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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소리
다니엘 4:19~37
비록 세속의 가치와 질서의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다스림과 평화의 나라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동행하심을 기원합니다.
10.29 참사가 있고 난 후 정부가 한 주간 동안 국가 애도 기간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고인의 이름도, 영정도 없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와 천주교도 각각 위로의 이름으로 종교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각 종교행사에는 위로받을 자들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는 희생자 유가족과 힘을 다하여 구조하고도 더 구조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구조대원의 자리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 자리가 권력자의 정책 실수를 위로하는 자리였다면 쇼도 이런 쇼가 없습니다. 종교의 권위를 세속 권력 앞에 갖다 바친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는 신을 스스로 욕보인 배교 행사였습니다.
“다니엘이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단4:19). 다니엘은 느브갓네살의 꿈 이야기를 듣고 당황하여 멈칫하였습니다. 꿈의 내용이 느부갓네살이 왕좌를 상실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업적과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왕권의 무너짐을 지적한다는 것은 아무리 예언자라 하여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처지가 딱합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단 4:25). 다니엘은 거짓말을 하거나 피하지 않았습니다. 덧붙여 왕이 가장 우선해야 할 자세도 충고하였습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단 4:27).
권력의 비위를 맞추며 달콤한 말만 하는 것은 종교의 권위를 스스로 추락시키는 배교 행위입니다. 해교(害敎) 행위는 이단이나 사이비에 의해서보다 종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예언자적 기능을 스스로 방기하고 있습니다. 세속 가치와 교회 가치가 다르지 않으니 한통속이고 짬짜미하기 좋습니다. 쓴소리 못하는 예언자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다니엘서의 주제는 ‘하나님 다스림’입니다. 역사를 운행하시며, 민족의 미래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열강이 역사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였다가 퇴장하는 일이 반복되지만,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교만한 권력일수록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고, 자신을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으로 여겨 다른 생각과 가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그랬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응징하셨고 결국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내우외환의 격랑이 거칩니다. 깨달음은 큰 희생을 치루고서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시대에 쓴소리하는 예언자,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지도자가 있기를 빌 뿐입니다.
찬송 : 35 큰 영화로신 주
2022. 11. 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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