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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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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요즘 교회의 세습에 대해 말이 많은데, 교회 안에서 행해진 죄는 생명과를 먹고 나온 지식으로 찾아야 하느냐, 선악과를 먹고 나온 지식으로 찾아야 하느냐? 생명과다. 그런데도 교회가 세습에 대해 세상 법에 가지고 가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차원에서 일반적인 개념으로 죄를 보기 때문이다.
천국의 백성이 교회문제나 신앙문제를 멸망 당할 땅의 백성에게 재판해 달라고 하는 것은 영이 산 자들이 영이 죽은 자들에게 가서 판단해 달라고 하는 것이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근본적으로 틀어져 나간 거다. 참 교회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 오늘날 교회적으로 횡행하고 있다.
교회는 천국복음을 받은 자들이요, 천국복음은 이 땅의 일이 아닌 하늘의 일이요 또한 성령님의 운동이기 때문에 모든 게 인간들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되어지는 게 아니다. 성경에 제자들에게 성령의 감화를 입혀서 전도를 보낸 이유가 바로 이거다. 그러니까 전도를 보내려면 성령을 받은 다음에 보내야 하는데 지금은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없이 바로 내보내니 나가서 세상 노름을 하는 거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심심해서 믿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면 마땅히 믿어야 할 인간의 본분이다. 그래서 아이가 갓 태어나서 우는 것을 영의 귀로 들으면 ‘제발 내가 사는 길을 알려주십시오’ 하는 울음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부모들은 자녀를 처음부터 물질적 개념으로 교육을 한다. 이것은 자녀의 일생을 우상 앞에 드리는 사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관을 뒤집어 놓는 거다.
예수님의 언행심사는 천국복음의 원료뭉치다. 하나님의 본질이다. 이 예수님에게 소크라테스나 중의 옷을 입힌다면, 즉 물질성의 세상철학을 입혀놓으면 예수님의 모양이 어떻겠느냐? 보기가 좋겠느냐?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런 식으로 예수를 만들고 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서 부부로 짝지어 줬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 때 아담의 영이 하와에게 조금 묻어나온 거냐, 아니면 아담이 하와의 영을 만든 거냐? 인간이 영을 만들 수 있느냐? 없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영이 있으니 각자가 자기의 영인성장을 위해 힘써야 한다.
자녀는 부모의 언행심사를 닮는다는 점에서 부모는 자녀의 교육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 말은 단순히 자식이 부모의 말을 잘 듣게 하라는 게 아니라 자녀의 영을 주격으로 교육을 하라는 거다. 가정의 인도자이든, 교회의 인도자이든, 국가의 인도자이든 하늘의 것을 받아서 내려와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기독교 문예부흥 운동을 복음으로 알고 있다. 자기의 장기나 특기를 나타내는 운동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두 부부를 만들어 놓은 것은 부부가 죽을 때까지 합심해서 생명과를 따먹는 운동을 하라는 의미다. 이를 위해서는 부부가 사상과 소원과 목적이 같아야 한다. 부부가 생명과 대신 선악과를 따먹으면 사망운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부부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니 죽기 전까지 헤어지는 것은 안 된다.
부부는 죽기 전까지는 서로 볶고 지지고 해도 헤어지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옛날 사람들은 딸이 시집가서 아기를 못 낳아서 친정으로 쫓겨 오면 친정에서는 그 집 귀신이 되라고 하며 시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래서 여자가 목을 매달아서 죽는 일도 있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이런 것을 이룰구원 면에서 어떻게 생각할 거냐? 우리는 복음의 원칙을 놓고 주님의 뜻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원칙은 맞는데 해석이 하나님의 사상과 딴판일 경우도 있다.
