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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웃는 얼굴로 살기
전도서 8:1~8
나는 설교를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화난 선생이 되곤 합니다. 강단 아래서는 순한 양 같다가도 설교단에 서면 늑대 같아지곤 합니다. 교인들은 이유도 모른 채 흠뻑 두들겨 맞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니 여간 미안한 게 아닙니다. 고친다 고친다 하면서도 잘 안 고쳐지는 부분입니다. 의로움에 대한 생각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기보다는 머릿속에만 관념화되어 있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꾸중하는 설교가 습관화된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가 크게 뉘우치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인가? 사리를 알아 제대로 풀이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찡그린 얼굴을 펴고 웃음을 짓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이다.”(전 8:1 새번역) 우리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상의 원칙이 무너지고 상식이 파괴된 상황일수록 관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분노와 불평으로 대거리하는 것은 분풀이는 될 수 있어도 지혜로운 태도는 아닙니다. 삶에 적용되는 보편의 원리인 인과율의 원칙에 예외가 생기더라도 화들짝 놀라거나 절망(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을 때 미소가 스며듭니다. 미소를 막는 것이야말로 악입니다.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에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땔나무를 해오라면서 넌지시 물었습니다. “너는 여기서 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무를 해오겠느냐? 아니면 좀 힘이 들더라도 백 리 떨어진 곳에 가서 해오겠느냐?” 아들은 말할 것도 없이 가까운 곳에서 해오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가까운 곳은 언제든지 해 올 수 있다. 하지만 백 리 밖의 것은 남이 가져갈 수 있으니 그것부터 가져와야 하지 않겠느냐?” 눈앞의 쉬운 길을 택하기보다 멀리 내다 보고 근본적인 안목을 가쟈야 함을 교훈합니다. 이를 교자채신(敎子採薪)이라 하는데 유대의 속담에 ‘물고기를 잡아주면 하루를 살지만 물고기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을 산다’는 말과 통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보다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 낫습니다. “생각이 지혜로우면 어떤 경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게 된다”(전 8:5 새번역)
삶에서 지혜가 매우 중요하지만 지혜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때와 방식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대로 하여도 화를 입는 경우가 많다”(전 8:6 새번역). 지혜가 사리를 분별하고 처신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죽음의 때를 인지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늦출 수도, 앞당길 수도, 모면할 수도 없습니다. 전쟁과 난리가 날 때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시공간에 갖힌 지혜의 한계입니다. 빼어난 이념과 탁월한 정치가가 진정한 자유를 주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권력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대가로 존재합니다. 선한 지도자는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잘 사는 것이 화가 될 수 있는 세상, 심은 대로 거두지 못하는 세상살이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자세로 스스로 성찰하여 지혜에 이르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께서 동행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 미소진 얼굴을 더 연습하겠습니다. 능력의 삶보다 지혜의 삶을 추구하겠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아 겸손하기를 힘쓰겠습니다.
찬송 : 390 예수가 거느리시니 https://www.youtube.com/watch?v=ZBzeancYwbc
2022. 12. 11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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