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실리와 명분
전도서 7:1~14
이익(1681~1764)의 <성호사설>에 의하면 “옛날 금나라의 속담에 온갖 것을 다 길들일 수는 있지만 고려인만은 길들일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려와 금나라의 관계가 조선과 명나라처럼 굴종을 당연시하는 군신의 나라라기보다는 대등한 형제 나라였음을 상기시킵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한족의 나라 송과 대립하는 형태여서 한반도의 고려로서는 명분과 실리를 따라 곡예 같은 외교술을 펴야 했습니다. 오늘의 동북아 정세도 그때와 유사하여 우리로서는 운신의 폭이 넓지 못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우리로서는 외교와 국방을 위해서는 미국에 편승해야 하지만 경제와 무역을 위해서는 중국을 외면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미국 입장에 서자면 역사의 앙금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일본과도 친밀해져야 하는 만큼 유쾌하지 않습니다. 강 대 강 구조 속에 끼어서 실리와 명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명분을 따르자니 실리가 울고, 실리를 쫓자니 명분에 금이 가는 형국이고 자칫하다가는 명분과 실리를 다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정부는 중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기보다는 미국의 입장에 서서 외교와 안보를 굳건히 하려고 합니다. 차라리 앞 정부가 견지하여온 ‘전략적 모호성(또는 유연성)’이 흑백논리에 익숙한 국제 관계에서 명분과 실리를 취할 수 있는 지혜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리와 명분의 틈바구니에서 삽니다. 성경의 사람 아브라함은 명분을 좇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어난 재산으로 조카 롯과 분가할 때 선택권을 흔쾌하게 양보하였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실리도 뒤따랐습니다. 명분을 따르니 실리도 얻는다는 점은 귀한 교훈입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강한 자의식을 가진 야곱도 명분을 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지어진 운명과 굴레를 바꾸려고 계략과 음모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명분을 취한 후에 그의 삶은 실리를 누리기는커녕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지내며 속임 당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자업자득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성자다운 면모를 갖춥니다.
전도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선악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줍니다.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전 7:1 새번역). 죽음이 생명보다 좋고, 고통이 웃음보다 낫고, 꾸중이 노래보다 좋고, 지혜가 돈보다 유용합니다. 세상의 원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보편적 원리와 상식이 무너지는 예외적인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갖는 일이 전도자가 권하는 지혜입니다.
잘 사는 것이 화가 될 수 있는 세상, 심은 대로 거두지 못하는 세상살이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자세로 스스로 성찰하여 지혜에 이르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께서 동행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 현대인과 사회는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심이 큽니다. 바른 것을 선택할 용기와 지혜를 주십시오.
찬송 : 487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https://www.youtube.com/watch?v=bByzIjyaw3A
2022. 12. 9 금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