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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
다니엘 6:16~28
비록 세속의 가치와 질서의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다스림과 평화의 나라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동행하심을 기원합니다.
지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핍박은 없습니다. 과거 조선말과 일제강점기에 그리스도인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개신교보다도 천주교가 더 많은 희생을 치르고 아픔을 견뎌야 했습니다. 처음 이 땅에 들어온 그리스도교는 종교보다 학문의 모양이 강해 서학(西學)으로 불렸습니다. 조선 말 실학(實學)의 흐름과 맞물려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부패한 지배체제에 문제의식을 가진 양반가와 민중 속으로 퍼졌습니다.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그리스도교식으로 치르고 제사를 폐하자 사회적 파장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조선 양반가에서는 윤지충의 행위를 ‘천지가 생겨난 이래 있을 수 없는 살인죄’와 동일시하여 윤지충과 외사촌 권상연을 체포하였습니다.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배교를 거부하였습니다. 윤지충은 ‘그리스도교를 믿음으로 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며 자기 믿음의 결백과 무죄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제사를 거부하는 행위는 유학의 ‘효’를 부정하는 행위로 나라의 어버이인 왕에 대한 ‘충성’을 부정하는 행위로 취급되었습니다.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조선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정조 임금은 주변에 아끼는 이들 중에 서학 관련된 이들도 있어 이 문제를 관대하게 마무리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윤지충이 남인(南人)이었던 탓에 서인(西人)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고, 남인 안에서도 서학을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와 탄압해야 한다는 공서파(攻西派)로 나뉘게 되어 정조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참수당하였습니다. 이것이 신해박해입니다.
그 후에도 조선의 그리스도인은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이어졌습니다. 기해박해 때에는 현종이 <척사윤음>을 내려 사악한 그리스도교를 배척할 것을 백성에게 고지하였고, 국가는 오가작통법을 시행하여 그리스도인을 적발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아홉 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남종삼을 비롯한 국내 그리스도인 팔천여 명 이상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안 프랑스 극동함대가 세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공격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힌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는다’며 양화나루 옆의 잠두봉(지금의 절두산)에서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을 살해하였는데 잘린 목이 한강에 던져져 산을 이루었습니다. 해미에서도 천여 명의 그리스도인을 생매장하는 참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른다섯 번이나 ‘자유’를 외치며 등장한 정부 아래에서 자유는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자유의 시대에 자유가 갈급합니다. 믿음 때문에 감옥 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압박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그릇된 정치권과 권력화된 교회를 향해 상식적이고 건강한 질문을 하면 교회 안의 보수주의자들은 색을 덧칠하고 위협합니다. 다양성과 인권을 말하면 벌떼처럼 일어나 집단따돌림 합니다. 그래서 참 불편합니다. 물리적 박해는 아니지만, 저들의 광기와 위협에서 공포를 느낍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맹신입니다.
하나님, 핍박은 없지만 자유도 아닙니다. 주님의 평화를 갈구합니다.
찬송 : 413 내 평생에 가는 길 https://www.youtube.com/watch?v=DnhxCK3bZvk
2022. 11. 1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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