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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3:2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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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3장 24절-3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24절-31절: 25절에 보니 좁은 문은 자기 마음대로 열고 닫는 게 아니구나.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회를 열어주실 때 네가 부지런히 하나님 한 분의 의사단일로 자꾸 들어가라는 것이다. 또 어떻게 보면 크고 작은 사건에서 ‘이럴 때 내가 믿음을 써서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들어가야 되겠다’ 해야 하는 거지 세상적인 네 생각을 따라 하는 게 아니다.
27절에 자기 식으로 예수 믿고, 자기 식으로 교회에 다니고, 자기 주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면에 주님께서 같이 한 것으로 착각을 하는구나. 그러니까 자기 식이었다. 자기가 주님이 가시고자 하는 그 길로 의사단일로 갔더라면, 여기에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을 가졌다면 ‘난 너를 알지 못하노라’ 하는 이 말씀을 안 하실 것이다.
일반적으도 모든 교회를 볼 때 자기 식으로 믿으면 여기는 인격적 관계가 안 된다. 또 다른 사람도 자기 식대로 믿으면서 그런 사람들끼리 아무리 많이 모여도 여기는 사람을 알지 못하는 관계성이다. 일반사람들이 한 동네에 사니까 만나면 인사하는 그런 정도이지 주님과 의사단일로 되는 것은 없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관계성을 가지면 ‘내가 너를 안다’ 하지만 그러나 겉모습으로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중심을 봤을 때 주님께서는 ‘난 너를 모른다’로 들어간다. 인격적 관계성을 말씀하시는 거다.
28절: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그러니까 이 분들은 주님과 천국의 사상으로, 의사단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증거이다.
‘오직 너희는.’ 어떤 너희냐?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것을 보니 자기 식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건 자기 식대로는 안 된다. 교회라 할 때는 목사를 항상 최우선으로 놓는다. 가령 교회에 목사가 없어지면 교인들은 다 뿔뿔이 흩어진다. 어쨌든 도둑이 부하를 거느리려면 대장이라도 있어야 통솔이 된다. 원리가 그런 거다.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가지 않는 그들이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의사단일성, 그 애정권 사랑권 밖이다. 관심이 별로 없고 마음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그게 밖이다. 이렇게 되면 처절한 것이다.
한 가족이라도 밖의 사람이 있다. 세상으로 들어가도 세상 사람들 눈 밖에 나는 사람도 있다. 예수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눈 밖에 나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의 마음에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이건 자기 식으로 믿는 사람이다.
옳은 교회는 자기 식으로 믿는 사람은 정감이 안 간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자기 식대로 믿는 교회를 찾아간다? 그렇게 해서 그 교회에 자기와 같은 신앙의 사람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해도 그거는 각자가 별개다. 예수를 따르면 예수님의 한 의사를 따라야 한다. 오늘날 목사님들의 세계에서도 자기 식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29절: 역사적으로 볼 때 전쟁이 일어나서 외국으로 도망가고 잡혀가고 죽고 하는 그게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동서남북이면 전 세계적이다.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날 바빠서 빠질 사람이 있느냐?
잔치란 최고로 기쁨, 만족, 행복 이런 게 총 집합된 거다. 우리는 거기에 빠지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 보면 ‘빠질 사람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는 그 사람들은 잔치자리에 참석을 못하는 느낌이 든다.
30절-31절: 일반 세상적인 눈으로 역사를 보면 나라의 주권자들이 역사의 주권을 가진 주격체처럼 보인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그 나라의 주격체처럼 되어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고, 국민을 어떻게 먹여 살리고’ 서로가 그런다. 그렇다면 ‘그러면 너는 이 쪽 면을 담당하라. 나는 이 쪽 면을 담당하마’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런데 그게 안 된다. 다 내 식대로 해야 된다고 해서 서로 싸우는 거다.
세상에서도 모든 정치고 집안 살림이고 교회고 원리는 같은 건데, 사람도 눈은 눈대로 눈으로 보는 책임이 있고, 코는 코대로의 책임이 있고, 손은 손대로의 책임이 있고, 발은 발대로의 책임이 있는 거다. 다 책임이 있다. 곧 모든 것이 조화롭게 돌아가야 건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구석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전체에서 문제가 생긴다.
