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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기쁨
요한삼서 1:1~8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순자(荀子)는 <권학편(勸學篇)>에서 ‘학문이란 멈추어서는 안 된다. 쪽에서 취한 푸른색이 쪽빛보다 푸르고, 물에서 취한 얼음이 물보다 차듯 학문을 계속하라’( 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而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야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가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청출어람 청어람(靑取之於藍而靑於藍)’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선생 된 자의 학문 진보는 과거의 자기 학문을 오늘 극복하는 데 있고, 제자 된 자의 학문 업적은 스승을 추월하는 데 있습니다. 스승이 너무 존경스러워 그 벽을 넘지 못하는 지성은 학문이라기보다 종교에 가깝습니다. 학문 세계에서 스승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추월의 대상입니다. 주전 6세기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우주의 근본 원리인 아르케(arche)를 ‘물’이라고 했습니다. 물기 없는 세상이 없듯 신기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하늘의 신, 바다의 신, 강의 신, 낮의 신… 등 당시 범신론적 세계관과 잇닿아있고, 이것이 서양 정신사에 처음 등장하는 ‘일원론’입니다. 탈레스에 의하면 ‘물=아르케=신’입니다. 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는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르케가 아니다’며 스승을 넘었습니다. 스승의 유물론적 사고를 초월하여 그리스적 종교에 근접하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그의 제자 아낙시네스는 ‘스승의 주장이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이라며 아르케는 ‘공기(숨결)’라며 압축과 팽창이야말로 모든 변화의 원동력으로 보았습니다. 탈레스와 그의 제자들을 밀레토스학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스승을 초월하고자 하므로 인류 정신사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에 이광수는 목회자의 무식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靑春」, 1917). 공부하지 않고 가르치기만 하려는 목사의 게으름과 무식은 지금도 한국교회 성숙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목사들의 신학과 지성 수준은 대개 신대원 졸업반에 머물러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기계적 축자 영감설과 신비적 은사주의, 세대주의적 천년왕국론, 전투적 반공주의, 창조과학론, 부패한 자본주의, 미국 사대주의와 친이스라엘 사고에 묶여있습니다. 사회의식은 무디고 문화 이해도는 낯설고 인권감수성은 낙제점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수준에 딱 맞는 교인들을 판박이처럼 양산합니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언어로 소통하며 다른 이를 차별하고 무시합니다. 자기 수준이 세계 최고이고, 더 이상 발전은 없다고 장담하며 다른 생각을 이단시합니다. 처음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지도자 수준을 자기 아래 두고자 한 것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144년 한국교회의 구습이고 적폐입니다. 교회 구조상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출현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물론 다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1:3~4).
요한의 기쁨은 선생 된 자가 누릴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영원을 부정하고 절대자를 비웃는 패악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진리와 평강을 변함없이 추구하며 빛으로 살고자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사랑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하나님, 저는 부끄럽게도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을 닦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추월하는 후배들과 제자들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주님 안에서 갖고 싶습니다.
찬송 : 595 나 맡은 본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qFgko899Nqg
2022. 12. 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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