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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집어삼키는 목사와 설교자들>
몇 몇 사람들이 칭의에 관한 설교를 하곤 있지만, '우리가 이 칭의의 신앙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한 쪽 면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 신앙이 도대체 무엇인지 또는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생략한 채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복음 마지막 장(눅24:47)에서 분명하게 두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할 것, 그리고 용서할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죄에 대한 용서만 말하고, 회개는 변죽만 울리거나 아니며 아예 언급조차 않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회개 없는 죄의 용서는 없습니다. 또한 회개 없는 용서란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 없이 용서만 설교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에게 죄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상상할 것이고, 이로써 양심의 거리낌 없이 방종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저지른 모든 과오들보다 훨씬 더 큰 과오와 죄가 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12:45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지막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더 악화되는 최악의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 때문에 우린 교회의 담임목사들에게 복음의 한 면이 아닌 전체를 전하고 설교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것을 교훈하고 경책해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신4:2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권주의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첨삭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단지 교권주의자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설교자들 역시 복음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통렬한 ‘회개’를 잘라먹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기를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하느냐’ 같은 하찮은 행위들에나 힘을 쏟아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나 가르침들은 아무 소용없는 짓들입니다. 또한 설교자와 목사들이 현실에 만연한 불의와 군주의 폭정에 눈을 감고 잠잠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참된 자유를 옹호할 기회를 저버리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행동하고 설교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마23:24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집어 삼키는 일”을 스스럼 없이 행하는 자들이 분명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담임목사들에게, 교인들이 부지런히 그리고 자주 자기의 죄를 통렬히 회개하고 슬퍼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도록 권고하고 설교해야 한다고 경고해왔습니다.
회개는 (칭의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일을 경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을 그리도 혹독히 정죄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일상에서 범하는 자잘한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거룩함'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의 범죄를 지적하는 것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강조하고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거짓된 거룩함이 만연한 곳에 더욱 엄하게 회개를 촉구하는 일입니다. 설교자와 목사들이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일이 바로 그대들에게 맡겨진 직무입니다.
- 마르틴 루터, “작센 선제후국의 목사들에게 주는 시찰자의 교육”(Unterricht der Visitatoren an die Pfarrherrn in Kurfürstentum zu Sachsen, 1528)에서 발췌
덧) 루터의 대교리문답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 바로 1524년 8월부터 시작된 개신교 진영 시찰단의 시찰 결과다.(나는 이에 대한 역사를 <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복있는 사람) 해설의 글에서 자세하게 풀어놓았다) 시찰 결과 개신교진영에 만연한 목사들의 무지와 태만함이 상상을 초월하자 루터는 징계를 위한 시찰단을 조직해서 가망 없는 목사들을 쫓아내고, 교구 영지는 몰수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공식적으로 구성된 최초의 시찰단은 1528년 4인으로 구성되었는데, 멜란히톤(비텐베르크 대학 신학자), 한스 폰 플라니츠(작센공국 법률가), 제롬 슈르프(비텐베르크 대학 법학 교수), 아스무스 폰 하우비츠(비텐베르크 시의회 행정가로 추정)가 그 구성원이다. 두 명은 대학 교수, 나머지 두 명은 시의회 행정과 법을 담당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교회를 불시에 방문하였고, 대학교수는 목사의 신학적 역량을 점검하고, 시의회 소속 시찰위원은 교구의 행정과 소유권들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파악해서 징계를 결정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 시찰단은 당시 현장 목회자들에게 암행어사인 동시에 저승사자로 통했다. 물론, 1528년 이전엔 시행착오도 있었고 게으르고 태만한 목사들의 반발도 상상 외로 거셌다. 그러나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이 시찰단을 뚝심있게 밀고 나갔고, 징계는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결국 목사들을 믿지 못하던 교인들이 신뢰를 주기 시작했고, 이로써 개신교 진영의 교회는 서서히 교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위의 글은 1528년 시찰단 규율과 강령에 관한 네 가지 지침서 내용 중 맨 앞 ‘교리’부분의 일부 발췌다.
*최주훈 목사(2017년 3월 3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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