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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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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4장 12절-22절: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12절: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이 사마리아 여자는 야곱의 후손이고, 신앙이 있다. 그런데 어떤 신앙인지가 문제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합니까?’ 이 말이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야곱밖에 모른다. 즉 야곱이 가졌던 물질개념의 신앙밖에 모른다. 오늘날도 이것밖에 모르는 교인이 많다.
물질개념의 신앙은 아무리 올라가봐야 종교적인 도덕성뿐이다. 이건 사람이 변화된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이성적 양심에서 나오는 것이니 인간기준이다. 성경을 들고 말을 할지라도 이 기준으로 말을 하면 이방 종교인들의 도덕성과 같아진다. 이런 질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신적 도덕성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신앙의 질이 땅에 속한 것인 줄을 모르고, 죽음 저 너머까지 효력을 볼 수 있는 이해타산과 판단을 하지 못 한다.
지금 온 교회에 사마리아 여자와 같은 신앙이 깔려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느 면이 야곱보다 위대한지를 알고 있느냐? 계:에 물을 타고 앉은 여자, 산을 타고 앉은 여자, 짐승을 타고 앉은 여자가 나오는데, 이게 다 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달을 밟고 해를 입고 있는 여자 하나도 있는데, 이는 참 교회를 말한다. 하나뿐이라는 것은 그만큼 찾아보기가 귀하다는 거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실질적으로 달을 밟고 해를 입은 신앙을 가져야 하겠는데 물질을 타고 앉은 여자, 세상을 깔고 앉은 여자, 즉 세상이 높여주는 교회, 그리고 짐승을 타고 앉은 여자, 즉 본능을 타고 앉은 교회,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속을 못 고친 교회, 그리고 산을 타고 앉은 여자, 즉 교만한 교회가 참 많다. 영의 눈으로 보면 웬만하면 이런 게 보인다. 우리가 계:에서 말하는 세 종류의 여자 가운데 하나에라도 속한다면 다른 두 종류의 여자도 같이 따라온다. 그러니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예수를 믿는 나에게 이런 요소가 조금이라도 없는지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양심이 선악과 따먹고 비뚤어진 상태라서 남을 관찰하고 비판을 잘 하지만 자기 관찰을 깊이 못한다. 그리고 남을 비판하는 자기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 빗나간 것을 모른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아느냐? 이걸 아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나 하나님의 본질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판단이 쉽다. 이러면 예수 믿기도 그만큼 편하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만들기 전부터 창조의 주시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의 계획한 분이다. 일대 일로 보면 나는 그 때 안 태어났지만 그 때 이미 당신의 의중 속에 나를 품고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에도 없던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의중대로 구원역사를 통해 나를 태어나게 하신 거다. 이걸 가르쳐 주는 게 성경 외에 있느냐?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인류의 역사를 진행하는 분이고,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상을 끝낼 분이다. 그 이유는 인간창조의 궁극적 결과적 목적이 당신의 백성들을 신령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 영적인 생수를 주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 주신다. 한 마디로 우리를 예수 당신처럼 온전자로 만들어서 그 나라를 당신과 함께 누리게 해 주신다.
창세 이후로 세상의 어떤 인간이 죄 있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자로 만들어줄 인간이 있더냐? 이방종교의 교주가 이 일을 할 수 있느냐? 그런데 세상사람들이 어떤 물을 먹고자 하느냐? 세상 속화된 기독자들은 어떤 물을 먹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주시기를 소원하는 그 생수인가? 구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정신을 알 수 있다.
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이 여자가 야곱이 준 우물을 먹고 있는 것을 신앙으로 돌려서 생각을 하면 야곱은 물질신앙이었으니까 이 여자는 물질적 신앙을 가진 거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으로 야곱의 잘못된 신앙을 말해주기도 했고, 삼촌 집에서도 꿈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꿈으로 ‘너에게 어떻게 어떻게 해 주겠다’ 라고 하셨으면 야곱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자기가 그 꿈을 실현시키려고 잔꾀를 낸다. 그래서 실한 양이 자기 앞에 오면 수단을 써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신 것은 그 약속을 이루실 때까지 야곱의 잘못된 것을 고치라는 뜻인데 이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자기가 이루려고 자꾸 수를 쓰는 것은 인본주의 신앙이다. 물질신앙을 가지게 되면 인간의 꾀가 많이 나온다. 목사가 물질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적인 꾀를 많이 쓰게 된다.