세상 권세자들이 세상의 주격자처럼 보인다. 또 기독교 종교적으로 볼 때 제일 큰 단체가 주격체처럼 보인다. 세상은 그렇게 보는 거다. 예수 당시 때도 로마인들이 유대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 밑에 헤롯, 또 그 밑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 대제사장 율법사 서기관들 바리새교인들 단체가 컸다. 이들이 주격체처럼 보인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주격체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32절, 33절에 보니 성경 속에서 흐르는 구원역사를 성령의 눈으로 보면 세상역사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심을 알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천지만물을 다 만들고, 인간을 만들고, 성도를 위한 지엽적인 구원역사가 있는 건데 우리가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걸 믿는 것이 믿음이다.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은 그런 걸 못 보니 믿을 수가 없는 거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그걸 보는 눈이 있어야 하고 볼 줄을 알아야 한다.
해가 지면 어둡고 해가 뜨면 밝아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빛이 그 속에 들어있다고 한다. 첫째 날 만든 빛이 넷째 날의 해를 주장토록 했다. 상징적으로 이게 들어있는 거다. 우리는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만들어 놨느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온전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거다. 그걸 보는 눈이 없으면 참으로 힘들다.
우리가 만물의 창조주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아는 것처럼 세상역사의 주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못박아 두어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핵폭탄’ 어쩌고 해도 세상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그게 믿어지느냐?
지구상의 종말이 하나님의 역사와 간섭 없이 인간들로 인해서 되느냐? 성경은 안 그렇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이방 불신세상 로마인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지 않는 세상에 속한 거짓된 종교인들은,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그 신앙하는 소원 목적성이 세상 것을 이루기 위한 믿음으로 들어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속한 교인이다. 그런 자들이 이단 짓을 하게 된다. 그들은 신앙 사상적으로 인격적 감화 없이 살고 있다. 이방 불신자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모든 기독교 거짓 종교인들도 주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이 살고 있다. 종말론자들도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없이 살기 때문에 날짜만 따져서 그 날에 온다는 것이다.
‘항상 깨어 있어 준비하라’는 것은 주님이 언젠가는 오기는 오는데 오시기 전에 속사람을 주님처럼 닮는 일에 열심히 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언제 와도 그 사람을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쪽으로 마음이 팔리고 정신이 팔리고 그 쪽에 마음이 늘 가서 있으면 이건 깨어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과 어깨동무하며 친구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오실 때 어떻게 되겠느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계속 말씀하신 것을 보면 격차성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이 천국의 격차성과 차등성에 대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할 때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빨리 피하십시오’ 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그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면 그들은 천국의 격차성과 차등성에 대한 말씀을 못 듣는다. 못 들으면 안 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했는데 ‘어떤 말씀 듣느냐’가 문제다. 무턱대로 ‘예수 믿어 부자 됩시다’ 하는 말은 안 들어도 된다. 구원과 상관이 없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금도 사단 마귀의 역사는 거짓된 인도자들로 통하여 그런 일들이 많이 되어지고 있다. 우리교회 안에도 신천지에서 스파이가 올 런지, 어디서 올 런지 모르는 거다. 신앙정신이 깨어있지 못하고 흐리멍텅하면 그들에게 잡혀간다.
지금도 사단 마귀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려는 게 아니라, 그럴 능력도 없는 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핵심이 되는 영능의 실력, 격차성을 여러 가지 수단 방법으로 보지 못하게 꾀이고 있다. 그렇게 하자니 거짓 종들을 자기 졸자로 부려먹는다. 어떻게 부려먹느냐?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열심히 하면 상 받는다’ 하는데 그 열심이 인간 쪽으로 들어가 있다. 세상에서 열매를 따먹으라고 한다. ‘세상에서 칭찬을 받으면 사람들로부터 상을 다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는 ‘네가 사람중심으로 했다’ 하는 뜻이다.
