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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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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일까>
‘예배’라는 말이 간단한 것 같지만, 그 사정을 알고 보면 무척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 신약성경에서 ‘예배’라는 단어를 모조리 찾아 원문을 대조해 보면, 일대일 번역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제사와 구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가 1세기에 출현했기 때문인데요, 이를 지칭할 마땅한 용어가 없다 보니 1세기 성경 기록자들은 그때그때 다양한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1세기에서 3세기까지 초세기 교회는 서기 313년 로마제국에서 공인받을 때까지 매우 다양한 예배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후로도 기독교 예배는 지역과 문화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통합되고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는 그 교회의 역사와 신학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서방 교회의 예배형식이 다르고, 같은 교회 전통 아래 있어도 예배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시대마다 변화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예배의식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찬이라는 두 개의 축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모든 교회 예배에서 말씀과 성찬은 시대와 환경을 뛰어넘어 예배의 핵심으로 공유됩니다.
우리의 관심은 루터교회의 예배는 도대체 무엇일까입니다.
우선 오해부터 풀어야겠습니다. 루터교회 예배는 루터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루터가 예배 의식문의 골격을 만들기는 했지만, 세계 루터교회에선 그것을 판박이처럼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루터교회는 루터가 발견했던 복음의 정신을 따르는 교회이지, 루터를 숭배하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발견한 복음의 정신을 우리는 종교개혁 정신이라고도 말합니다. 종교개혁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일하신다’라는 칭의론입니다. 이제껏 우리는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하고 하나님에게 올려드리는 삶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루터가 성경에서 발견한 복음은 아무 공로 없고, 힘없고 연약한 이들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즉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일하신다는 은총의 발견, 이것이 루터가 성경에서 발견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예배를 독일어로 ‘Gottesdienst’라고 설명하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이 섬기신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위해? 바로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수행하는 은총의 도구가 바로 ‘말씀과 성찬’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가 예배의 개혁입니다. 루터의 이글을 읽어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1523년 루터가 예배에 관해 쓴 첫 번째 긴 글 <공예배 예식서에 대하여 Von ordenung gottes diensts ynn der gemeine (deutsch)/ formula missae et communionis (lat.)>(1523)에서 발췌해 봅니다.
“예배 안에 세 가지 심각한 오용이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읽기와 노래만이 교회 안에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최악의 오용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 속에 있자 참으로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비기독교적 우화와 거짓말들이 신앙의 전설, 찬송가, 그리고 설교 안으로 밀려들었습니다. 셋째, 예배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얻어 내기 위해 공로를 쌓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믿음은 사라졌습니다. 믿음 대신 사람들은 사제직, 수녀원과 수도원으로 들어가든지 교회(당과 관련 기관)를 짓고 그곳에 기부금을 주는 일을 하도록 무언의 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WA 12, 35: 루터, “공예배 예식서에 대하여” (1523), in: 루터전집 53: 『예식과 찬송』, 나형석 역 (서울: 컨콜디아사, 2017), 11.
여기에 루터교회가 지향하는 예배의 개혁과제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과제는 예배(Gottesdienst)의 신학적 의미를 회복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한 선결과제는 말씀의 집중성이예요. 루터는 선포되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인 성찬을 중심으로 예배를 단순하게 구성하고, 그 정신을 회복시키길 원했습니다.
선포된 말씀과 보이는 말씀
말씀 선포와 성찬은 말씀의 두 가지 형식(선포된 말씀/보이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찬의 예배란 하나님이 죄인을 초대하여 베푸시는 은총의 사건이라는, 칭의적 관점(관계성)을 기억하고 회복시키는 것으로써, 예배의 가장 중요한 개혁과제로 보았습니다. 루터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찬양이나 성경 본문 읽기도 없는 편이 낫고, 차라리 모이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루터전집 53: 예식과 찬송, “공예배 예식서에 대하여” (1523), 12.
이렇듯 루터교회 예배에서 말씀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설교자 개인의 잡설이나 잡담이 아니라 언제나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지향해야 합니다. 말씀과 성찬 모두 동일합니다. 다만, 설교 형식으로 선포되는 말씀은, 말씀과 회중이라는 ‘일대 다수’의 형식(Christus pro nobis)이고, 성찬은 보이는 말씀으로 주님과 ‘일대일’이라는 형식(Christus pro me)으로 전해집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배는 지치고 상한 이들을 불러 쉼을 주고 회복시켜 일상으로 다시 보내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준비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 보다 중요한 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음으로 순종하고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겁니다.
입당송과 촛불점화
다른 교회에서 오신 분들이 루터교회 예배에 와서 촛불점화를 하고 찬송부르며 행진하는 시작 부분을 보고 낯설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순서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모습을 상징하는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며, 그의 제자인 우리가 그분의 뒤를 따른다는 신앙의 고백이 예배의 시작부에 있는 촛불 점화와 행진의 의미입니다.
낯선 것은 그것 말고도 많지요. 예배 도입부에 <죄의 고백과 용서>에서 침묵을 길게 한다든지, 집례자와 회중이 교차로 부르는 ‘찬트’와 ‘영광송’도 그렇고, 성찬을 매주일 하는 것도 낯설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순서를 제가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순서들은 우리 루터교회의 고유 역사와 신학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적 접근
다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어요. 루터교회에는 표준적인 예배 의식서가 있지만, 그것을 모든 지역 교회에서 똑같이 따라서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전례 교회들은 표준 예식서를 언제 어디서건 그대로 해야하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루터교회는 조금 다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가장 고려했던 것은 목회적 관점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배우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쉽게 들리도록 하는 게 그의 목표였습니다. 루터가 자기 목숨을 걸고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한 것도 이런 이유였는데, 예배도 똑같아요.