야곱의 후손들이 야곱의 우물물을 먹었다는 것은 이들이 야곱의 물질신앙을 이어받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렇지만 아들은 이 물을 계속 먹어도 계속 목이 말랐고, 그래서 또 먹어도 또 목이 말랐고, 이렇게 하다가 영생을 맛보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이 말은 지옥에 갔다는 게 아니라 이룰구원에서의 말이다. 믿는 사람이 물질을 간구하고, 욕심을 품고, 자랑을 하는 것은 물질성의 신앙이다. 물질 이해타산에 둔 물질의 신앙은 계속 목이 마르고 결국은 죽는다. 마음에 평안도 없고, 늘 근심 걱정이요, 영적인 면에 늘 목이 마른 채 결국은 죽는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이런 야곱의 물이 아니다.
14절-15절: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영생수를 주시겠다고 하는데 여자는 물질의 물로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 말한 대로 곧이곧대로 들을 게 있고, 그 말을 둘러서 알아들을 게 있다.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영생수를 주시겠다는 건데, 이 영생수를 입으로 마실 수 있고 밥을 해 먹을 수 있느냐? 그리고 물질의 물이 아무리 깨끗하고 좋은 물이라고 해도 사람을 영생하게 하느냐? 그러나 이 말을 영적으로 돌려서 생각을 하면 옳은 말이다. 야곱의 우물물은 인간에게 영생을 줄 수 없고, 육신의 갈증해소를 위해 계속 마셔야 하기 때문에 계속 퍼먹어야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는 계속해서 주시기 때문에 한 번 마신 사람은 계속해서 마실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고 한 말을 신앙적으로 생각을 하면 ‘물질적으로 외치는 교회에는 다시는 가지 않게 하소서’ 이런 사상이 들어 있는 말이니 이런 면으로 볼 때 이 말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자는 육의 생각으로, 육적인 의미로 한 말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세상부자가 되려는 야곱의 물질의 사상과는 전혀 다른 영적인 차원의 물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영적인 면이 잘 되게 해 주시려는 소원이요, 야곱은 육적인 소원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육적인 소성성으로 말을 하지 않으신다. 육적인 소원성은 늘 퍼다 먹어도 항상 목이 마르다. 이런 집회, 이런 설교는 항상 목이 마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게 되면 먹어도 다시 또 목이 마르는 물질 소원적인 신앙사상을 버리게 되고, 두 번 다시 그 물을 먹지 않게 된다. 이 영생수를 알고 마셨다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먹으려고 하지 누가 목이 마르는 물질사상의 신앙을 먹으려고 하겠느냐?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도 물질의 물과 영생수를 구별하지 못해서 물질의 사상을 먹는 자가 많이 있다.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기’란 야곱의 물질사상을 말한다. 이곳으로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한다. 즉 야곱의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게 해 달라고 한다. 여자의 소원이다. 예수님은 이 소원을 들어주셔야 한다. 이런 소원을 들어주려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즉 영생수를 주려고 오셨다. 진리본질이 영생수이니 이 물을 마셔야 영적인 목마름이 해결이 된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시대의 교인들이 자기의 영적인 목마름을 어디에 가서 해결을 하려고 하느냐? 세상이다.
