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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변모 순간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71 추천 수 0 2022.10.13 13: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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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9:28-36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대구샘터교회 http://dabia.net/xe/1049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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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rGBVGNayDS4 

성경본문 : 누가복음 9:28~36 

예수 변모 순간

 

눅 9:28~36, 예수 변모 주일, 2022년 2월27일

 

변화 산 이야기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눅 9:28~36절에는 아주 독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단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중에 얼굴 모습이 변화되고 옷이 광채가 날 정도로 희어졌습니다. 후광이 그의 몸 전체를 휩싼 모습입니다.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하늘에서 구름 타고 내려왔는지, 밑에서 걸어서 올라왔는지는 본문이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율법 전통과 선지자 전통을 각각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졸다가 깨어나서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겠지요. 베드로가 기발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제안을 합니다. 이곳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세 채의 초막을 짓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고 보도합니다. 그런 순간에 구름이 몰려들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장면은 예수의 세례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눅 3:22절에 따르면 세례 장면에서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리’ 내용과 비슷합니다. 소리가 그치고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예수만 남았습니다. 제자들은 말문이 막혔을 것입니다. 그들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36절이 전합니다. 누가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막 9:9)

 

당시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런 이야기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처럼 들립니다. 동화에는 산신령도 나오고, 도깨비도 나오고, 도술을 부리는 손오공도 나옵니다. 예수의 얼굴이 변화했고, 옷에 광채가 났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는 동화로는 인정할 수 있으나 신문에 보도될 수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예수님보다 1천3백 년 전 사람이었던 모세와 8백 년 전 사람이었던 엘리야가 그 자리에 실제로 나타났다는 말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이 예수 변모 사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다 나옵니다. 그럴 정도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보이는,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해괴하게 보이는 예수 변모 이야기를 이렇게 비중 있게 보도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는 궁금합니다. 제자들이 그 순간에 꿈을 꾼 것일까요? 성경은 꿈은 꿈이라고 말하지 꿈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없는 이야기를 소설을 쓰듯이 창작했다는 것일까요? 성경은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본래 하나의 완결된 전승이 아니라 여러 전승이 겹쳐지는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례 전승과 부활 전승이 들어 있고, 제자들이 졸았다는 사실과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이 본 것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복잡하게 들리지요? 조금 더 저의 설명을 들어보세요.

 

예수의 하나님 경험

 

우선 예수의 하나님 경험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그는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 산은 종교적인 경험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에 자기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고가 나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 이어서 제자들에게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이 순간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던 절박한 순간과 비슷합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예수의 땀이 피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겟세마네까지 따라온 제자들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4) 기도 후에 예수는 산헤드린에서 파송한 무리에게 체포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도 자신의 삶이 파산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절망에 떨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고립무원에 떨어졌던 욥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절규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으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절규하는 예수의 그런 실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부터는 저의 추론입니다. 예수는 기도 중에 구약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떠올렸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서 자신과 함께하는 듯한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모세도 호렙산과 시내 산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고,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 인물입니다. 예수는 나중에 제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을 겁니다. 산에서 기도하는 중에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노라고, 그가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노라고 말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이런 종교 경험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오직 신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도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 인물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유대 민족의 역사적 배경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험했다는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경험했습니다. 안식일보다도 사람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이 모두 예수의 하나님 경험입니다.

 

