안 듣고 내 쪽에서 무턱대로 일방적으로 나가면 사람을 잃어버린다.
우리교회에서도 다각적인 면으로 사람이 다듬어져 나가야지 자기가 진리를 좀 안다고 떠들면 안 된다. 아느냐? 네가 그만큼 말들어진 대로 다각적인 면으로 남녀노소에 대한 언행이 나가는 거다. 그건 바른 거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안다고 떠들어 놓고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고 오지 못하게 만들면 어떻게 된 거냐? 이건 은연중에 교회에 대적노릇을 하는 거다. 이렇게 되면 자기 스스로 사랑을 못 받고 축소가 된다. 특히 젊은이들은 오래 사신 분들보다도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신앙사상을 뚜렷하게 갖고 있어야 한다.
‘어찌 이 세대를 분변치 못하느냐.’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분별할 수 있도록 창조의 넷째 날에 천체를 만들면서 시대의 징조를 알 수 있도록, 어느 시대든 시대의 징조를 알 수 있도록 천체의 법칙을 만들어 놨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국가의 미래를 보려면 뭘 봐야 하느냐? 아이들이 자라는 상태를 보면 된다. 아이들은 누가 가르치느냐? 선생님들의 책임이다. 또 아이들의 책임은 부모다. 부모들의 삶의 태도에서 그 사회의 흐름이 좌우가 된다. 알고 보면 다 연결이다. 애고 어른이고 다 연결이 돼 있다. 모든 생활로 연결이 돼 있고, 정신적으로 연결이 돼 있고, 다 들어가 있다. 그리고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겠는구나’ 하는 것은 정치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 교회의 장래성은 뭘 봐야 하느냐? 교인이 많으면 장래가 유망한 것이냐? 목사님의 교훈을 봐야 한다. 받는 교훈에 따라서 교인들의 가정에서도 사람 됨됨이가 나타나게 돼 있다.
지엽적인 면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들이나 또는 학계 지도자들을 보면 그 나라의 장래를 알 수 있는 거지만 시대적으로 크게 볼 때는 교회를 봐야 한다. 교회를 볼 때는 목사님의 가르침을 봐야 한다. 교회는 그렇게 들어가 있다.
교회는 신분이 땅 쪽이 아니라 하늘 쪽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소원 목적이 ‘부자로 살고’ 하는 땅에 속한 잡다한 소원성으로 들어있다면 계:에도 말하지만 이건 별이 땅으로 떨어진 것이다. 세상 여러 가지 풍조, 물질풍조 유행풍조 요행풍조 정치풍조 이방풍속 풍조의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 것이다. 신분이 떨어지고, 위치가 떨어지고, 실력적으로 떨어진 거다. 이건 땅에 속한 별이다. 별은 하늘에 있는 거지 땅에 떨어지면 안 된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면 별똥이 돼버린다. 네가 별이냐? 땅에 떨어졌다면 너는 똥이다.
신앙사상은 고차원적인 것이다. 고차원적인 것은 이치가 명확하다. 지식 면에서도, 지혜 면에서도, 선 사랑 거룩 진실의 신적인 도덕성적인 면에서도, 의와 주권적인 면에서도 정확하게 가는 것이다. 옳은 진리이치를 가지고, 옳은 지식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 다스림이 들어가야지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 다스림은 안 된다. 상대가 모른다고 해서 싸우면 안 된다. 알 때까지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넷째 날에 천체를 만들어서 그 안에 징조를 넣어 놨다. 그 징조는 교회를 향한 것이다. ‘하늘이 이렇게 저렇게 되면’ 하는 것은 ‘교회가 이렇게 저렇게 돌아가면 어떻게 된다’ 하는 징조를 넣어 놨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땅의 것만 보면 안 된다. 땅의 것은 자동적으로 보여지는 거다. 움직이는 거, 누가 사고를 당하는 거 이런 것은 다 눈에 보여지는 거다.
자기에게 그런 것이 눈에 보여졌다 할 때(겪을 때)는 이미 그 사람은 늦었다. 눈으로 보여지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의 머리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이 있는 거다. 이게 중요한 거다. 사람의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그걸 보고 미리 차단이면 차단이고, 권고면 권고를 하는데도 말을 해도 안 듣는다면 천상 네가 당해야 되겠구나. 당해도 모르면 어쩔 도리가 없는 거다. 그걸로 한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징조를 알 수 있도록 천체의 법칙을 만들어 놓았으니 세상의 징조를 통해서 시대의 상을 볼 수가 있는 건데, 신앙 사상적으로 이 시대의 상태를 정확히 보려면 영의 눈을 가지고 교회의 흐름을 보면 된다. 교회의 흐름을 볼 줄 안다면 성경의 뜻을 아는 사람이구나.
