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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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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성경에 ‘성령을 받으리니. 성령이 임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성령님의 역사가 사람에게 들어오는 거냐, 예배당 안에서 빙빙 도는 거냐? 사람에게 들어와서 사람이 변화되는 거다. 성령으로 변화되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 말씀을 깨닫고 싶은 마음, 주님의 인격과 성품의 사람으로 되고 싶은 소원성이 있다. 성령님은 ‘술을 먹어야 되겠다. 낚시를 가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누구에게 성령님이 임했다고 할 때는 ‘이 사람이 평소에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여졌구나’ 이게 있는 거다.
그러면 발람의 나귀가 사람의 말을 했는데, 이 나귀가 평소에 말씀을 깨닫고 싶은 마음이 있었느냐? 성령님은 인격적인 존재에게 역사하는 분이다. 나귀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나귀를 통해 특별히 역사하신 거다. 돼지가 새끼를 낳을 때 돼지주인이 기도하면 돼지 새끼가 안 죽느냐? 성령님의 역사는 사람에게 임하는 거다. 사람이 성령의 감화를 입으면 그 역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렇게 나타난다.
성경에 보면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 앞에 얼마를 내놓고 죽었는데, 죽은 이유가 성령을 받아서 죽었느냐,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해서 죽었느냐? 후자다.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는 사도에게 영 분별의 능력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이 사도들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모르고 일반적인 사람으로 보고 거짓말을 했으니 이것은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한 거다. 은혜중의 은혜는 깨닫는 거다. 성령님의 역사는 말씀을 깨닫게 한다. 깨달으면 사람의 생각과 소원과 목적이 바뀐다. 이게 은혜를 받은 거다.
행:에 보면 세계 각국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였고, 또한 외국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도 모였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각 나라 방언으로 전도가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인 무리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을 하게 했고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의 귀에 각각 자기 나라의 말로 들리게 한 거다.
방언이라고 할 때는 각 나라의 말로 예수를 전도하는 게 들어있다.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하는 방언을 행:의 방언으로 알면 안 된다. 왜냐? 첫째는 자기가 당시의 사도들의 믿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자기가 부자 되고 병 낫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당시의 사도들이 지금의 자기처럼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복 받고, 병 낫고, 만사형통이 되려고 예수를 믿었느냐? 성령님은 이런 사람을 붙잡고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날 교인들이 방언하는 것은 믿지 말아라. 방언을 하려고 하지도 말아라. 방언을 하려고 하는 것은 마귀에게 격동 받은 거다.
방언은 각 나라의 말로 전도하는 게 들어있다. 행4:에서는 무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었다. 즉 성령을 받으면 마음이 하나로 평정되고 욕심이 없어진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렸고, 이것을 성도들에게 필요한 대로 나눠줬다. 여기서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았다는 것은 성령을 받으면 자기 것을 전부 팔아서 나누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은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거다.
행:에서 성령을 받으니 각 나라말로 방언이 나온 것은 전도가 되는 방언이다. 그런데 지금 교인들이 하는 방언이 전도가 되는 방언이냐? 자기가 방언을 받았다면 외국사람과 말이 통해서 그들에게 전도를 해야지 전도도 못 하고, 속에 영웅성만 잔뜩 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너도 안수받으면 나처럼 방언이 터진다’라고 하는 것은 무당 점쟁이 식으로 믿는 거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성령을 받고 자기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대로 나눠준 것을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도운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물질에 욕심이 많은 사람을 물질로 도우면 오히려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의존심만 키워주게 되고, 물질을 나눠주는 것을 복음으로 알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의 신앙을 망치는 거다. 부지 중에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는 거다.
믿는 사람이 인정정실로 돌아가면 감정에 놀기 쉽다. 이런 정신으로 다른 사람을 돕다가는 도움을 받는 사람을 망가뜨리게 되고, 도와주다가 어떤 이유로 돕는 것을 중단하면 돕던 사람을 향해 사람이 변했다고 하며 원수를 삼거나 야속하다고 하며 원망을 할 수도 있다. 탕자가 집을 나가서 재산을 다 허비했는데 아버지가 돈을 한 보따리 지고 찾아가서 건네주면 이 자식이 바로 되겠느냐, 자꾸 더 달라고 하다가 이런 정신으로 죽겠느냐?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겠느냐, 구원이 없이 살다가 죽겠느냐?
세상사람들이 왜 그렇게 물질에 욕심을 부리느냐? 세금을 탈루하면서 비싼 차를 굴리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세상만물이,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게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물질에 욕심을 내며 쌓아놓고 있으면 오랫동안 먹고 마시게 되느냐, 오늘 밤에 죽을 수도 있느냐? 오늘 밤에 죽는다면 자기가 쌓아놓은 재물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이런 부모의 자식들은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부모의 재산을 자기가 많이 차지하려고 싸움이 일어난다. 이게 사람 꼴이냐? 사람 되는 지식이 안 들어가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과부가 성전에서 두 렙돈 헌금을 했을 때 주님이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쳤다고 했는데, 이 말씀이 과부가 자기의 집 팔고 논 팔고 해서 주님께 다 바쳤다는 거냐? 이것을 물질적인 개념으로 말을 하면 안 되고 자기의 모든 재산을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거다. 성령을 받으면 이런 사람으로 된다는 거다. 자기가 세상에 올 때 돈을 가지고 나왔느냐? 다 하나님의 것을 이용 사용 활용하는 거다.
성령의 감화를 입고 사람이 변화되면 물질을 나눠 쓰게 되고 또한 병을 고치기도 하는데, 이것을 육신의 병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신에 감화 감동이 되어서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은 우리 주님은 영인성장 면에 병들고 죽고 한 것을 고치고 살린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즉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을 육적으로 생각을 해서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으로만 아는 것은 안 믿는 사람과 소원 목적이 똑같은 거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세상 것에 욕심을 내며 자기가 소유한 것을 ‘내 소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중에 자기가 소유한 것을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은 당연히 물질적으로 더 풍부하다. 반면에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물질적으로는 풍부하지 않을지라도 지혜가 들어가고 슬기가 들어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더 풍요롭게 산다.
사람이 부자로 살건 가난하게 살건 이치를 어기고 살면 그 마음이 늘 불안하다. 자기의 염려 걱정 근심을 자기가 끌고 들어온다. 반면에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성령의 감화를 입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그 마음이 평화롭고 풍요하고 기쁘다. 그리고 영원히 사는 부활의 생명을 알게 된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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