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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궁극이............... 조회 수 81 추천 수 0 2022.10.23 17: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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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3:14-15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모세가 왜 뱀을 들었느냐? 뱀을 쳐다보라고 든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모세에게 광야생활이 고통스럽다고 원망불평을 하자 불뱀들이 많은 백성들을 물어 죽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뱀들이 자기들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했고, 이에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를 하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과,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 죽음 형벌에서 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뱀을 장대에 매달아 놓으면 죽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었다. 그러면 뱀을 매단 것과, 예수님이 매달려서 죽은 게 뭐가 다르냐? 매달려서 죽은 것은 똑같은데 의미하는바 뜻이 다르다. 뱀의 죽음은 심판을 상징하고, 예수님의 죽음은 성도를 구원으로 살리는 거다.

 

누구든지 마귀에게 물리면 죽는데 예수님은 죄를 이기시고, 마귀를 이기시고, 사망을 이기셨다. 그러니까 마귀에게 물린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 주셨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라고 하셨는데, 보는 순종만 하면 사는 거다. 즉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후에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나와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려 죽은 자가 많았는데, 그렇다면 애굽을 탈출하지 않고 애굽에서 평생 종노릇하는 게 나을 런지, 아니면 광야생활이 좀 고생스럽더라도 광야에서, 또한 더 나아가서 가나안에서 자유로 사는 게 나을 런지?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는 자유에 있다. 이 자유를 가지고 세상 나그네 길을 걸어가면서, 즉 애굽을 출발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시내산에서 받은 말씀으로 영능화 실상화 되는 게 옳게 사는 거다. 이 안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이 닮아지는 게 들어 있다. 그래서 영적인 기능과 지능자로, 영능의 실력자로, 하나님의 성품화로 만들어진다.

 

모세는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시내산의 말씀성을 주면서 가나안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나간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나오면 편할 줄 알았는데 고생만 하는구나라고 하면서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이건 반역운동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게 만사 편하게 살면 잘 되어지겠는지, 아니면 환난과 역경과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며 가는 게 실력적으로 잘 되어지겠는지? 후자다.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면서 만들어지는 게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사건과 환경이 있는 거다. 이게 없다면 블레셋 길을 거쳐서 한 달음으로 가나안 땅에 가면 된다.

 

예수 믿고 부자 되어서 잘 살겠다? 이건 애굽의 사상이요 정신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좀 고생이 되더라도 시내산의 말씀성의 사람으로 정확하게 만들어지는 게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광야교회다. 교회 인도자들은 성도들을 이 길을 바로 가게 하기 위해서 거짓 종인지 참 종인지를 구별 분별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거짓 종은, 거짓 성도는 이게 아닌 애굽으로 돌아가자. 즉 부자 되고 병 낫고 잘 먹고 잘 살고이 쪽으로 나간다. 이건 성경의 교훈이 아니라 마귀 짓이다.

 

믿는 우리는 나그네로서 이 세상을 사는 거다. 나그네가 길을 가면서 무엇을 들고, 이고, 지고 가겠느냐? 나그네는 짐이 없어야 편히 갈 수 있고, 실력이 있어야 어떤 상황이 와도 그걸 헤치고 나갈 수 있다. 믿는 사람이 세상의 정신과 사상을 이고, 들고, 지고 나그네 길을 가는 것은 누림성의 신앙이다. 이런 사람은 그런 것에 매이게 되고, 그런 것이 없으면 불안하고, 그게 없으면 남 탓을 하게 된다.

 

세상은 말세가 될수록 참 사람을 보기가 힘이 든다. 참 인도자를 보기가 힘이 든다. 성경이 이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정신이 그만큼 세상물질 쪽으로 치우친다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재세기간의 목적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거다. 믿는 사람이 이게 없다면 믿는 효력도 없는 거고, 충성봉사를 하는 것도 다 사명계로 흘러간다. 이런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의 속과 같다. 예수님의 정신과 소원 목적은 당시의 바리새교인들과 달랐다. 정 반대다. 오늘날 속회된 교인들을 그 당시로 데려다 놓는다면 로마사람들과 잘 통할 거다. 이건 이미 포로가 된 거다.

