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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민수기 5:11~31
전에는 성경을 읽다 이해되지 않으면 ‘내가 믿음이 없다’고 자책했습니다. 질문을 하거나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얕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을 진멸하라’(신 20:17)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난폭하고 무자비한 군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말씀입니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사회진화론자의 손에 들려져 팽창 욕구에 정신 나간 제국주의 나라들이 자행하는 서세동점(西勢東占)의 당위성에 대한 이유와 변명거리가 되었듯이 가나안 종족에 대하여 인종청소를 연상하는 성경 말씀은 숱한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평화의 하나님이 힘에 의한 약탈을 명령하고, 어떻게 문화를 파괴하는 반달주의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 하였지만 석연치는 않습니다. 다만 의문을 갖고 질문하는 행위가 반드시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시공의 제한에 갇혀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사람의 이해에 정복되는 하나님이라면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의문과 질문은 이어질 수 있고, 그 답 역시 반드시 즉각적일 이유는 없습니다. 깨달아지고 이해되면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믿음이 흔들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모르는 것이 후에 깨달아질 수 있으니까요.
사실 본문은 해석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해석이 어려우니 적용점을 찾기도 힘듭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현저하게 낮았습니다. 남편의 의심에서 시작된 아내의 부정을 아내가 증명하는 일이란 중세의 마녀사냥만큼 비합리적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시절, 교회가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 생기면 으레 교회는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교회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흑사병 같은 질병이 전 유럽에 창궐할 때, 아니면 중세교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발도파 등에 대하여 마녀사냥이 자행되었습니다. 마녀로 지목되면 마녀감별 과정을 거쳐 재판을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문을 견뎌야 합니다. 고문에 굴복해도, 고문을 견디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영화 <고야의 유령>(2006)에서 이네스는 성실한 기독교인이지만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에 엮입니다. 교회의 악행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여성이 부적절한 죄책과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는 정도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절망뿐인 광야 같은 세상살이에도 하나님의 계수함을 받은 자로서 희망의 삶을 잇는 형제와 자매에게 주님의 선한 이끄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세상에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가 존재합니다. 여성, 또는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난민… 이라는 이유로 인권이 제한받지 않는 세상을 갈구합니다. 주님이 지으신 사람은 누구나 존귀한 존재라고 믿습니다.
사진 :
톰킨스 해리슨 매티슨(1813~1884) <마녀검사>, 1853, 캔버스에 유채, 97.8×137cm, 피바디 에센스 박물관, 세일럼
● 찬송 420 너 성켤키 위해 https://www.youtube.com/watch?v=WVxw-1c8ZY8
2023. 1. 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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