16절-21절: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님께서 물을 말하다가 갑자기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다. 여자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뜨끔하고 깜짝 놀랐을 거다. ‘네 남편’이란 정신적 사상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물질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니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신앙을 다 아시고 여자의 남편문제, 즉 여자의 마음 가운데 들어 있는 신앙이라고 하는 그것을 지적해서 바꾸고 고치게 하려고 ‘네 남편을 불러오라’ 라고 말씀하신 거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여자가 이미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데도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라고 하신 말씀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대답을 했다. 이 말을 표면적으로만 들으면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나 예수님께서 물으신 의도에 비춰서 들으면 예수님의 생각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믿는 사람이 야곱의 물질신앙으로 나가면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는 남편을 자꾸 바꾸듯이 세상을 향한 물질적 소원 목적이 계속 변하게 된다. 이런 신앙을 가지면 자기 딴에는 여러 가지 요구조건이나 목적을 말을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여자가 참 의지할 남편이 없었던 것처럼 자기의 참 의지할 게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라고 하신 것은 ‘네가 참 의지할 게 없구나’ 이 말이다.
예수 믿으면서 물질 소원 목적을 가진 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남편이 없는 거다. 그 신앙 속에는 참 의지자가 없다. 이렇게 영적인 면으로 볼 때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한 것은 양심에 숨김이 없는 진실한 말이다. 우리는 이런 눈으로 여자를 봐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물질성으로 들어가면 참 의지자가 없는 거다. 이러면 남편을 자꾸 갈아치우게 된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남편이 몇 명이 있었는지를 다 아신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남편이 없다고 하는 여자의 말은 옳은 말이다.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이 여자가 남편이 여럿이 있었다고 해서 몸 파는 여자로 보면 안 된다. 이 여자는 야곱의 후손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여자다. 그래서 20절에서 예배문제를 말하는 거다. 그리고 이 여자가 신앙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예배문제에 대해 말씀을 하시겠느냐?
그래서 이 여자가 야곱의 우물물을 길으러 온 것을 통해 ‘내가 그 동안 야곱의 물질축복 중심으로 살아왔는데 이런 신앙을 잡고 계속 물질에 등을 기대며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그 어떤 것을 붙잡고 살아야 할 것인가?’ 라고 하면서 참을 찾기 위한 노력성을 볼 수 있다. 자기가 그 동안 남편 여럿을 갈아치웠지만, 즉 물질적인 신앙을 가지고 세상의 이것저것을 취하려 했지만 참 의지자를 찾지 못했고, 만족을 맛보지 못했고, 갈급성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참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이걸 아시고 여자의 남편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찾아오신 거다.
이 여자가 사창가에서 몸 파는 여자라면 이 여자의 갈급성을 세상에서 다 해결할 수 있는 건데 예수님께서 이런 여자를 뭐 하러 찾아가시겠느냐? 기생라합도 술을 팔면서 두 정탐꾼 남자로부터 복음의 소식을 듣고 들었고, 그 다음에 자기의 소속을 하나님께로 옮기고, 입장을 옮기고, 목숨을 걸고 두 정탐꾼을 지켰다. 지금으로 말을 하면 목숨을 걸고 자기에게 온 진리생명을 지킨 거다. 하나님의 신의 역사가 임하는 사람은 평소에 자기의 신앙양심을 바로 하려고 노력을 한다. 이런 사람이 진리본질의 말씀을 들으면 금방 성령님의 감화가 들어가고 주님이 영접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 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면 죽은 송장은 세상의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죽은 송장도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신앙을 일으키고, 죽어가는 신앙을 살리는 역사가 들어 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이 역사를 하신다. ‘듣는 자는 살겠고, 믿는 자는 살겠고’ 하는 말씀을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에 따라 자기의 죽고 사는 게 결정이 된다. 그럼에도 어디에 이해타산을 두고 살고 있느냐?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신앙심성을 바로 가지고 살면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체험을 하고 가야 한다. 무엇보다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아벨이냐, 가인이냐?’ 하는 데서 이게 갈라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신앙이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예수님을 유심히 살피고 선지자로 알아본 거다. 여자가 목이 말랐는데 생수를 말씀하셨고, 참 의지할 자를 못 찾고 있었는데 참 의지자를 말씀해 주셨고, 예수님과 계속 대화를 하면서 마음이 예수님과 점점 좁혀진다. 그래서 예수님이 선지자로 보여져서 이제는 예배문제에 대해 해석을 해 달라고 하는 거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여자는 장소와 건물을 중심에 두고 조상 때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예배에 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세겜을 말하는데, 훗날에 여호수아가 이곳에서 모세가 말한 대로 레위족속의 대제사장들로 법궤를 메게 하고 백성들로 절반은 그리심 산 쪽으로, 절반은 에발산 쪽으로 서게 해서 축복과 저주를 선언했다.