 

우리가 예수를 그만큼 믿었다면 믿은 만큼 참과 거짓을 구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사람이 어떤 활동을 할 때 그 배후에 어느 영의 감화로 그런 활동을 하는 건지 구별 분별해야 한다. 활동의 감화성을 모르면 성령의 운동인지, 악령의 운동인지를 모른다. :에 각종 말이 나오는데, 나는 지금 붉은 말을 타고 있는 건지, 검은색 말을 타고 있는 건지, 청황색 말을 타고 있는 건지, 백말을 타고 있는 건지를 구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 사람의 진리 따르는 중심을 보신다. 우리도 사람을 볼 때 외모 모양이 아닌 진리 따르는 신앙앙심을 봐야 한다. 이걸 보려면 사람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감화성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진리를 따르지 않는 양심이 많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옳은 것이 오면 마음 속에서 이것을 구부러뜨린다. 이건 성령 훼방 죄다.

 

우리가 몰랐을 때는 보이지도 않는 신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는다. 너나 잘 믿어라이런 말을 했을지라도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까 진리이치를 바르게 깨달아서 선과 악, 의와 불법을 구별 분별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가르지 않고 자기에게 온 옳은 것을 구부러뜨리게 되면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의나 선을 가지지 못하고 세상 쪽에 마음의 추를 놓게 된다. 이건 성령 훼방 죄다. 이러면 참 지식을 버리는 것이라서 사람이 안 만들어진다.

 

내 백성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을 액면적 지식이 아닌 액면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밀한 뜻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이 은밀한 뜻으로, 은밀한 이치로 인격화 사상화 되면 명철한 사람이 되어서 사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하셨으니 우리교회 교인들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왜 원망을 했느냐? 모세가 자기들을 가기 좋은 길이 아닌 길도 아닌 곳이나 가기에 힘이 드는 곳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불뱀들에게 물리게 되었는데, 이 불뱀에게 물리면 몸에 얼마나 불같은 열이 나고 고통스러울까? 모세가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라고 했고, 백성들이 이 놋뱀을 쳐다보면 낫는다고 했다.

 

모세의 말을 듣고 놋뱀을 쳐다보는 게 순종이고, 자기가 사는 거고, 모세의 말을 믿는 건데 그걸 끝까지 쳐다보지 않고 죽은 자들이 있었다. 내가 누구에게 나 좀 쳐다봐라하는데도 계속 안 쳐다보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면 이 사람의 고집이 얼마나 강한 거냐?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해도 끝까지 안 쳐다보는 것은 모세의 말이 안 믿어지기 때문인데,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고 끝까지 교만한 자는 끝까지 쳐다보지 않고 스스로 죽어버렸다.

 

현재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광야교회인데, 교회란 건물이 아닌 예수님의 구속을 입은 사람을 말한다. 건물은 예배당이다. 예배당은 약속한 시간에 모여서 예배를 하는 장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물질적인 개념으로 큰 교회, 작은 교회라고 하고 있다. 이건 사람을 외모로 보는 정신에서 나온 거다.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은 학벌이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나 교단적 지위 등등의 천국에 가지고 들어가지 못할 세상과 세상 것으로 자랑하고 사람을 그 기준으로 따지는 거다. 이런 것을 기준으로 예수님을 본다면 볼 게 뭐가 있느냐? 내세울 게 없다.

 

광야교회인 우리는 진리 신앙노선으로 가는 자들이다. 진리 신앙노선은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본질로 가는 거다. 이건 생명 길이다. 하나님의 의사에 단일로 나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과 질이 같다. 예수 믿으면서 세상을 구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정신 사상을 가진 거고, 물질적인 신앙이요, 신비주의나 무당 식으로 믿는 거다.

 

예수를 믿어도 태에서부터 가지고 나온 성격과 성질이 있는데, 이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다 선악과 먹고 나온 성격과 성질이니 이걸 빨리 바꿔야 한다. 이걸 못 고치고는 진리 자체화로 되지 않고, 평생 예수를 믿어도 죽을 때까지 못 고치면 불뱀에게 물린 것처럼 고통에 들어가는 거다. 이런 사람은 모든 탓을 남에게 하게 된다.

 

천주교의 요리문답에 보면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하는 게 있던데, 남 탓이 아닌 자기 탓으로 돌리는 건 좋은데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실질적으로 그렇게 사느냐가 문제다. 남 탓이 아닌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좋은데 교훈적 정신적 사상 면에서 이치적으로 왜 이렇게 되어 나왔느냐?’ 하는 면을 모른다면 좋은 말을 하는 게 소용이 없다.

 

사람들의 신앙이 어지러울 때, 세상이 정치적으로 어지러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법대로 하는 거다. 그래야 바로 잡힌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귀가 얇아서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는데, 이 말은 말세에는 참 스승을 보기가 힘들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면 사람들이 자기 마음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도 모르면서 이리 저리 휩쓸리게 된다. 교회가 어지러울수록, 시대적으로 거짓이 많이 나올수록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말고 성경으로 들어가라.