내가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면 거짓 종들이 그런 나를 자기 가까이에 두고 졸병을 만들어서 그 졸병계급으로 내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게 하면 그게 먼저 된 사람으로 착각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된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또 붙인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총리가 됐을 때 총리자리에서 ‘에헴’ 하며 누렸느냐? 총리라는 명칭 호칭은 주어졌어도, 그 일은 할지라도 다니엘의 소원 목적이 총리와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없다. 애굽의 요셉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거짓 종들이 그걸 해석하기를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그 축복을 준다’고 한다. 축복은 눈에 안 보인다. 그런데 물질개념으로 봐서 ‘축복을 주더라’ 한다.
아브라함이 부자였다. 그러면 신앙이 좋으니까 부자가 됐느냐, 부자가 되니 신앙이 좋아졌느냐? 뭘 보면 알 수 있느냐? 모리아에서 산에서 산 아들 이삭을 바친 것은 논밭이고 아브라함의 소망이고 희망이고 다 하나님께 바친 셈이다. 아브라함의 모든 것의 원료뭉치가 이삭이다. 이 이삭을 바친 것은 다른 모든 것도 다 바친 것이다. 이삭을 예수님의 모형계시로 볼 때 이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니 그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상급은 바로 하나님이다. 즉 예수가 주어진 것이다.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놓고 칼로 내려치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다. 칼을 찾고 있을 때가 아니라 칼을 들고 내려찍으려고 할 때 아브라함을 불렀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러니까 두 번이나 부른 것은 하나님이 너무나도 급해서 그런 것이냐? 사람들이 꼭 그렇게 생각을 한다. 다른 뜻은 없을까? 성경으로 보면 천군천사를 부리는 하나님으로서 무엇이든 할 수가 있는 하나님이시니까 천사에게 ‘아브라함이 이삭을 확 찍으려고 할 때 내가 아브라함을 두 번 부를 것인데 그 때 혹 아브라함이 내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을 수도 있으니 그럴 때 힘 센 천사 네가 아브라함을 딱 막아라’ 하고 실수를 할까봐 두 번 부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스운 소리다.
두 번 부른 것이 인간의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을 부른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감격 감동이 되셨으면’ 하는 게 있는 거다. 그 감격 감동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렇게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건가?
그렇다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도 원망과 고통의 신음소리가 아닌 감격적인 느낌으로 볼 수가 없을까? 그게 신앙의 세계요 신앙정신의 움직임이다. 그걸 알아야 한다. 어찌 사람이 말하는 곧이곧대로만 생각을 하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게 원망이냐, 찬송이냐? 찬송이다. 그런데 육을 가진 인간이 자꾸 육적으로 생각을 하려니 그렇게 생각이 안 간다. 하나님의 마음을 저질인 인간이 어떻게 이해를 하겠느냐? 성경은 육적 마음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사단 마귀의 역사는 성도들이 영능의 실력들이 나타나지 못하게 자꾸 방해를 한다. 명칭 호칭상 같은 교회라 할지라도 거짓된 교회는 이룰구원을 이뤄가는, 성화구원을 주목적으로 이뤄가는 교회에 방해 작전을 한다는 걸 알아라. 그게 이단자요, 거짓 교회요, 거짓 종들이다.
말세에 거짓 종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는 것은 격차성과 차등성을, 하나님의 온전으로 서로 이뤄가는 이 면을 흐려놓게 하여 세상 넓은 길로 자꾸 눈길을 놀리게 하고 그 길로 빠져나가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 넓은 길로 가게 하는 게 거짓 종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넓은 길로 가는 교회는 사람이 많다. 세상적인 마음을 그대로 갖고 와서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설교를 듣고, ‘일반적으로 건전하게 살아보자’ 하는 인본주의 교회에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좁은 길, 주님의 의사단일로 가는 교회는 사람이 많지를 않다. 그런데 속 중심에서 되어지는 이건 겉으로는 표시가 잘 안 난다. 그래서 속고도 속는 줄을 모른다. 일반교인보다 목사가 더 그렇다.
32절: 예수님은 헤롯이 보낸 졸병들에게 무엇이라고 일러 보냈느냐? ‘완전하여지리라. 완전히 이루리라.’ ‘여우같은 자.’ 성경을 보면 이 자가 누구냐? 헤롯이다. 31절에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그 여우에게 이르되’ 한다. 예수님이 분봉 왕 헤롯을 여우라고 했다.
