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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기록된 이름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05 추천 수 0 2022.12.12 21: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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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1-11, 16-2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5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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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_uhNXRgtLoo 

성경본문 : 누가복음 10:1~11, 16~20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2022년 7월3일

 

싯다르타나 공자나 마호메트, 그리고 구약 율법의 태두라 할 수 있는 모세는 천수를 다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살이에 관해서도 알려진 사실이 많습니다. 이에 반해서 삼십대 중반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에 관해서는 알려진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30세쯤에 출가하여 2~3년간 활동한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문서(위경)가 있기는 하나, 교회에서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 짧은 2~3년간 예수는 유랑 랍비로 살았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제자들과 함께 성지 순례차 예루살렘을 찾는 과정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바로 복음서 내용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이들 중에 칠십 명을 모아서 둘씩 여러 마을로 보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처한 영적 실존은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눅 10:3)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탁발수도승처럼 사람들이 내어주는 것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당연히 궁핍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환영만 받는 게 아니라 거절당할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전해야 할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명제입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1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특히 11절은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거절당했을 때 취해야 할 행동과 그 동네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여러 마을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께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라고 말합니다. 귀신이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악한 세력을 귀신이라는 단어로 묘사했습니다. 질병, 가난, 전쟁, 장애 등등,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당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병과 가난과 고난이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귀신들도 항복한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은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말을 인정했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강력하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말씀에서 큰 힘을 얻었을 겁니다. 이런 말씀이 자칫 승리주의 관점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악을 깨부수고 승리한다고 말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해서 그리스도인은 돈도 잘 벌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있고, 사업도 번창한다고 말입니다. “I can do it.”을 입에 달고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단서를 달기는 하지만 자기 인생에 실패는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런 승리주의 신앙은 매우 세속적인 세계관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세상이 세상의 방식으로 주는 심리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리스도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권능’은 헬라어 ‘엑수시아’의 번역입니다. 엑수시아는 ‘권위’(authority)를 가리킵니다. 복음의 권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권위가 무엇인지, 생명의 권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능력 안에서 그의 영혼이 자유로운데 무슨 세력이 그를 좌지우지할 수 있겠습니까.

 

비유적으로, 여기 개구쟁이 아이들이 모여서 놓고 있습니다. 한 아이는 이미 철이 났습니다. 삶에 대한 이해가 보통 아이들과 다릅니다. 시를 읽고 씁니다. 자기가 읽을 책이 집에 많습니다. 곤충도 좋아하고, 꽃도 좋아합니다. 자기의 어린 동생과 놀아줄 줄 압니다. 부모와 이런저런 대화도 합니다. 어떤 깡패 같은 아이가 나타나서 이 아이를 따돌립니다. 보통 아이 같으면 낙심천만이겠지만 이 아이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면 좋지만 놀아주지 않아도 혼자 더 재미있게 노는 일을 이 아이는 알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갔기에 깡패 같은 친구들에게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귀신과 사탄이 항복한다는 본문 말씀은 세상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악한 힘이 개입하지 못하는 복음의 새로운 세계 안으로 제자들이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늘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 문장에 두 가지 기쁨의 이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먼저,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은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맞춤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투쟁하는 일도 보람이 있습니다. 교회의 정의에 관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앙 전통을 이어받기에 교회의 정의와 개혁을 더욱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악한 세력이 물러가는 정의로운 세상은 우리의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귀신의 항복이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력인 귀신은 다시 등장합니다. 아픈 사람은 건강을 찾아도 다시 아프고, 억울한 세상은 아무리 공평한 세상이 되어도 다시 억울한 세상이 됩니다. 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서 세상이 완전히 바뀌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다 알고, 경험했을 겁니다. 미국은 늘 정의롭고, 러시아는 늘 불의한 게 아닙니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적인 사람이나 진보적인 사람이나 모두 귀신 들릴 수 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악한 세력에게 지배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조금 좋아졌다고 해서, 즉 귀신의 일시적인 항복으로 기뻐하다가는 다시 실망하게 될 겁니다.

 

이런 문제는 국가나 사회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그대로 해당합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인 잘못을 고치려고 애를 쓸 겁니다. 게으름을 고치려고 하겠지요. 귀신에 해당하는 가치관이나 태도를 고치면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연봉이 높은 직장에 들어가면 뿌듯할 겁니다. 귀신이 항복하는 듯한 일들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많이 일어나기를 담임 목사로서 저도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삶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귀신이 반복해서 출몰하고 기승을 부립니다. 사회정의를 외치던 사람이 사리사욕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교회개혁을 외치던 사람이 교회 안에서 기득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외가 없습니다. 인식이나 의지나 판단에서 그렇게 약한 게 인간입니다. 그 누구도 악한 세력인 귀신을 온전히 쫓아낼 수 없어서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동의하십니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라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립니까? 귀신이 항복하는 것도 기뻐하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도 기뻐하면 되지 않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귀신이 항복하는 일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만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는 말은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무엇을, 어디를 가리킬까요? 고대인들에게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은 비밀 충만한 곳이었습니다. 사람이 확인할 수 없는 생명의 시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창조 둘째 날에 ‘물과 물로 나눠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주 전체에 물이 가득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바다에 물이 있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걸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궁창을 만들어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눴습니다.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불렀습니다. 주기도의 시작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지금 우리가 아는 그런 우주 공간으로서의 그 하늘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없는 생명의 심연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에 나오는 ‘하늘’은 생명의 비밀입니다. 생명의 비밀이 하나님이니까 하늘은 곧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하늘과 하나님은 동의어입니다.

