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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사무엘 하 15:24~37
엄혹하고 치열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현실에 적용하며 그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살아내려는 거룩한 의지를 가진 그리스도인 위에 주님의 함께하심을 빕니다.
나는 피난민의 자식입니다. 해방을 맞을 때 어머니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자무스(佳木斯)에 있었습니다. 본래 뚱장청(東京城)에 살았는데 방학을 맞아 이모부 강응무 목사님이 목회하는 자무스에 갔다가 거기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당시 중국인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만주국을 세워 많은 일본인이 들어와 살면서 중국인을 압제하였습니다. 게다가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내선일체(內鮮一體)’ 구호가 중국인에게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하나다’로 읽혀진 것입니다. 일본의 패망은 중국에 살던 조선인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무턱대고 밖에 나갔다가 중국인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강 목사님은 교인들과 의논하여 집단 귀국을 결행하였습니다. 어머니도 그 대열에 끼었습니다. 소학교 3학년 어린이가 집이 있는 뚱창청으로 혼자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었습니다. 피난민, 아니 집단 귀국단은 걸어서 펑천(奉天,지금의 선양)으로 가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룡정중앙교회 문승하(문재린) 목사님 일행을 만났습니다. 두 목사님의 일행을 합하여 다시 걸어서 안뚱(安東, 지금의 단동)으로 와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자 조국의 동포들이 보리밥 도시락을 만들어 와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시락을 그냥 먹을 때는 몰랐는데 그것을 물에 말면 벌레들이 둥둥 떴다고 합니다.
일제에 의해 망국의 길을 걸은 것을 우리 탓, 우리 안의 부패가 그 원인이라고 말하는 정신 나간 정치인과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에 중독된 거짓 지식인들의 말을 나는 믿지 않습니다. 역사의 매듭이 심각하게 꼬여있습니다.
아버지도 피난민이었습니다.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 송화군 풍천입니다. 한국전쟁의 막바지에 이곳은 국군과 인민군이 밀고 밀리는 격전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우체부였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아버지 가족은 치안대에 끌려가 큰 고초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세계를 그리워하였습니다. 그것은 풍천교회의 영향 때문입니다. 1903년에 세워진 풍천읍교회에는 김태석 목사님이 계셨는데 신앙을 존중하는 자유세계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고, 십대였던 아버지는 그 생각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와 신앙을 위해 어린 동생들과 할머니를 모시고 월남하였습니다. 출타 중이었던 할아버지와 막내 동생을 챙기지 못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아버지의 죄책감이 되었습니다.
전쟁을 이웃집 개처럼 생각하는 이들의 철부지 같은 모습이 딱합니다. 증오와 대결을 조장하는 악행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피난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가 어떤 경우에도 훼손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2022. 10. 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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