예수님께서 ‘말세 때 건물 예배당을 보겠느냐’가 아니라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했다. 또 말세 때의 사람들은 노아홍수 때와 같다고도 했다. 노아홍수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해서 돌아가니 네피림 즉, 영웅이 막 나왔다. 그런데 ‘노아홍수 때와 같다’고 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눈으로 보이는 면으로만 알려고 하면 이 말씀의 뜻을 못 알아듣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물질사상과 결합이 되면 그 다음에 영웅적인 세상의 일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예배당을 크게 만들거나 영웅소리를 들을만한 일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또 말세 때는 소돔 고모라 때와 같으리라고도 했다. 그 때의 소돔 고모라는 음란으로 광란의 도시다. 교회가 소돔 고모라라는 것은 신앙정조가 없다는 것이다. 신앙정조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상으로 들어가 있는 건데 말세의 교회가 그게 없다는 것이다. 또 말세에는 거짓 종들이 많이 나온다고 했는데 거짓 종들이 어디에 있느냐? 다 교회 안에 있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신학 나왔네 안 나왔네, 신학교를 졸업 했네 안 했네, 안수를 받았네 안 받았네’ 맨 그런 걸로 따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당신의 온전을 가지고 따진다.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따진다. 그래서 아무리 신학교에서 배우고, 대학원에 갖다 나오고, 학박사를 땄다고 해도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탈이면 이건 심판이요 형벌감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은연중에 세상에서 알아주는 것을 인정해주는 정신이 지배적이다. 그런 식으로 자꾸 뭘 보려고 한다.
교회들이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이 아니라면 이는 혼란한 무리들로서 구름떼처럼 일어나게 된다. 무리들의 형성일 뿐이다. 이렇게 될 때는 진리의 종들을 보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교인들이 천국복음을 버리고 세상의 소원 목적을 따라간다. 그리고 진리생명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그래서 말세에 사는 성도들이라면 무엇보다도 자기 속에 진리이치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불붙듯이 올라오는 건지, 식어지는 건지를 자기가 잘 타진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게 자기 미래의 신앙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빛이 어두워지면 어두움이 깔려오듯이 자기 속에서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는 자기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가까이 오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자기의 몸이 자꾸 아파오면 무엇이 다가오는 징조냐? 죽음이 다가오는 징조다. 그러니까 뭘 준비해야 하겠느냐? 죽음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 몸이 자꾸 아파오면 ‘내 몸에 때가 많은가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빨래 방망이질로 나를 빠는가보다. 그러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평소에 하나님 앞에 잘못되고 비뚤어진 생각이나 하나님 앞에 바로 하지 못한 것을 낱낱이 토해내야 한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할 때 맞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게 지혜롭다. 그게 지혜로운 거다. 건강할 때 회개할 건 회개하고 바로 잡을 건 바로 잡고 해야지 꼭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것은 미련한 거다. 깨닫지 못할 때는 자기 몸에 이상이 오면 느껴야 한다. 자기 몸에 이상 왔는데도 못 느낀다면 ‘이건 곤욕을 치르겠구나’ 이렇게 되는 거다.
‘남풍이 불 때는 심히 더우리라.’ 남풍은 열기다. 이 열기가 사람을 얼마나 찔까? 사람이 찔 때 물을 준비를 안 해 놓으면 헐떡이고 목마르다. 날씨가 더우면 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셔야 한다. 덥다고 해서 옷을 벗고 다니면 타서 죽는다. 이것을 시대적으로 교회의 신앙으로 본다면, 자기의 신앙으로 본다면 성경에 보면 남풍은 덥다고 했는데 사람이 열이 나는 것도 더운 거고,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도 더운 거다. 그러니까 물질의 바람이 불면 살판이 나는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에게 남풍이 부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다. 교인들이 종교적 유행바람을 타면 ‘네가 영적인 면에서 목이 마르구나’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심령의 안식이 없는 것이다. 영적인 면에서 심령의 안식이 없다.
이제 앞에서 말한 두 가지의 기상상태를 사람에게 넣어서 보면 자기 자신에게 진리의 빛이 어두워지면 눈에 소나기처럼 눈물이 나오는 사건이 오게 된다. 또 자기 몸에 열기가 달아오를 때는 사람이 팔딱팔딱 뛰게 된다. 누가 자기 신경을 거스리면 속에서 분이 나서 팔딱팔딱 뛰는 사람이 있다. 소나기가 왔다가 벼락을 쳤다가 더웠다가 정신을 못 차린다 그 말이다. 자기가 그렇게 되어도 깨달음이 없는 무리 속에서 그들과 같이 살고 싶으냐?
미리 준비를 하려면 진리의 깨달음에서 상식이 있어야 한다. 진리이치의 상식이 없으면 형벌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자기가 이때까지 살아오는 중에 일반 사람들처럼 생각을 하며 산다면 이제 말한 이런 성경은 누구를 보고 말을 하는 것이냐? 전:에 ‘창에서 빗물이 떨어지고, 지키는 자가 굽어지고’ 하는 게 누구를 보고 말을 하는 거냐? 다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만물이 움직일 때 그것만 보지 말고 안 보이는 면으로 들어가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 모든 만물의 움직임은 나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하는 역사기이 때문에 그렇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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