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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디작은 교회에서의 예배
어제는 아주 작은 지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왔다. 5월 29일부로 은퇴하고 주일마다 오금동에 있는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한 사람의 성도로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내가 목회하던 교회가 거여동에 있는데도 집이 있는 오금동의 교회를 찾아가는 이유는 오금동의 교회들은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계속할 예정인데 그 동안 주로 건물 있는 교회를 찾아다니다가 어제는 처음으로 임대 교회를 찾다가 지하교회에 간 것이었다.
그 교회를 들어서는데 여성목회자가 강단에 있었고 70-80대의 할머니 한 분이 막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따라들어가면서 목사님께 "예배드리러 왔어요." 하고 들어가니 목사님이 고개를 끄떡 한다. 아마 외부 사람이 그 교회를 찾는 일이 거의 없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들어가서 앉았는데 땀이 비오듯했다. 에어컨이 없어서 선풍기만 몇 대 돌리고 있었는데 내 쪽으로는 잠깐씩 고개만 빼꼼 하고는 다시 돌아가버린다. 그러는 중에 50대 여성도와 20대 청년이 들어와서 자리에 앉는다.
반주기로 찬양을 하는데 목사님이 수시로 박자를 놓치고, 음정을 두 단계쯤 낮추면 좋을 것 같은데 그대로 해서 높은 음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옛날에 성가대 찬양하듯이 나 혼자 소리높여 찬양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내가 한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찬송가를 두세 곡 부른다. 물론 찬송가 책을 보고 잘 따라불렀지만 다소 신기하게 느껴졌다.
주보가 없었고 찬송가는 작은 영상으로 보면서 불렀지만, 교독문은 각자가 찬송가 뒤에서 찾아야 하는데 중년의 여성도는 그것을 몰라서 헤매었고 목사님이 내려와서 대신 찾아주는 것이었다. 20대 청년은 그래도 좀 아는 것 같았다. 헌금찬양을 부르는데 헌금바구니도 없었고 헌금을 따로 드리게 하지도 않았다. 딋쪽을 보니 감사헌금 봉투 대신 흰 봉투만 있어서 가져다가 헌금을 넣는데 목사님의 헌금기도가 드려지고 있었다. 강단에 헌금봉투를 올렸다.
처음에 들어가서 땀을 비오듯이 흘리는데 문득 드는 생각은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런 교회로 오시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굉장히 서툴고 세련되지 못한 예배였는데 나는 은혜가 되었다. 찬송가를 부를 때에도 가사가 내게 도전이 되는 것이었다. 회개의 내용인데 내가 신앙개혁한다면서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지지 않았나 하는 회개가 나왔고, 목사님이 회개기도를 하먼서 이웃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한 죄를 용서해달라는데 그것이 나의 회개가 되는 것이었다.
설교는 그냥 복음의 핵심인데 설교 자체가 설득럭이 있다거나 세련되거나 감동적인 것이 아닌데 속으로 우리가 너무 기본적인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설교는 세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만 거의 80대 할머니에게 초점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내려오신 생각이 나면서 그것도 은혜가 되었다.
두 달 넘게 다녀본, 규모가 있고 성도들도 수백 명 있는 교회도 있었고 큰 비전을 제시하는 교회들도 있었지만 왜 이 작디작은 교회 예배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았을까? 차츰 마음 속으로 정리가 되겠지만, 가장 첫 이유는 순수성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나도 요즘 교회의 모습이나 성도들의 숫자나 설교자의 설교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예배드리고 있다. 예배의 기본에 걸리는 부분이 있을 때에는 다소 은혜가 떨어질 때도 있지만 대개 은혜를 많이 받는다. 아무튼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걸림돌이 있다면 참된 예배를 드리기 어렵다. 그런데 참 예배를 드리기 위해 넣은 프로그램들이 오히려 은혜를 가로막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도 은혜가 되었다. 중간중간에 할머니가 알아들었는지를 자꾸 확인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설교는 전혀 잘 하는 설교가 아니었음에도 은혜가 되는 까닭이었다. 물론 그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알 수 없고 어떤 영성을 지닌 분인지 전혀 모른다. 단 한 번의 예배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예배의 순수성과 성도를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도록 이끌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은혜를 받았을 뿐이다.
교회개혁, 교회개혁 하지만 개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모든 인본주의, 기복주의, 물신주의, 성공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주 작은 미니교회에서 세 사람이 참석한 전혀 세련되지 못한 예배를 통하여 오히려 개혁의 실마리를 생각한 귀중한 주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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