 

우리가 신앙의 이치를 바로 알면 믿기가 쉽다. 왜냐? 바로 믿을수록 짐이 가볍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진리이치는 주지 않고 충성봉사를 강조하게 되면 교인들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예수님 안에서는 억지나 강제가 아닌 자원으로 하는 거다. 자기가 좋아서 기뻐서 짐을 메게 되면 마음이 가볍다. 교회에서 명령적으로 움직이면 신앙생활이 힘이 든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는 게 불안하다. 절름발이 신앙이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인자란 예수님을 말한다. ‘인자란 글자 그대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사람의 아들이라는 면으로 보면 예수 믿는 자기도 사람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인자로서 존재적으로는 예수님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으셨으니 이걸 깨달음으로 보면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들춰내면 그 아래에 내가 죽어 있다. 죽어 있는 자기를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으니 예수님의 부활 속에 나도 거기에 들어가는 거다. 신앙 정신 사상 면에서 이렇게 보는 거다.

 

예수님께서 왜 살아나셨느냐? 당신이 죽었으니 살아난 거냐, 나를 위해 당신이 살아날 수밖에 없었던 거냐? 주님은 나를 위해 사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위해 살아나셨고, 나를 위해 죽지 않는 생명을 주시려고 부활하셨다. 우리가 성경을 나와 주님과 일대 일의 관계로 보아야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이 된다. 성경을 남에게 하는 말로 보면 백 날 읽어도 믿는 효력을 못 본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사람들은 놋뱀을 장대에 매단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상징으로 본다. 우리가 여기서 좀 더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매달리신 것과, 놋뱀을 매단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같은 점은 쳐다본 자는 산다는 거고, 다른 점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스스로 매달린 거고, 놋뱀은 모세가 만들어서 장대에 매단 것으로 죄를 상징한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린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자가 아니라 무능력자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은 것으로 끝나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무능자로 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죽은 것 죽을 것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거다. 그래서 이 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는 거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은 천국에 들어갈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드린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죽음이다. 믿는 우리는 사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도 하나님의 공의에 맞게 죽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 공의에 안 맞는 죽음이 참 많다.

 

놋뱀이 장대에 매달리는 것은 죄를 상징하는데, 죄인인 인간은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의미가 이 안에 들어 있다. 또한 인간 너의 고집을 버리고 모세, 즉 진리의 종을 통해서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라는 거다. 불순종하면 고통 중에 죽는다.

 

예수 믿는 사람은 생명 길, 좁은 길로 가야 한다. 좁은 길이란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가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넓은 길은 인간 제 마음대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건 사망 길이요, 이 길로 가면 사는 것은 없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충성봉사를 해도 자기 주관으로 사는 것이니 그 성질은 사망성이다. 여기에는 이룰구원이 없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들어간 것은 반석 위에 놓인 것이라서 전부는 보장이 되고, 보관이 되고, 잃는 게 없다. 이렇게 될수록 사는 거고, 영생이고,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반면에 불순종하면 고통이고 죽음이다.

 

일반사람들은 모든 것이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고 타락된 하나님을 모르는 질이다. 모든 지식도, 이해타산도, 행복도 전부가 세상성이요, 물질 이하요, 심판성이니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고통이다. 마음에 평안함이 없다. 이 사람은 몸에 병이 안 들고 살다가 죽는다고 해도 그 정신 사상은 물질 이하다. 성경은 이걸 밝혀준다.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이란 질적 본질적으로 물질성 이상의 거다. 천국의 거다.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게 주님의 뜻이다. 말씀해석도 이렇게 하는 게 주님의 뜻이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만사형통이 되고라고 하는 건 무당 식이다,

 

진리본질로 예수를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들처럼 아프기도 하고, 사건도 겪고, 고통도 겪는다. 그러나 그 사건을 이겨나가는 지혜가 안 믿는 사람과는 다르다. 속사람이 다르다. 그런데 믿는 사람 중에는 진리본질의 신앙이 아닌 세상 물질 이해타산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다. 하나는 영의 사람이고, 하나는 육의 사람이다. 이것을 구약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출발해서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는데 모세의 인도를 따라 오로지 가나안만을 바라보며 가는 사람이 있고, 애굽생활을 그리워하며 가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거다.

 

자기가 못 깨달으면 못 깨달은 수준으로 살게 된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바에야 꽃나무가 꽃을 아름답게 피우듯이 말씀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가야 한다. 자기의 생애가 얼마나 길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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