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무자식이 상팔자
사무엘 하 18:19~33
엄혹하고 치열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현실에 적용하며 그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살아내려는 거룩한 의지를 가진 그리스도인 위에 주님의 함께하심을 빕니다.
요압은 다윗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고대 전쟁에서 반란의 수괴를 죽이는 일을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다윗은 정부군의 장군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 18:5)고 당부한 바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백성이 다 들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아비로서 다윗의 마음을 백성이 이해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압살롬이 반란의 수괴이면서 동시에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현실, 그러나 상대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모순된 구조를 백성도 이해하기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의 원칙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가치와 지향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요압은 다윗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전령을 자처하였으나 요압은 이를 거절하고 구스 사람을 다윗 왕에게 보냈습니다. 이에 아히마아스가 재차 청하여 다윗 왕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는 구스 사람보다 늦게 출발하였으나 먼저 도착하여 다윗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 보고는 다윗 진영의 승리, 반란군의 패전 소식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희소식이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승패보다 아들 압살롬의 안위가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히마아스는 ‘모른다’고 답합니다. 뒤이어 도착한 구스 전령이 사태의 전말을 보고하였습니다.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울부짖었습니다.
왕은 공적인 직분입니다. 아비는 사적인 지위입니다. 공과 사가 충돌할 때 공을 우선하는 것이 공직자가 취할 태도의 원칙입니다. 공직자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공적인 영역을 소홀히 한다면 큰 죄입니다. 지도자로서 실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윗과 압살롬의 권력 쟁투는 공적이라고 하기에는 대의명분이 없습니다. 집안싸움이 나라를 혼란하게 한 격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옳습니다.
다윗은 이런 사태를 겪으면서 심각한 자기 성찰에 이러야 합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고, 농사 중에 자식 농사가 제일 어렵다고는 하지만 다윗은 앞서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 선지자의 자녀 실패 사례를 눈여겨보았어야 합니다. 자녀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사무엘서는 실패의 기록입니다. 엘리도, 사무엘도, 다윗도, 솔로몬도 모두 실패합니다. 권력을 얻으면 무엇합니까? 자녀는 권력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하나님, 자녀는 부모의 면류관이며, 아비는 자식의 영광이어야 하는데 후회와 걱정이 많습니다. 복된 가정을 허락하옵소서.
찬송 : 484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evzJZRjo5Sg
2022. 10. 19 수
댓글 '1'
김봉진 목사
본문은 아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다윗의 초조함과 왕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히마아스의 조급함이 대조됩니다.
- 두 전령(19-23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요압에게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요청하자 요압은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서 구스 사람에게 전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그는 만류하는 요압을 설득하고, 먼저 출발했던 구스 사람을 무리하게 앞지르면서까지 다윗에게 달려갑니다. 공명심에 눈먼 그는 다윗이 직면할 왕으로서의 승리 이면의 아버지로서의 비극을 전혀 보지 못합니다. 내게 만족을 주는 기쁨에 취해 슬픔에 빠진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합시다.
- 죄의 댓가(28-33절)
죄의 결과는 후회와 탄식뿐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전해 듣고 큰 슬픔에 잠겨 “내 아들 압살롬아”를 네 번이나 반복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만, 아들을 대신하여 죽을 수 없습니다. ‘내가 범한 죄’가 ‘내가 당하는 죄’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순간의 만족을 위해 양심과 신앙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맙시다.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