왜 여우라고 했을까? 여우는 사람 죽은 시체, 썩어가는 송장을 뜯어먹고 산다. 썩어가는 교인, 썩은 교인을 영의 눈으로 보면 여우같은 사상이 먹어 들어가는구나. 여우같은 자는 간사를 잘 떨고 죽은 정신을 뜯어먹고 산다.
예수를 믿어도 죽은 정신이 있다. 세상 쪽으로는 펄펄 살았는데 예수 쪽으로는 죽었다. 죽은 정신을 먹고 산다. 그러니 당시로 보면 유대 종교인들은 그 정신이 죽은 거다. 그래서 그들을 로마가 다스리는 것이고, 그들은 로마황제를 ‘우리의 왕이니이다’ 했다. 성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 이건 죽은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 사고방식이 살리고 건전해지고 자꾸 소생이 되면 진리말씀에 의해 살아나게 돼 있다. 그러지 않고 세상으로 자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치매에 걸리기 쉽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쪽으로 생각 소원성이 들어있으면 위험하다. 왜냐? 그 사람의 모든 마음이 생각이 움직이는 걸, 달아나는 날아가는 세상을 잡고 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냐? 그러니 자동적으로 병이 들어간다. 마음 병, 정신병이 들어가는 거고, 그 다음에는 몸도 다 망가진다. 원리가 그렇다. 안 믿는 사람은 돈 많고 잘 먹고 하면 사람인줄 알지만 아니다. 사람의 중요성은 인격 즉, 하나님의 숨결에 있다.
‘귀신을 쫓아내며.’ 이방정신의 소원 목적적인 세상의 사상은 물질을 얻기 위해 귀신들에게 절하고 제사하고 그 정신을 따라간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정신을 쫓아낸다. 제사를 하고자 하는, 귀신을 섬기는 그 정신을 쫓아낸다.
제사가 둔갑한 것이 추도식인데, 믿는 사람이 이 추도식 하는 걸 둘러엎으면 안 믿는 사람이 그걸 볼 때는 미쳤다고 하지만, 아니다. 잘 하는 거다. 방편에서 인간 보기에 그런 거지 잘 한 것이다. ‘하지 맙시다’ 하면 듣겠느냐? 확 둘러엎은 거 참 잘 하는 거다. 그 뒤의 책임은 주님이 지고 있다.
주님은 그 정신을 쫓아낸다. 일반 세상정신을, 불에 타는 것을 가지러 가는 정신, 썩는 것을 가지러 가는 정신, 변질될 것을 자꾸 가지러 가는 정신, 그 소원 목적, 그런 정신을 쫓아낸다. 귀신을 섬기는 그 사람은 못 쓴다. 그래서 그런 정신을 쫓아낸다. 쫓아내는 것이 구원운동이고, 예수님 속에 든 것을 자꾸 내가 갖는 게 구원성장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요, 신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고, 그게 참 사람이다.
‘병을 낫게 하다가.’ 육신의 병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병. ‘정신’ 하면 이성이다. 영적인 면에서 비뚤어진 거, 알지 못하는 게 다 병적이다. 영적 정신적으로 앓고 있고, 미달되고, 허점 된 그걸 다 고치고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성숙되게 하는 것. 주님은 그 일을 한다. 그래놓으면 완전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루는 면에서 순종으로 죽음까지도 보여주면서 끝을 마친다. ‘내가 올라가서 죽는다’ 하는 것은 ‘내가 죽으면서도 그 일을 이뤄놓고 간다’는 면도 들어있다.
그러면 오늘날 자기는? 예수 믿는 것도 평소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 세상 판으로 믿다가 숨이 막 끊어지면서 죽을 때 자식들을 앞에 놓고 ‘내가 예수를 믿었어도 아무 효력도 없다. 너희들은 마음대로 믿어라’ 한다면 그게 뭐냐? 죽는 마당에도, 숨이 넘어가는 마당에도 전도하면서 가야 한다. ‘하늘나라에서 만나자’ 그게 전도다. 완전히 순종으로 산 것을 보여주면서 이뤄놓는 것이 참 멋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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