본문에서 예수가 경험한 모세와 엘리야는 무덤이 없는 인물로 유명합니다. 모세의 죽음을 보도하는 신 34장에 따르면 모세는 모압 어느 골짜기에 장사 되었으나 아무도 그 장소를 모릅니다. 신명기 기자는 모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신 34:10)라고 극찬했습니다. 엘리야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의 인물입니다. 그들의 영적 권위가 막강하여 죽음으로 그들의 운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가 죽음이라는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신앙적 근거였습니다. 그런 경험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산에서 기도하는 중에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노라고, 그들이 자신의 운명에 관해서 말했노라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예수 경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관점으로 이 사건을 봅시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훗날 겟세마네에도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이날도 졸았고, 겟세마네에서도 역시 졸았습니다. 희극적이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비몽사몽 중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느 주석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가 밤이었다고 합니다. 밤안개가 자욱하게 차오르고 있던지 구름이 바람에 실려 지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몽환적인 장면입니다. 기도하는 예수님이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자신들이 산에서 졸다가 본 광경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부활 경험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더는 무덤에 묻혀 있지 않고 자신들 앞에 “살아있는 자”로 나타났다는 이 부활 경험이야말로 제자들이 예수의 공생애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부활의 빛이 아니면 제자들이 전하는 예수의 공생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의 공생애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은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을 게 아니라 오히려 부활의 빛에서부터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 변모 사건도 부활의 빛에서 읽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가리키는 예수 변모를 부활에 대한 예고이자 전조이고, 암시이자 선취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빛에서 볼 때 예수의 변모는 이미 준비되었다고 말입니다. 일명 변화 산에서 벌어진 예수 변모와 십자가에 처형당한 뒤에 일어난 부활 사이에는 시간의 차이가 있어서 다른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법으로는 시간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현재가 미래이고, 미래가 현재입니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며, 내일이 오늘이고 어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여, 그 안의 만물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변모와 예수 부활은 결국 하나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오래된 책장을 정리하다가 저의 다섯 살 때 사진이 눈에 뜨였습니다. 65년 전의 제 모습입니다. 세월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습니다. 그 아이와 저는 무슨 관계일까요? 같을까요, 다를까요? 그동안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수십 번이나 바뀌었을 겁니다. 생각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사진을 본 사람이 우연히 지금의 저를 본다면 같은 사람이라고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은 그 아이와 내가 같다는 사실입니다. 다섯 살 그 아이에게 지금의 내가 감춰져 있었고, 지금의 나에게 그 아이의 미래가 숨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65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은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고, 불확정적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더 먼 미래로 열려 있습니다. 그 미래를 영혼의 깊이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지금 당면한 삶의 조건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겁니다.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를 만남으로써 그런 자유로운 영혼이 되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 자유로운 영혼으로 십자가 운명에 순종하였기에 무덤에 묻혔으나 “살아있는 자”로 제자들에게 현현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교회력으로 예수 변모 주일입니다. 변모 주일은 주현절과 사순절 사이에 자리합니다.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났다는 의미의 절기이고,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동참한다는 의미의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단순히 예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라는 사실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과 희망없이 어떻게 그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부활 신앙 없이 어떻게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행복해야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고, 사랑받은 경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능력이 있어야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질적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부활 신앙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일상의 비루함을 견뎌내고, 일상의 즐거움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예수 부활을 예시하고 암시하고 선취하는 오늘 본문의 예수 변모 사건은 부활 신앙과 똑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제 삶을 강력하게 만드는 거룩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빛으로의 변화

 

지금까지의 설교를 들어도 예수 변모 사건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예수 변모 순간에 대한 29절의 묘사를 다시 들어보십시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얼굴이 변화되었다고 할 뿐이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성형수술과 같은 변화를 말하는 건 분명히 아닐 겁니다.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오늘 ‘첫째 말씀’인 출 34:29절 이하에 따르면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눈이 부셔서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 ”(행 9:3,4) 빛은 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현현을 가리키는 문학적인 메타포였습니다. 고대인에게 빛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용어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빛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의 얼굴이 변하고 옷에 광채가 났다는 말은 곧 예수에게서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영광이, 오늘 본문 눅 9:31절에도 “영광중에 나타나서”라고 표현되었듯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영광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런 거룩한 빛을 경험하십니까? 작은 빛은 일상에서도 경험할 겁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 귀에 안 들리던 음악이 들립니다. 지루하게 생각하던 세계 명작을 온종일 읽을 수 있습니다. 시인들에게는 겨울나무도 빛으로 경험됩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이 작은 공간도 빛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혼의 눈만 열면 세상 만물이 빛으로 경험됩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지금 살았다는 사실, 더 나아가 이미 예수 부활의 영광 가운데 들어갔다는 사실을, 순교 순간의 스데반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빛 경험이 강렬하면 오늘의 삶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가장 거룩한 빛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를 죽음에 머물지 않고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는 죽음도 생명이라는 사실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경험은 물론 쉽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세속의 계산서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는 ‘넘사벽’일지 모릅니다. 간혹 사이비 교주를 따르는 교도들에게는 그런 종교적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들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긴 하나 교주를 자신들의 궁극적인 미래로 받아들이는 태도 자체는 정말 소중합니다. 그럴 때만 자신의 운명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생명을 위축시키고 파괴하는 죄와 죽음을 예수 안에서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부활 경험이자 부활 능력입니다. 부활의 빛에서 그들은 예수의 공생애에 이미 부활을 예시하고 선취하는 변모 사건이 발생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 변모 순간의 희열과 기쁨이 여러분의 일상에서 경험되기를 설교자로서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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