계시적 상징적으로 그리심산은 하나님만 섬기면 축복을 받는다고 선언된 산이고, 에발산은 벌거벗은 산으로 저주를 받는다는 산이다. 그래서 이 여자의 조상들과 당시의 사람들은 그리심산을 축복된 산이라고 생각을 해서 이 산에 가서 예배를 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이 계시의 사상과 정신을 모르면 장소나 시간이나 의식에 얽매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러면 어떤 장소나 의식이나 순서가 우상화되기 쉽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런 신앙이었던 거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이 말씀을 하심은 이 여자가 꼭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기에 내 말을 믿으라는 거다. 그러니까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지식적으로나 경험적으로 할 수 없고 될 수 없는 것을 이 여자에게 주고 싶으셔서 내 말을 믿으라고 하시는 거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주고 싶어서 내 말을 믿으라고 하시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아닌 것, 즉 우리가 영원히 존귀 영광이 되지 않을 것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그러니 주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것을 다 받고 가라는 거다. 그런데 육적인 믿음을 가진 이 여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믿어질까? 오늘날 기독자들은 영적인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질까?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님은 장소적 개념이나 건물적 개념이나 물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는 게 아니다. 예배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거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거다. 그래서 건물이나 장소나 일이나 세상의 그 어떤 것에 하나님을 집어넣어서 예배를 드리면 안 된다.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이 여자가 그 동안 알지 못하는 것에 예배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 여자가 자신이 이런 신앙인 줄을 알까?
성경에 보면 구약의 솔로몬 왕의 범죄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남조 유다와 북조 이스라엘로 나눠지게 했다. 남조 유다에는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지만 북조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없다. 그래서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마다 남조 유다로 예배를 드리러 가기 때문에 북조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이 백성들이 남조 유다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북조의 단과 벧엘에 두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했는데. 이건 물질성적 신앙이요 인본주의 신앙이다.
소는 농사의 일을 할 때 쓰는데, 이 소를 우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물질부요를 위해 이 우상을 섬기라는 거다. 신앙적으로 말을 하면 교회에서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물질의 복을 받는다고 강조하는 게 소를 우상으로 섬기게 하는 거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신앙으로 사람들을 붙잡아 두는 일이 많이 있다.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계속 물질적인 신앙으로 흘러 내려오면서 선지자의 말을 안 듣다가 230여년 만에 이방나라 앗수르에게 정복이 되고,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 이곳의 남자들을 죽이거나 앗수르로 끌고 갔고 다른 곳의 남자들을 이곳에 풀어놓으니 이 사이에서 완전히 혼합 혼성의 자녀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나온 후손들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겠느냐?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랬듯이 오늘날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 이런 식으로 세상의 물을 먹고 내려오고, 먹고 내려오고 하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섬기겠느냐? 이런 신앙상태를 가지고 예배를 한다고 해도 자기 속에 든 소원과 목적은 그 질이 세상을 향하고 있는 건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예배를 받으시겠느냐? 예수 믿으면서 세상을 구하는 것은 야곱의 신앙이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사마리아 여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른 채 예배를 했고, 아버지를 모른 채 충성봉사를 했고, 바른 예배가 뭔지 알지 못한 채 예배했으니 헛 믿고 헛 예배를 드린 거다. 오늘날도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 목적을 모른 채 예배를 드리는 자가 많이 있는데 이런 예배는 헛 예배다. 인간 자기를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예배, 재세기간 동안에 무엇하고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드리는 예배는 모두가 헛 예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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