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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암8: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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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55761 |
설교보기 : https://youtu.be/7KeQxfacWZA
성경본문 : 아모스 8:1~12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 2022년 7월17일
오늘 우리는 세계 교회력의 성서일과(lectionary)에 따라서 주어진 구약 성경 아모스 8:1~12절을 설교 본문으로 선택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기원전 8세기 고대 이스라엘은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남북 분단 체제였습니다. 아모스는 원래는 남유다 지역인 드고아에서 양을 키우고 뽕나무를 재배하던 사람인데, 하나님의 신탁을 받고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쪽이 아니라 북쪽 지역인 벧엘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고, 국력이 탄탄했습니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지도급 인사들을 비판했습니다. 공정과 정의가 실종되었으며, 가난한 이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겁니다. 이러다가는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백성은 피난민이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암 7:10 이하를 따르면 벧엘의 제사장이었던 아마샤는 아모스 선지자를 축출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여로보암 2세에게 먼저 알린 다음, 아모스 선지자에게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왜 남의 나라에서 선동질하느냐? 정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싶으면 당신 나라인 유대로 내려가라.’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하라는 명령을 여호와에게서 받았다는 말로 아마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의 위협에 굴복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용 제사장인 아마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 ”(암 7:17)
아모스 선지자에게 크고 작은 위협이 계속 가해졌을 겁니다. 그래도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을 향한 비판을 이어갑니다. 그 비판은 전체적으로 다섯 항목인데, 오늘 설교 본문에는 네 번째 항목이 나옵니다. 그는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4절)는 말로 시작합니다. 5, 6절에는 당시 상황에 관한 실감 나는 묘사가 나옵니다. 부자 지주들은 월삭과 안식일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그런 날이 빨리 지나야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을 늘리겠다는 뜻입니다. 밀을 팔 때도 일종의 됫박인 ‘에바’는 적게 만들고, 자기들이 받을 은전 ‘세겔’은 크게 만듭니다. 거짓 ‘저울’로 사람들을 속이는 겁니다. 6절에 나오는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라는 표현은 암 2:6절에도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을 값싸게 사고파는 일들이 당시에 종종 벌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 당시에 남부 지역이 농장주들이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흑인 노예를 이용해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듯이,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에서도 부자 지주들은 신 한 켤레로 사람을 사서 더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빈부격차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까요?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의 기호 식품인 커피가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지 여러분도 잘 알 겁니다. 커피 생산국 노동자들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일당은 부자 나라 사람들의 일당에 비해서 10분의 1이나 될까요? 커피를 유통하는 대표적 브랜드인 스타벅스는 떼돈을 법니다. 공정무역을 주창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크게 호소력이 없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축구 경기에서 사용하는 축구공은 3세계 노동자들이 만듭니다. 일당이 몇천 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값싸게 사용하는 생활용품도 대다수는 가난한 3세계 노동자들이 만든 겁니다.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와 그의 노동력을 사는 일은 자유무역이 일상화된 요즘 전방위적으로 일어납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의 소고기 소비가 대폭 늘어남으로써 세계 기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분석에 저는 동의합니다. 소의 먹이로 들어가기에 곡식이 비싸게 유동되는 겁니다. 소고기 소비를 반으로 줄인다면 세계 기아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을는지요.
소위 ‘세계화’ 이후로 더 심해진 이런 구조적 불의와 불평등 문제를 일반 시민들은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에게만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안일한 생각을 독일 본(Bonn) 대학교 철학과 석좌교수인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생각이란 무엇인가』(Der Sinn des Denkens)에서 오류라고 진단합니다. 지구에 사는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인과사슬의 한 고리로 연결되었기에 그 사슬의 끝에서 누군가가 고통당하기 때문입니다. 플라스틱과 스티로폼과 석유, 등등에 의존하는 삶 자체는 지구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과소비로 지구촌의 누군가는 고통당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떻게 되겠지, 하고 지나칩니다.