 

신약성경 언어인 헬라어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이고 천국은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마 13:44, 45, 47)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순수 우리말로 번역한 거고, 천국은 한자로 번역한 겁니다. 실제로는 똑같은 의미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를 교차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두 가지를 그들은 구분하지 않은 겁니다. 따라서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 나라에, 즉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기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이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 6:20)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일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32)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런 일련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용맹정진, 전력투구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교양을 갖추는 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백척간두에 서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21세기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요? 이렇게 설교하는 저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 나라에 의존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적당하게 그리스도인다운 포즈를 취한 채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우리의 일상에서 구체적인 하나의 형태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목사로 살거나 출가 수도자, 또는 오지 선교사가 되는 걸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그게 하나의 선택지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전문 종교인의 삶만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이 문제는 궁극적인 차원에 속하기에 적극적으로(positive) 말하기보다는 소극적으로(negative)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실증적으로 본 자가 없으니 하나님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짚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최선의 길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마치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덩어리의 필요 없는 부분들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조각품을 완성해내는 작업과 비슷합니다.

 

오늘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대상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1) 물질주의가 지배적입니다. 모든 삶의 기준은 돈입니다. 돈을 절대적인 세력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2) 기계적 과학 실증주의도 강력합니다. 과학이 인간을 구원할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현대인을 지배합니다. 그런 생각에는 하나님 자리가 없습니다. 3) 일종의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도 그렇게 작동합니다. 4) 자연주의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요즘 귀촌이나 귀농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도시의 삶에서 얻지 못할 삶의 힘을 자연에서 찾는 겁니다. 자연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자연을 누리고 즐길 수는 있으나 자연을 숭배하는 건 하나님 나라에 의존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체스터턴은 『정통』에서 자연을 가리켜 말하기를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의 ‘누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했습니다. 5) 성경 시대나 오늘이나 막론하고 가장 강력한 세력은 자아 중심주의일 겁니다. 자기 사랑보다 더 강력한 힘은 없습니다. 그걸 성경은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이니까 자기에게 갇힌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의존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평생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앞에서 열거한 것들과 우리가 완전히 단절해서 살아갈 수는 물론 없습니다. 모든 관계를 단절하는 게 옳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바로 거기에 놓여 있으니까요. 일상을 다 소중하게 여기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도 긴밀하게 유지하면서,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에 의존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어려운 겁니다. 까딱하면 우리의 삶이 삼천포로 빠집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속주의에 떨어지거나, 종교 열광주의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종합 예술이자 자기 인생 전체를 거는 모험입니다. 서커스 공연에서 외줄을 타는 곡예사일지 모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9:34)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설교를 들어도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라는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호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모두 아는 작은 조언을 드립니다. 힘을 빼는 게 우선 중요합니다. 자기를 가볍게 여기는 겁니다. 테니스나 골프를 배울 때도 가장 중요한 게 힘을 빼는 겁니다. 힘을 빼지 않고 무조건 강하게 라켓이나 채를 휘두르면 공을 정확하게 보내지도 못하고 오히려 몸만 다칩니다. 삶에서 힘을 빼기 힘든 이유는 자기의 삶이 망가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힘이 빠지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겠지요. 우리에게 그것이 무엇일까요? 다른 건 다 놓치더라도 그 한 가지만은 붙들어야 할 그것이 무엇일까요?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현실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했습니다. 제자가 되었다면 그는 예수께서 가까이, 그리고 이미 왔다고 선포한 그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은 임윤찬 군이 준결승에서 연주한 리스트의 12곡으로 구성된 ‘초절기교 연습곡’(Transcendental Etudes)을 들었습니다. 신들린 듯한 연주에서 임 군이 리스트의 음악 세계 안으로 완벽하게 들어간 듯이 보였습니다. 개인의 차이는 있겠으나, 우리 모두 임윤찬 군처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대가 되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지금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냐, 묻고 싶으신가요? 저는 임윤찬 군이 아니라 동네 피아노 학원 원장 수준이기에 제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라고 확신할 정도로 하나님 나라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비유적으로,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 수준인 듯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제 영혼이 정화되어서 순전한 빛으로 가득한 그 ‘하늘’에 제 이름이 기록되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오늘을 삽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런 순간이 올까요? 이미 왔을까요? 오늘도 저는 이렇게 기도드릴 뿐입니다. ‘예수님과의 결속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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