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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이의 꿈
산골 마을의 겨울은 아무래도 찹니다.
황금물결로 출렁이던 들판이 어느새 텅 비고, 붉게 타올랐던 사방 산 단풍이 불 꺼지듯 사라지고 나면 그냥 겨울입니다.
다급한 도마뱀이 제 꼬리를 자르고 도망을 치듯, 산골의 가을은 성급한 겨울을 피해 일찌감치 물러서 버립니다.
추울수록 옷을 벗는 나무들은 찬바람에 앵앵 울고, 하늘까지 잔뜩 움츠러들어 하루해가 더욱 짧아집니다.
아침과 저녁, 굴뚝마다엔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동네는 겨울잠에 빠진 듯 조용하기만 합니다.
몇 번의 서리가 내린 끝에 첫눈이랄 것도 없는 흰 눈이 난분분 날렸습니다.
일찍 물러간 가을이 그래도 계속된다 싶던 마을에 이젠 정말 겨울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수지와 강 그리고 두 개의 개울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섬들’이란 이름을 얻은 동네는 산의 품에 안겨 있기도 합니다.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은 듯 사방의 산이 마을을 둘러 감싸 안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 마을 뒷산을 사람들은 상자골이라 불렀습니다.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자 상자골의 나무들 사이에서도 성탄나무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핸 누가 성탄나무로 뽑히게 될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상자골 아랫마을 섬들엔 예배당이 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작은 예배당입니다.
겨울이 되고 성탄절이 다가오면 예배당에서는 성탄절 준비를 합니다.
밤마다 아이들이 모여 노래와 무용을 배우고 연극을 준비합니다.
예배당을 장식하는 것 또한 성탄절을 맞는 큰 준비입니다.
뾰족탑 십자가 아래엔 커다란 별이 걸리고, 예배당 안엔 온갖 장식들과 전구들로 빛나는 성탄나무가 세워집니다.
사방이 산이고 나무가 흔한 산골이다 보니 성탄나무는 언제나 상자골에 올라 나무 하나를 베어다 했습니다.
첫눈이 내리고 성탄절이 다가오자 상자골 나무들이 성탄나무 이야기를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올해에는 과연 누가 성탄나무가 될지 여간 궁금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탄나무가 되어 예배당 안에 들어가 온갖 아름다운 것들로 몸을 장식하고, 게다가 성탄을 축하하는 아이들의 노래와 춤, 연극들을 볼 수 있다는 건 너무도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지만, 상자골 나무들은 어느 누구도 성탄나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성탄 나무에겐 즐겁고 신나는 일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상자골에는 결이라고 부르는,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은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키도 제법 자랐고 어깨도 든든하게 벌어진 결이었습니다.
(참, 숲속 나무들에게는 제각각 저마다의 이름이 있답니다. 나무들은 서로의 이름을 알고 있고, 바람결에 서로의 이름을 부른답니다)
언젠가 곁에 선 굴참나무가 성탄나무 이야기를 결이에게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성탄나무 이야기를 들은 결이는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습니다.
“굴참나무 아저씨. 나도 크면 성탄나무가 될 수 있을까요?”
결이가 물었습니다.
“그럼 될 수 있고말고. 넌 소나무니까.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뭐예요?”
“응, 성탄나무가 되기 위해선 큰 아픔을 참아야 한단다. 허리가 잘리는 아픔이지.”
“허리가 잘려요?”
눈이 둥그레진 결이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잘려야 해. 그리곤 머잖아 불 속에 던져져야 한단다.”
성탄나무가 되기 위해선 허리가 잘리고 불에 태워져야 한다는 말에 결이는 덜컥 겁부터 났습니다.
“무섭지만 그래도 난 성탄나무가 되고 싶어요.”
한동안 말이 없던 결이가 또렷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결아. 우리가 언젠가 한번은 베어져야 한다면 성탄나무가 되는 것도 참 좋은 일이지. 하지만 성탄나무란 네가 원한다고 해서 꼭 되는 것만도 아니란다.”
“내가 원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래, 성탄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택해져야 한단다.”
택해져야 한다는 말의 뜻을 아직 어린 결이는 잘 모릅니다.
다만 성탄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올곧게 자라야 하며, 올곧게 자라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는 굴참나무 아저씨의 이야기를 맘속 깊이 담아 두었을 뿐입니다.
흐린 하늘이 한 올 한 올 눈으로 풀려지듯 밤이 맞도록 눈이 온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두꺼운 솜이불인양 두툼하게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덮었습니다.
싫도록 눈이 내린 날 아침, 섬들에 사는 아이들 서너 명과 선생님 한 분이 상자골로 올라왔습니다.
선생님 손엔 톱이 들려 있었습니다.
이내 그 소식은 상자골 전체로 퍼졌습니다.
나무들은 온통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허리가 잘리는 것이 무서운 나무들은 자기 가지 위에 쌓인 눈을 핑계로 가지들을 축축 늘어뜨려 아이들과 선생님의 눈을 피했습니다.
성탄나무가 될 법한 소나무들은 더욱 그랬습니다.
이리저리 숲속을 헤매던 한 아이가 결이 앞에 섰습니다.
한참 결이를 살펴보더니 큰 소리로 선생님과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은 빙 둘러서서 꼼꼼하게 결이를 살펴보았습니다.
결이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가지 위에 쌓인 눈이 무거웠지만 결이는 있는 모습 그대로 서기 위해 가지마다 힘을 다했습니다.
“그래. 참 좋은 나무를 찾았구나. 이번 성탄절엔 이 나무를 성탄나무로 쓰도록 하자.”
선생님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 이것이 선택이구나!’
쓱쓱, 쓱쓱, 결이의 허리에 톱질이 시작되었습니다.
결이의 더운 눈물이 하얀 눈 위에 쏟아졌습니다.
나무상자 안 모래 위에 다시 선 결이의 몸엔 형형색색의 반짝이들과 솜뭉치, 반짝 반짝 빛나는 전구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었습니다.
아이들의 탄성을 살 만큼 성탄나무는 아름답게 장식이 되었지만, 잘린 허리 아래로 자꾸만 물기가 빠져나가는 결이는 점점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성탄절 전날 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성탄 축하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순서를 따라 앞으로 나와 그동안 배우고 익힌 노래와 춤, 성경암송과 연극을 했습니다.
순서가 끝날 때마다 박수가 터졌습니다.
아이들의 순서를 통해 결이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동방의 박사가 먼 길을 찾아와 세 가지 선물을 드렸다는 이야기가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내가 선택된 것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께 작은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점점 희미해지는 눈빛이었지만 결이 또한 순서가 끝날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를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성탄 축하 행사는 밤이 늦어서야 끝났고 성탄절이 지난 며칠 후, 결이는 불을 때는 아궁이에 던져졌습니다.
물론 자신을 아름답게 꾸몄던 모든 장식물을 떼어낸 채 말이지요.
다시 한 번 한 해가 저무는 마지막 밤, 결이는 흰 연기가 되어 밤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 밤은 동그란 나이테를 하나씩 그으며 숲속 나무들이 한 살씩을 더 먹는 밤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결이를 맞아 주었고, 그 순간 밤하늘엔 전에 없던 별 하나가 환하게 새로이 떴답니다.
한희철 목사
*단강에서 목회를 할 때 썼던 성탄동화입니다.
당시만 해도 성탄절이 되면 뒷동산에 올라 소나무 하나씩을 베어 성탄장식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무에게 참 미안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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