부부가 헤어지거나 계속 같이 사는 것은 원칙적으로 누가 판단해야 하느냐? 남이 판단할 일이냐, 자기가 판단을 내려야 하느냐? 자기다. 그래서 평생 고통을 겪으면서 배우자와 같이 일생을 마치든지, 아니면 헤어지든지 하는 결정을 자기가 해야 하는데, 문제는 자기가 어떤 결정을 하건 결정한 대로 살면 자기 속에 ‘구원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을 잘 판단해서 결정해야 한다. 왜냐? 자기가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부부가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았는지를 보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았건 이뤄진 구원을 보시기 때문이다.
부부가 평생 눈만 뜨면 지지고 볶는데도 계속 같이 살면서 구원을 이룬다면 무슨 구원을 이룰까? 그리고 이룰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의 양식을 먹어야 힘을 얻고 자라는 건데 아내가 예수 믿는 게 싫어서 남편이 교회도 못 나가게 하고 죽이려고 하는데도 남편과 계속 살다가 정말로 얻어맞아 죽는다면 이게 하나님의 뜻이겠느냐?
남편은 예수를 안 믿으면서 아내가 교회에 나가든 말든 상관을 안 한다면 이때는 남편에게 전도하면서 계속 살아야 한다. 또한 부부 중에 한쪽이 이단으로 나가면 예수 믿는 쪽이 이단을 따라가야 하느냐, 계속 진리 길로 가야 하느냐? 진리 길로 가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이룰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건데 진리이치가 아니면 이 구원이 건축, 건설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행동을 말하는 건지, 사상을 말하는 건지, 이치를 말하는 건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부모 형제 처와 자식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는 게 부모 형제 처와 자식을 내버리라는 거냐, 제일 먼저, 첫째로,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라는 거냐? 내버리라는 것과, 주님을 붙잡으라는 것은 전혀 다른 거다. 주님을 붙잡으라는 게 그 가정을 풍비박산 나게 하려는 거냐, 온 가정이 구원되게 하려는 거냐? 후자다. 이걸 생각해야 한다.
부부는 하나님께서 맺어준 것이니 한쪽이 이단으로 나가면 같이 따라가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부부가 되게 한 것은 진리 안에서 주님의 사업을 잘하라는 거지 이단 짓을 하라는 게 아니다. 그런데 영웅성이 들어있는 목사는 구원이 되는 진리이치를 깨달으려고 하지는 않고 남이 말하지 않는 기발한 주장을 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한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이단 삼단이 될 수 있다. 그 어떤 기발한 말을 해도 신앙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은 성경해석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이치가 들어있어야 자기가 살아생전에 이것을 자타의 구원에 써먹을 수 있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하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도 천국복음이 없으니 자기 동족인 유대에도 전하라는 거다. 사마리아는 혼합이다.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거다. 그리고 ‘땅끝까지’란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운동이 시작되었으니 이게 시작점이고, 여기에서 유대에도, 사마리아에도,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질적 성분적으로 봐야 해석이 바로 들어간다. 문자대로 하면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예루살렘에 가서 이곳에서부터 전 세계로 전해야 성경대로 실천하는 게 된다. 이러면 이 말씀을 실질적으로 지킬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영의 눈으로 믿는 사람의 정신 사상 면을 보면 예수님에서 열두 사도의 신앙이 있고, 그다음에 신도들의 신앙이 있고, 그다음에 이방인들의 신앙이 있다는 거다. 그런데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제일 중심된 바리새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죽였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믿음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자기와 제일 가까이 있는 자가 자기와 원수가 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을 본다. 신앙의 원수라고 할 때 한 집식구이라도 진리복음을 죽였다면 이 사람은 영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뜻적으로 진리복음을 좇는 사람과 거리가 먼 거다. 이게 땅끝이다. ‘땅끝’이란 그만큼 멀다는 거다. 안 통한다는 거다.
한번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고 해서 그 말씀을 다 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무한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깨달은 말씀을 곱씹으면 또 새로운 맛이 나오고 옳은 이치가 나온다. 이것은 없이 남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발한 것만 찾다 보면 이룰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된다. 기발한 발상이 문제가 아니라 옳은 진리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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