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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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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성경에 ‘그날이 옴을 볼수록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도 있고,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이레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으니 우리도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고, 주님이 부활하신 첫날에 제자들이 안식일을 지켰다. 그래서 개혁교회에서는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날마다 모이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주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느 것을 지켜야 옳은 거냐? 사람들은 보고 듣고 손으로 만지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이는 가견적 현상적 물질성적인 것이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볼 때 시간에 속하는 육의 개념으로 해석하기 쉽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있는데, 육의 생각은 시간에 속하는 물질성의 개념이다. 예수 믿으면서 자기의 생각과 정신과 마음이 육의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안식일 문제도 시간적 물질적인 개념으로 날짜를 가지고 싸운다. 그러나 성경 문자대로 보면 주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주님께서는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으니 주일을 지키는 것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이 말씀에 다 허물어진다.
안식일을 주일로 지키건 토요일로 지키건 날짜 변경선을 놓고 생각을 하면,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 주일을 지키고 다음 날 미국에 가면 미국은 이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주일을 또 지키게 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면 한 주에 안식일을 두 번씩 지키게 되니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거다. 그러니 문자적 시간적인 개념으로 지키는 것은 무의미한 거다.
성경을 보면 ‘벗으라, 신으라. 깎아라, 깎지 말아라. 먹어라, 먹지 말아라’는 등의 정반대가 되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볼 거냐? 성경을 문자적 시간적 역사적인 개념으로 보고 예수를 믿으면 성경을 못 깨닫는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이 죽으셨다가 안식 후 첫날에 살아났다. 그러니 주님을 믿는 우리가 어느 주인을 만나야 하느냐? 죽은 주인이냐, 산 주인이냐? 산 주인을 만나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이 살아난 안식 후 첫날이 무슨 날이냐? 주일이다. 그러니 일단은 주일을 지키는 게 맞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더 생각해 보자. 사람들의 이성적인 육의 생각이나 역사적인 개념은 전부가 비유요, 비사요, 이미 없어졌고, 죽어갔고, 또 죽어가는 거다. 그러나 주님은 눈에 안 보여도 성령님으로 오셔서 우리 속에서 우리를 예수정신으로 살게 인도하신다.
어릴 때는 어른들의 명령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자체화 되었기 때문에 그 수준이 명령이 필요가 없다. 그런 것처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한 말씀이나, 주일을 지키라고 한 말씀이나,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 말씀 모두를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려는 말씀으로 알고 그 뜻을 찾아 살아야 한다.
안식일은 거룩한 하나님의 날이다. 안식이란 일반적으로 일을 안 하고 편히 쉬는 거다. 성경에서 안식이란 영의 안식을 말하는 거다. 히:에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했으니 거룩한 날은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받고 영혼의 안식을 얻는 날이다. 이것을 인간의 용어로 말하면 어느 날이건 하나님의 것을 받는 게 안식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날자적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영혼의 안식, 하늘나라의 마음을 갖는 영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주일은 지킬 줄 아는데 주일에 부활하신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못 만난다. 즉 안 죽는 생명의 이치는 못 깨닫고 소원 목적이 세상에서 부자 되고 잘 먹고 잘사는 물질성으로 들어가 있으면 이런 마음에는 안식이 없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있기 때문인데 돈 생각, 물질 생각, 세상을 염려 걱정하며 ‘어떻게 먹고 살까?’ 하고 있으면 이 사람의 마음에 안식이 있을 수 없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안식을 주고 생명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는 거다.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받으면 자기 속에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이 자라난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건, 주일을 지키건, 날마다 모이건 하나님의 생명을 말씀을 받고 자기 속에서 부활성이 살아난다면 이것은 다 안식일을 지키는 거다. 이런 의미에서도 세 가지가 다 하나님의 말씀인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자기 속에 죽지 않는 생명이 자라난다. 이것이 부활의 생명이다.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주기 위해 표면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인데 속사람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없이 날짜만 지킨다면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을 닮는 게 없기 때문에 기본구원을 얻어서 천국에 가기는 하겠지만 이룰구원으로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갈 것은 없게 된다.
성경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소원 목적이나 이성적 지식을 가지고는 못 푼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신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 성경을 깨달으려면 역시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야 한다. 즉 영의 생각이라야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학박사라고 해도 성령의 감화 감동을 입지 않고는 글자는 읽고 문학적으로 평은 할 수 있어도 계시의 뜻은 깨달을 수 없는 거다.
성경을 보면 역사적으로 안 맞는 것도 있고, 빠진 것도 있고, 덧붙인 것도 있다. 그래서 사학자들은 빠진 것을 성경에 추가하거나 역사가 안 맞거나 순서가 틀린 것을 뀌어 맞추기도 한다. 그러면 잘 뀌어 맞추면 이 사람이 계시를 잘 아는 거냐? 아니다. 계시는 따로 있다. 성경을 구절적으로 역사적으로 이리저리 꿰어맞추게 되면 계시적으로는 안 맞는다.
계시의 귀 문이 열리려면 자기의 힘과 뜻과 목숨과 전 인격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러면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지니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자기 마음의 심비에 새겨진다. 이게 성령님의 역사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이 돌판에 새겨졌듯이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면 환난 핍박이 와도 안 지워진다. 그런데 수십 년 예수를 믿었더라도 자기 마음에 말씀이 새겨지지 않아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에 들어간다. 교회에 다니면서 자기 양심이 어디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지를 모른다면, 자기의 마음이 어디로 돌아다니는지를 모른다면 믿는 가치가 없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땅에 오시기 6개월 전에 세례요한을 보냈다. 당신을 맞을 수 있는 길을 닦도록 미리 보낸 거다. 이것은 세례의 정신이 바로 되어야 예수님의 진리통치를 만날 수 있다는 신앙의 원리를 말해주는 거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소원과 목적과 정신이 어떻다는 것을 인격적 정신적으로 미리 말을 해주면 이것을 들은 사람은 주님이 오시면 금방 주님을 알아보고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교회 인도자는 이걸 바로 가르쳐야 하는데 이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면서도 주님을 못 만난다면 어디에서 주님을 만날 거냐? 교회에서 말씀을 못 깨달으면 어디에 가서 깨달을 거냐?
교회 안에 ‘성령을 받았다네’ 하는 사람이 많은데, 진리본질의 말씀을 받아야 이 사람이 정말로 성령을 받은 것인지 분별할 수 있다. 예수 믿는 신앙의 차원이 어떤 거냐? 하나님 다음이 천사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자기의 차원을 알아야 한다. 천사는 하늘나라의 상속이 없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의 위치와 순서를 알고 여기에 맞게 살아야 존귀 영광자가 된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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