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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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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장 1절-4절: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1절: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사흘 되던 날에’ 라고 했는데, 언제부터 사흘이 되던 날이냐? 1:29에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했고, 35절에는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라고 했다.
43절에는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라고 했고, 45절에는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라고 했고,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했다.
48절에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라고 했고, 49절에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했고, 51절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라고 한 후로부터 사흘 되던 날이다. 이게 날짜적 개념인데, 어느 신앙의 기점에서 이 말을 하는 건지?
비유와 상징을 말하는 사람들은 ‘1은 하나님, 2는 성령과 악령. 3은 하나님, 4는 세상 고난 수, 5는 마귀 수, 6은 세상 수, 7은 하나님 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 ‘사흘 되던 날’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거라고 하는데, 이게 그 뜻이냐? 숫자로 장난치지 말아라.
‘하루가 천 년 같이, 천 년이 하루 같이’는 뭘 말하는 거냐? 어떤 때 이런 표현을 하느냐? ‘내가 너를 하루를 보고자 천 년을 기다렸다’ 라고 한다면 이건 날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애타게 기다렸다고 하는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거다. 보이는 것 안에 보이지 않는 게 들어 있고, 말 속에 말이 있다. 인인관계에서 상대의 말 속의 말을 깨닫지 못하면 의견충돌이 된다.
‘사흘 되던 날에.’ 날짜적으로 보면, 첫 날에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나타냈고, 둘째 날에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고, 셋째 날에는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니까 ‘사흘 되던 날에’ 라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1절-11절까지를 죽 보면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즉시 따르면 자기가 변화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걸 지금의 우리들에게 적용을 하면 우리도 사흘 되던 날에 변화되는 모습을 봐야 하겠는데, 수십 년을 믿었는데도 그 수준이 첫째 날 그대로 있지는 않은 건지? 신앙의 세계에서는 한 번 추월을 당하면 따라잡기가 힘이 든다. 안 믿는 사람들도 세상적인 면에 추월을 당하지 않으려고 밤잠도 안 자면서 노력을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영적인 면에 무디고 멍청하고 모른 채 사는 건지?
1절-2절: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셨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도 청함을 받았다. 아마도 예수님이 잔치를 연 집과 친한 친척 같다.
일가친척과 이웃들이 잔치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맞느라고 바쁘게 돌아간다. 먹고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배가 부르니 모두가 즐겁다. 세상의 염려 근심 걱정은 잠시나마 물러간다. 이 잔치를 맛 본 자들은 모르긴 해도 ‘오늘만 같아여라’ 라고 할 거다. 그리고 결혼 당사자들은 미래의 좋은 꿈만 꿀 거다. 그런데 그 꿈이 얼마나 오래 갈까? 세상의 꿈을 다 이룬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천국은 실상세계이고, 세상은 현상세계요 가견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아무리 행복하게 살지라도 언젠가는 다 자기를 떠나게 되고, 자기 자신도 떠나게 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잔치에 초청을 받았을 때 무슨 마음으로 갔을까? 일반사람들이 잔치에 초청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서 가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런 마음으로 가셨겠느냐? 그런 마음이 아니다.
3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손님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준비된 포도주가 더 떨어졌다. 세상의 포도주는 떨어지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생수처럼 계속 나는 게 아니다. 잔치 집에서 술이 떨어지면 잔치의 흥이 깨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없어진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말을 한 것은 예수님께 어떻게 하라는 거냐? 능력을 써서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는 거다. 즉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의 기쁨과 행복이 연속되게 해 달라는 거다. 세상 육적 세상살이가 계속해서 기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능력을 써 달라는 거다. 오늘날 예수 믿는 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뭘 바라고 자기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느냐?
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나이까?’ 라고 한다. 예수님의 천국정신으로 보면 그들의 기쁨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그걸 둘러엎어서 깨닫도록 해서 영원히 가는 행복을 주길 원하는 분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은 그런 요구조건을 들어주려고 오신 게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거의가 부자 되고, 병 낫고, 만사형통이 되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 이건 이방인들의 정신이냐, 예수님이 주시려고 하는 걸 원하는 거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거지 나사로는 믿음이 없고 세상 것을 안 구해서 거지가 된 거냐? 오늘날 교인들이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마귀가 예수님께 ‘나에게 절을 하면 세상을 다 주겠다’ 라고 했다. 즉 세상을 돋보면 마귀가 그걸 다 주겠다는 거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상을 구하는 기독교는 마귀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천국복음을 전하는 거냐? 세상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게 기독교냐?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당신의 소원 목적을 제쳐놓고 타락된 세상사람들의 소원 목적을 들어주시겠느냐? 그리고 이 소원 목적을 안 들어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거냐? 어느 게 이단이고, 어느 게 거짓이냐? 참과 거짓은 교훈의 질에서 드러난다. 건물이나 사람의 숫자로 되는 게 아니다.
