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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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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 2학년 때였다.
하루는 1년 선배 누나가 내 손을 잡아끌면서 자기와 어디 같이 좀 가주면 안 되겠냐고 진지한 얼굴로 부탁을 했다.
1년 선배가 하도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끝내 거절을 못하고 끌려간 곳은, 동부이촌동에 있는 큰 교회였다.
선배 누나는 나를 그 교회에서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경배와 찬양' 모임에 데려가고 싶어 했던 것이다.
예배가 시작되자, 선배가 내 귀에 속삭였다.
"요한아, 맨날 데모만 하지 말고 이런 데 와서 은혜도 받으며 살아."
선배 누나는, 허구헌날 시위 현장을 맴돌면서, 가끔씩 경찰서에 잡혀가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불안했는지, 불만스러웠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선배의 그 말에 딱히 불만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선배가 나를 진심으로 염려해준다는 느낌이 있어서였다.
그날 난생 처음 접한 '경배와 찬양' 문화는 충격 자체였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부홍회 방식의 찬양 문화에 익숙한, 더욱이 당시만 해도 교회에서 기타나 신디사이저 같은 것을 혀용하지 않던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던 나로서는, 현대식 복음송가를 열정적으로 부르며, 옆사람 눈치를 안 보고 일어나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는 모습이, 신비롭기도, 신기롭기도,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끝내 한 곡의 찬양도 따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을 '앙 다물고' 눈을 내리깐 채 뚱한 표정으로 앉아서, 남들이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경배와 찬양 모임이 끝나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선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오늘 찬양을 하나도 안 불렀어?"
아마 그 선배는 어렵게 나를 그곳까지 데려갔는데, 내가 자신이 뜻했던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므로, 속이 꽤 불편했을 것이다.
그런 선배에게 내가 싸가지 없게 한 마디 툭 던졌다.
"누나, 지금 세상에서는 88올림픽을 앞두고 도시미관을 정비한다는 미명하에 도시 빈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내쫓겨나고,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지고 있고, 군부독재는 더 미쳐 날뛰고 있고, 우리 학우들은 분신을 서슴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들끼리 저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찬양을 할 수가 있어요? 저게 마약이지 종교입니까?"
나의 싸가지 없는 반문에, 선배는 말문이 닫혀버렸다.
그리고 그 후 두번 다시 내게 어떤 찬양모임이나 기도모임에 가자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비록 싸가지 없게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에 담긴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한, 더 나아가 세상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종교라는 것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
1980년대, 꽃다운 20대 나이에, 내게는 그 질문이 가장 실존적인 물음이었다.
2. 최근 몇 달 간 내가 느끼는 가장 극심한 감정은, 다름 아닌 1980년대에 교회를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과 거의 유사하다.
국격이 주저앉고 있다.
국력이, 마치 골다공증 걸린 사람처럼, 속에서부터 슝슝 빈 구멍이 뚫리고 있다.
국가의 자존심과 기상이 사라졌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고 권력을 쟁취하면 만사형통하다는, 천박한 가치관이 윤리와 도덕을 이기는 세상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마구잡이로 해제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제 분노할 힘조차, 절망할 사치조차, 사라진 듯하다.
바로 대한민국 이야기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이 나라가 이렇게 되고 있다.
누가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분명한 것은, 교회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렇게 아수라장 사촌으로 만들어놓고,
교회는 자기들끼리 여전히 박수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밥 먹고, 사진 찍고, 그리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용암처럼 흘러나온다.
바로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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