루터에게 예배는 모두에게 들리는 언어로, 즉 소통의 방식을 따라 회중 모두에게 유익을 주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루터는 열광주의자 같은 과격하고 급진적인 방식의 예배는 거부했다는 점이예요. 왜냐하면, 그런 급격한 변화엔 일반 신도들이 따라오지도 못할 뿐더러 기존에 있던 좋은 예배정신과 의식마저도 쉽게 제거될 위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에게 예배 개혁은 전통과 관습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이미 타락했거나 의미를 상실해 버린 의식을 제거하고, 예배가 가진 본래의 단순성,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시키는 데 있습니다. 루터가 츠비카우의 감독인 니콜라스 하우스만에게 보내는 글을 읽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예식서를 만드는 데 주저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오래되고 익숙한 예식서를 새롭고 낯선 것으로 갑작스레 바꿀 때 어려움을 겪게 될 연약한 믿음의 형제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나 이성을 상실한 부정한 돼지들처럼 달려들어 새것이라는 사실에 기뻐하고, 신선함을 잃으면 즉시 싫증내는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자들 때문입니다.”- 루터전집 53, 21.
예배는 일종의 ‘만남’이예요. 루터가 1544년 최초의 개신교회 건축물인 토르가우 교회 헌당예배에서 설교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말한다.” 예배는 분명히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고 대화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지 않고 예배는 집례자와 회중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이런 만남에서는 반드시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행동이 필요합니다. 모든 예배 의식문의 예문들은 회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설교는 눈높이에 맞아야 하며, 그 모든 예배순서와 내용은 그리스도를 가리켜야 합니다. ‘예배가 소통’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음악
예배에서 음악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루터의 이 말은 아주 유명하지요. "나는 노래도 못하고 음악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을 교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녀석이 목사가 되려고 하거든 초등학교로 돌려보내라"[WA.TR2, 434, Nr.968.] 루터에게 음악은 신학과 함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집니다. 음악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인 조화와 질서가 가장 잘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 때문에 다른 개신교보다 음악에 대한 수용성이 루터파에서 월등히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24년 자신이 직접 지은 24편의 찬송 곡을 수록한 찬송집이 출판되었을 정도로 루터 자신도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어요.
이전만 하더라도 교회에서 음악은 사제들의 몫이었지만 루터의 개혁으로 인해 회중 찬송이 공예배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 덕에 전 세계 교회에선 교파를 막론하고 예배 때 회중이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기도
찬송에 이어 기도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루터의 예배 개혁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 바로 ‘교회의 기도’라는 부분입니다. 봉헌 후에 드리는 ‘교회의 기도’는 한 개인의 잡설이 아니라 회중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타자(이웃)를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루터의 글을 하나 읽어드릴게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기도하는 집이라는 이유는 교회가 기도해야 할 이유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교회의 회중이 한곳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교회에 속한 회중과 교회 밖의 사람들이 생명에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며 그분의 긍휼을 간구해야 합니다.
‘교회의 기도’는 언제나 이웃의 아픔을 내 교회 공동체의 아픔으로 공감하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확신 가운데 기도해야 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가 없다면 차라리 예배 자체를 없애버리는 게 낫습니다. 만일 교인 모두 각자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만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 씀이 없다든지, 다른 이들의 궁핍을 염려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집에 함께 모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소한 이것저것을 구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이기적인 기도 외에 아무것도 없을 때, 그런 기도를 두고 어떻게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선한, 하나님이 받을만하신 ‘교회의 기도’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을 두고 어찌 거룩한 날 모인 회중이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반대하는 모든 일에 대항하여 싸우는 가장 힘센 일은 교회의 기도입니다. 땅 위에 세워진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입니다. 이 일보다 더 큰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성령은 잘 알고 있습니다. ....
우리가 함께 기도한다면, 비록 움막이나 누추한 오두막이라 해도 우리를 대적하는 이들은 기도 없는 대성당보다 훨씬 더 이곳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건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 되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진정한 교회의 기도, 오직 이 기도만이 문제입니다.” -마르틴 루터, “선행에 관하여”(Von den guten Werken, 1520): WA 6, 202-276. 부분발췌
공동예배
예배에 관한 이름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마다 예배를 규정하는 이름이 있어요. 로마가톨릭에선 미사, 성공회에선 감사성찬례, 장로교회에선 그냥 예배나 대예배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루터교회는 “공동예배”(Gemeimde Gottesdienst)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공동’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말씀과 성찬의 자리에 초대받았다는 표현입니다. 어린아이라고 해서 이 예배시간에 따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나이나 성별, 성향 기질 그런 차이는 예배에서 무의미 합니다. 주님은 모든 죄인을 말씀의 식탁이 준비된 예배의 자리로 초대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쉼을 주시고, 위로와 회복을 주시며, 다시 일상의 자리로 돌아갈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루터교회 주일 공동예배의 정신입니다.
파송
예배가 입당송으로 시작된다면, 예배가 끝날 때는 “이제는 평안히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섬기십시오”라는 파송사로 마칩니다. 그런데 파송사는 예배가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라 일상의 예배가 시작된다는 새로운 입당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주일 하루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1-2에서 선언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곧 예배입니다. 루터교회도 역시 그런 일상을 가르칩니다. 이 글을 읽어드리면서 마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중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갇혀 살지 않습니다. 믿음은 분명히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립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은 거기서 내려오게 만들고, 나 자신을 통과해 이웃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하늘이 아니라) 내 이웃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 (Tractatus de liberate christiana, 1520), in: WA 7,69f.
삶이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믿되, 그 믿음이 이웃을 향한 사랑 가운데서 더욱 선명하게 발견되면 좋겠습니다.
*루터교회 총회교육원
20분 분량 동영상 제작 원고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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