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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운 전통 *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약 3,000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기보다는 조상들의 그릇된 전통에 푹 쩔어 살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심하게질책했고 산상 설교에서도 율법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기독교의 비성경적인 전통의 역사는 말 그대로 鳥足之血에 지나지 않는다. 1900년대 초에도 선교사들이 성경을 발행했으나 그때 성경은 한글이 한자 단어의 접두사나 접미사 또는 조사나 종결어미 등으로만 쓰였다. 1937년에 발행된 성경에서 한 절 예를 든다.
"我子아 我의 法度를 忘却치 말고 爾心으로 命令을 守하라
然히하면 爾가 長壽하야 多한
年을 亨하며 平康을
利得하리라.[잠 3:1,2]"('하'와 '한'은 'ㅎ' 아래 '.'이 있는 글자)
그러다가 1952년에 한글로만 쓴 성경이 출판되기는 했으나 한자를 한글로만 바꾸었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글씨만 읽었지 뜻을 모르는 게 많았고, 1961년에 개역한글판이 나오긴 했으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구어체(입말)로 써야 했지만 이에 대한 인식 부재로 종결어미를 모두 古語 문어체(글말)인 '...하시느니라'로 썼다. 그리고 그후 1998년에 성서공회에서 개역개정판을 출판하면서도 '...하시느니라."를 경건체라하며 이 표현을 고집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홍보영상을 보았더니 2035년 발행 예정인 개정판도 그들이 말하는 경건체를 유지하겠다고한다.
경건체라는 말은 우리말큰사전에도 없는 성서공회에서 만든 造語다. 경건은 한자로 두 가지 뜻이 있다. 먼저 성서공회에서 만든 조어인 경건체라는 말은 아마도 '敬虔'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경건의 어원인 '경건하다'의 뜻은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하다'이다. 다른 경건은 역시 '勁健하다'의 어원인 '勁健'인데, '경건하다'의 뜻은 '굳세고 튼튼하다'이다.
따라서 성서공회에서 만든 조어인 경건체라는 말 '...하시느니라'라는 표현을 합리화하는 근거로는 논리가 적합하지 않다. 어찌 되었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입말(구어체, Spoken Language)로 쓰지 않고, 死語가 된 지 오래된 문어체인(글말, Written Language)로 써서 한 세기 가까이 보급해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크리스천들 특히 실버세대 크리스천들은 뜻을 금방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 표현이 눈과 귀에 익었다.
그런데 문제는내용과 상관없이 이 '...하시느니라'라는 표현이 거룩하게 들린다고 말하는 데에 있다.
'거룩하다'는 한자어가 아닌 순수 우리말이고 그 사전적인 의미는 '성스럽고 위대하다'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룩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주지하는 대로 기독교에서 거룩의 의미는 '잘라냄, 분리, 구별'이다. 즉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는 거룩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필자가 편찬한 '그림이 그려지는 복된 말씀'을 두고 친구 목회자 부부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친구의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장로님, 그래도 우리 세대는 '... 하시느니라'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좀 거룩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필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고 말하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실천이 중요하니까 사모는 내일부터 이렇게 말하세요. "여보, 아침 진지 드시오소서." 또 "여보,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으니 외출을 삼가는 게 어떠하실는지요?" 겸연쩍게 웃고 말았지만 삶이 아니라 거룩하게 들리는 겉 모습에 시나브로 세뇌된 결과다.
또 한 목회자는 필자가 편찬한 성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에게 존댓말 한 것을 두고 예수님의 격을 낮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한글 성경 열두 권 모두가 예수님이 청중들에게 말할 때 하대하는 표현을 썼다. 필자가 이 틀을 깨고 恭待하는 표현으로 쓴 이유는 이렇다. 예수님이 하나님인 건 맞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실 때는 분명히 사람의 모습으로 왔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고매한 인품과 인격자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말할 때 공대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물론 존댓말은 우리 고유의 언어 문화이기는 하지만.
성경에는 근거가 없고 한 세기 넘게 전통을 따라 부르고 있는 목사(엡4:11에 한 번)라는 호칭도 이제 바꿀 때가 되었다.
일전에 버들시내편지에 기고한 적이 있는데, 목사라는 호칭은 초대교회 때도 없었던 호칭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牧者라 부르고(시 23:1) 예수님이 친히 자신을 선한 牧者(요 10:11,14)라고 했는데 죄인인 사람이 스스로를 牧師로 높혀 부르는 건 어불성설이요 不敬스러운 일이다. 공동번역성서는 이를 '목자'로 번역했고 현대어성경은 헬라어 사본의 뜻을 제대로 살려 일반 성경에서 '목사와 교사'로 번역한 것을 '양을 먹이는 목자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며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 길게 풀어 번역했다. (some people to have the work of caring for and teaching God's people
[ Easy-to Read Version])
1925년에 발행된 한자 성경은 엡 4:11을 牧師가 아니라 牧會者로 썼는데, 그보다 12년 뒤인 1937년에 발행된 성경에서 牧會者를 牧師로 바꾼 건 아마도 일제 치하에서 기독교의 지도자 호칭을 높여 불러야 할 사회적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思料된다.
신약성경에서 목자로 번역한 헬라어 '포이멘'이 모두 스물한 번 나오는데 엡 4:11을 제외한 스무 군데는 '포이멘'을 목사로
번역하면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엡 4:11 한 군데만 목사로 번역해도 말이 성립하는데, 목사라는 호칭이 성경에 근거가 있는 호칭이라고 내세우기 위해 목자로 번역해야 할 것을 목사로 번역한 것이다.
마지막 날 심판 때 하나님이 심문하는 내용은 오직 하나, 말 실수(무익한 말, 터무니없는 말, 쓸데없는 말)에 대해 심문하고 그에 따라 무죄 또는 유죄를 선언한다고(마 12:36,37) 했다.
이제 정말 성경으로 돌이갈 때가 되었다. 舊態인 사람의 전통을 벗을 때가 되었다. 진리인 성경의 오류를 바로잡아 진리를 진리답게 쓸 생각을 해야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造語인 경건체라는 말 '...하시느니라'라는 표현으로 거룩을 세뇌시키는 건 옳지 않다. 한 세기 정도의 전통도 허물지 못하면서 무려 3,000년 동안이나 전통에 쩐 유대인을 책망하는 건,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 눈의 티끌을 빼려고 하는(마 7:4)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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