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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
다니엘 1:8~21
비록 세속의 가치와 질서의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다스림과 평화의 나라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동행하심을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애국자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애국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여 사해동포 사상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폐쇄적인 민족주의의 올무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와 이웃 일본의 관계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민족애는 유지하되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밉상스러운 일본의 모습에 이마가 찌푸려지는 것을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구나’는 생각에 이릅니다. 그래서 왜 사람은 세계시민 의식보다 민족의식을 우선하는 것인지, 일본 이해에 앞서 민족감정을 중시하는 감정을 주신 하나님께 묻고 싶습니다. 왜 우리는 민족감정을 넘어 세계시민 감정에 도달하기가 어려운가요?
세속화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자신의 순전함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자기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온 형편의 유다 소년들이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반듯하고 올곧게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입신 영달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거 일제강점기의 조선 사회에서 희망을 찾기 힘든 그 어두운 시절에 일본을 디딤돌 삼아 계몽사회로 발돋움하려던 지식인들의 고뇌를 이해할 법도 합니다. 그 절망의 상황에서도 민족자존과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불사른 이가 없었다면, 그리고 조국 광복이 없었다면 그들의 생각이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다니엘과 세 소년은 바벨론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왕의 식탁에 앉아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며 삼 년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바벨론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장학생으로 선발된 처지이니 사고를 치거나 크게 뒤처지지만 않으면 바벨론 정책의 전파자가 되어 평생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세 소년은 왕의 진미를 거부하였습니다. 소년들의 거부가 무모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소년들은 당차게 감독관에게 제안합니다.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의 얼굴빛과 왕이 내린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의 얼굴빛을 비교하여 보시고, 이 종들의 요청을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단 1:12~13)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무엇을 거부할 수 있을까요? 술과 담배인가요? 동성애인가요? 주사파인가요? 무슬림인가요? 아니면 증오로 얼룩진 우상인가요? 거부할 대상을 오판하면 애먼 그리스도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거부할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저는 하나님 나라 순례자로서 증오를 거부하고 불의와 전쟁을 반대합니다.
찬송 : 384 나의 갈 길 다가도록
https://www.youtube.com/watch?v=L_yrCWsAmdw
2022. 11. 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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