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4+6+4
마태복음 1:1~17
.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마태복음은 저자의 의도가 아주 강하게 적용된 성경이라고 나는 이해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 전통을 가진 이들에게 예수가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자 하는 목적의식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첫 장 그리스도의 족보에서부터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마태는 메시아의 족보를 하향식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누가복음의 상향식 족보(눅 3:23~38) 기록과 상이합니다. 사실과 진리를 기록하는 방식의 차이는 진리 전달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유리합니다. 자기 방식만 옳고 남의 생각을 무시하는 신학과 신앙 풍토는 소아병적입니다.
.
게다가 마태복음의 족보는 생략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메시아의 족보를 셋으로 구분하였는데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포로까지, 포로 이후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구분하고 그 대수를 14로 맞추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방식이 ‘할아버지가 손자’를 낳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상해 보이지만 유대 관습에서는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생략된 이름들이 있습니다.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마 1:8)는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아하시야 - 요아스 - 아마샤 - )웃시야를 낳고”로 기술되어야 옳습니다(왕하 8:24, 대상 3:11, 대하 22:1,11, 24:27 참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마 1:11)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호야김을 낳고, 여호야김은)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왕하 23:34, 24:6,14~15, 대상 3:16, 렘27:20, 28:1 참조)해야 합니다. 그런데 14라는 숫자를 의식해서 조상들의 이름을 생략하였습니다.
.
마태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왜 마태는 14라는 수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마태는 독자들에게 숫자 ‘14’를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경학자들은 이를 이스라엘 왕국의 기원, 왕국의 번영과 쇠퇴, 그리고 왕국의 멸망과 회복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한편 이를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하는,숫자를 통하여 텍스트의 숨겨진 내용을 발견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에 따르면 ‘14=4+6+4’입니다. 우리는 이게 뭔가 의아하지만 당시 유대인은 단번에 이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으로는 ‘달렙 ד+와우 ו+달렙 ד’이고 이를 문장으로 읽으면 ‘다윗’입니다. 아,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족보의 이름을 생략한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 왕’이라는 사실을 전하려는 마태의 집념을 배웁니다.
.
하나님, 유대인에게 예수를 약속된 그리스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개하려는 마태의 민족애를 배웁니다. 분열된 이 땅의 반쪽 백성에게도 왕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할 날을 주십시오.
2023. 1. 19 목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