아모스는 이런 왜곡된 세상을 향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은 한이 맺힌 사람의 절규로 들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서 실행된 홀로코스트를 절대로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일본의 강제 합병을 절대로 잊지 못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이렇게 절규하는 이유는 당시 부자 지주들의 행위가 하나님 신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성경은 만물의 창조주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과 속성이 인간에게 있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인간다운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인간이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은 고상하게 지으시고 어떤 인간은 수준 떨어지게 지으신 게 아닙니다. 부자로 사는 사람이나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신 한 켤레 값으로 가난한 자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8~10절에서 여호와께서 심판을 내리신다고 선포했습니다. 땅이 흔들릴 것입니다. 모든 주민이 애통할 것입니다. 홍수가 일어날 것입니다. 해가 대낮에 지며 백주에 어둠이 찾아올 것입니다. 모두가 애통하며 애곡할 것입니다.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외아들이 죽을 것입니다. 곤고한 날이 이를 것입니다. 아모스의 외침이 있고 나서 50년쯤 지나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아모스가 그 전쟁을 예측하고 이런 심판을 선포한 것은 아닐 겁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미래를 예측하는 점쟁이나 법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선포하는 신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한 해명이지 인간 운명과 역사에 관한 구체적인 예측이 아닙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가난한 자를 이용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죄이며, 하나님은 그런 죄를 방관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의 삶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선지자들이 경고한 바알숭배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가나안 토착 신인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바알 체제가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의 삶을 파괴합니다. 군수업체는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헤지펀드는 한 국가가 부도를 당하든지 말든지, 개인이 파산하든지 말든지 돈을 굴려서 높은 수익을 올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부동산 문제로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의 영혼이 어수선하지 않습니까. 대장동 개발사업과 연관해서 ‘50억 클럽’이라는 말들이 나돌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처벌을 받은 전 국회의원도 있으나 용케 피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오늘 우리는 이미 호랑이 등에 탄 사람처럼 자본과 재화만이 행복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외치는 그런 시대를 삽니다. 여기서 개인이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하고 답답해할 뿐이지 해결할 방법을 모릅니다. 저도 뾰족한 방법을 모릅니다. 구호 단체에 회비를 낸다거나 빈부격차를 줄이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있으면 그쪽을 지지하는 게 최선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이 악행을 절대 잊지 않으신다는 말씀과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은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잊지 않으시기에 심판하는 분이십니다. 심판을 보면 하나님이 절대로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눈에 하나님의 심판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것보다는 ‘똘똘한 한 채’만 눈에 보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눈에 안 보이면 하나님의 창조도, 정의도 눈에 안 보입니다. 오늘날 ‘기후 위기’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는 있으나, 저는 그런 심판은 오히려 부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의 ‘없음’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함입니다. 아모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내릴 날이 멀지 않았다.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
기근이 들면 많은 이들이 고통당합니다.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IMF가 왔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기근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기근이 들어도 서로 연대하면 얼마든지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40년을 마치 ‘고난의 행군’처럼 보내면서도 하나님 신앙이 깊어졌듯이 말입니다. 아모스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정작 굶주림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왜 없었겠습니까?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아시리아 제국과 ‘맞짱’을 뜨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북이스라엘이 잘 나가던 때입니다. 선지자도 많았고, 제사장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호와의 말씀을 북이스라엘 백성의 귀에 솔깃하게 전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잘살게 된 것은 여호와의 축복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아모스는 그런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속이고 낭떠러지로 밀면서 어떻게 말씀을 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오늘날도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중에 바알 선지자의 사탕발림에 가까운 설교가, 또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한 설교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경제정의는 나 몰라라 합니다. 물질 복과 자식 복 이야기만 넘쳐납니다.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모인다는 서울 강남 지역의 그리스도인 분포도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저도 설교를 제대로 하는 설교자라고 자신하지는 못합니다. 그 설교가 여호와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모스에 따르면 영혼의 굶주림이 무엇인지를 아느냐가 관건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혼이 굶주리는 겁니다. 굶주림에 떨어지면 뭔가를 자꾸 먹고 싶어집니다. 만족이 없는 거지요. 만족이 없으니까 대체용으로 채워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대체용의 핵심은 돈입니다. 그 끝판왕이 바로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는 일입니다. 물론 돈이 없으면 생존이 어렵고 삶이 불편하니까 돈을 벌기는 해야겠지요. 돈 버는 게 목적이 되는 거와 먹고살기 위해서 돈 버는 건 다릅니다.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저도 모릅니다. 대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돈이 많이 들겠고, 시골에 사는 사람은 적게 들겠지요. 반대일지도 모르겠군요.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여러분 자신이 판단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돈에 기울어질수록 영혼의 만족은 거리가 멀어집니다.
영혼의 만족이라는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멀리 느껴지거나, 또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나갈 필요를, 하나님을 믿을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한편으로 상대적인 풍요를 누리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상대적인 박탈감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영혼의 만족은 필요하지도 않고, 그럴 여유도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정확하게 아는지 모르겠으나, 젊은이들이 자기 인생 설계에서 원하는 최선의 그림은 마흔 살까지 돈을 충분히 번 다음에 더는 돈 버는 일은 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이 펼쳐지면 영혼의 만족이 가능할까요? 그게 유토피아이고 파라다이스일까요? 저는 천국을 ‘놀고먹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에서 영혼의 참된 만족이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에 설득력이 있나요?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겠군요. 일부러 고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중요합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다 보니 십자가를 져야 할 순간이 있는 거지 십자가를 지려고 예수를 따르는 건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세상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을 ‘실재’(reality)로 경험할 때 영혼의 만족이 주어집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여기 동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화도 내고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도 있고, 당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한 아이는 이렇게 놀다가 조금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집에는 정말 좋은 게 많습니다. 부모와 형제들과 책과 장난감과 책상과 침대가, 그리고 맛난 음식이 있습니다. 지금 친구들과 놀면서 짜증 나는 일이 벌어져도 이 아이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놀이터와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아이는 지금의 삶을 축제로 받아들입니다. 축제가 끝나면 더 좋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나 안심되고, 만족스럽겠습니까. 영혼의 만족이 있으니 그는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이용하는 일은 도저히 하지 못합니다. 묵과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여기의 삶을 축제로 만드는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 나라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오늘 저는 거기까지 설교할 수 없습니다. 대신 마지막 12절 말씀을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말씀의 부재가 어떤 건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
세상을 다 뒤져 얻으려고 했으나 얻을 수 없었던 ‘여호와의 말씀’을 ‘생명’으로 바꿔 읽어보십시오. 또는 ‘사랑’이나 ‘안식’이나 ‘영혼의 만족’이나 ‘자유’나 ‘기쁨’으로 바꿔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아모스가 말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얻었습니까? 영혼의 만족이 느껴지십니까? 그래서 오늘의 삶을 축제로 경험하십니까? 혹은 안타깝게도 오늘 12절이 말하듯이 여전히 ‘비틀거리며 … 돌아다니기만’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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