갈수록 기독교가 황당해질 거다.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참 진리의 옳은 성도는 금싸라기처럼 보기가 힘들어질 거다. 왜냐? ‘마지막 시대에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 라고 했다. 성도의 권세가 뭐냐? 돈이냐? 집이냐?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고통스럽고 한탄스러운 것은 사건이 워낙 혹독해서 그런 거냐, 그 사건을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사람으로 안 된 게 문제냐? 어느 게 옳은 답이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어디에 서 있는 건지? 정신이 어디에 서 있는 건지? 자기가 반석 위에 서 있는 건지, 모래 위에 서 있는 건지를 모르고 있다. 예수 믿으면서 예수님께 세상적인 요구조건을 들이대는 건 마귀 짓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세상의 것을 가지고 시험을 걸었듯이 마귀는 지금도 성도들에게 이 시험을 걸고 있다.
자기의 신앙이 반석 위에 서 있는 건지, 모래 위에 서 있는 건지? 교회는 말씀으로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정신과 사상, 그리고 감화 감동이 뭘로 되어 있는 건지 그 근본을 캐고 가르쳐 주는 곳이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자기가 신앙이라고 하는 그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지? 신앙이라고 하는 그게 이질이지 본질인지? 그리고 자기의 종교적인 경험을 가지고 신앙인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믿는 자기를 모든 만물이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하나님을 피해서 숨을 수가 없다. 믿는 사람이 이질적 세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말씀이 보아지지 않을 거고, 말씀의 이치가 귀에 안 들어갈 거고, 타락된 고집통만 목구멍까지 차 있을 거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고 있느냐? 어제도 괜찮았고, 작년에도 괜찮았고, 십 년 전에도 괜찮았으니 내일 모래도 괜찮은 거냐?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모르면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내일 모레에 뭘 어떻게 하리라’ 라고 하게 된다. 이건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오늘밤이라도 자기 목숨이 어떻게 될 런지? 이런 사람은 말이야 ‘인간의 생로병사를 하나님께서 다 주관하신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하나님께서 다 주관하신다’ 라고 하지만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신앙의 속성은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은 예수의 어머니가 말씀하는 그들의 요구조건,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러 오심이냐, 우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심이냐? 죄에서 구원이다. 그러면 죄가 뭔지 알아야 한다. 죄도 짓는 죄가 있고, 생각하는 죄가 있고, 신앙세계에서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죄가 있다. 이런 모든 죄를 알지 못해서 짓기도 하고, 약해서 짓기도 하고, 고의적으로 짓기도 한다. 이게 모두 죄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먹고 죄와 허물로 죽었으니 그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 아래 놓여지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 아래 놓여 있다. 선악과는 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으라고 하는 명령은 지금도 그대로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생명수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이요 영생이다. 뜻이 같이 들어간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에게 생명과를 먹으라고 명령을 했으니 이걸 우리가 계시적으로 보면 현재적으로 교회라고 하면 처음부터 생명과를 먹으라고 하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교회를 관할하는 인도자는 교인들에게 생명과를 먹여야 한다. 그런데 왜 세상을 먹이느냐? 왜 선악과를 먹이느냐? 왜 세상을 향하도록 마음의 소속을 가지게 하느냐? 그 배후에 누가 있는 거냐?
사람이 사망, 아래 죄 아래 놓이게 되면 하나님과는 끊어지고 물질세상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세상 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고 자기를 살린다고 하면서 세상 것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하게 된다. 이와 같이 물질로서 기쁨과 행복이 연속되기를 원하는 게 죄악세상 사람들의 삶이다. 안 믿는 자는 다 이렇게 살고 있고, 세상에 속한 기독교인은 예수이름으로 이게 이뤄지길 기도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것을 위해 믿고, 세상 것을 의지하게 되면 말씀으로 인격과 성품이 거듭나고 영능의 실력자로 온전케 되는 건 없다. 말씀을 주심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는데 이게 없어져 버린다. 교회에서 영적인 면을 부정하면 글자적으로도 부정이 된다. 글자 속에는 목적이 들어 있는데 이 목적을 부정하니 글자적으로도 부정이 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다른 설교를 더 보시려면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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