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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이중성
마태복음 2:13~23
세상은 하나의 명제로 설명하기에 모자라는 복잡성이 있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좋다 나쁘다를 한 마디로 단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로운 행동에 악이 스며들 수 있고 사악한 일에 선행이 감추어있기도 합니다. 성경의 시가서는 인생과 세상의 이런 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가서에 따르면 삶에는 제1원칙인 규범적 지혜가 있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자연 질서와 삶의 순리를 잘 따르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교훈의 성경이 잠언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첫 원칙에 예외가 있음을 인정하는데 성찰적 지혜라고 합니다. 착하게 살았는데도 복 대신 재앙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욥기의 경우에 이에 대하여 교훈합니다. 세 번째 원칙은 만사를 선악, 또는 흑백 논리로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선과 악의 개념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역설적 지혜라고 부릅니다. 전도서의 경우가 이를 교훈합니다. 그래서 삶과 세상사를 보는 안목이 다채롭고 지혜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집트는 출애굽의 배경이 되었던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가치관을 반 하나님 나라 사고방식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그 사회에서 고난받고 멸시받는 히브리인을 구출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소수의 행복을 위해서 다수가 불행에 복무하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나는 출애굽기를 이러한 생각이 스며있는 성경이라고 읽습니다. 하지만 기근 앞에 절망하던 이스라엘 칠십 명 선조들이 이집트에서 사백여 년간 머물면서 번성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집트는 도피처이자 회복의 장소였고, 본래 만들어진 사람의 소중함을 왜곡하여 차별하는 악마적 세상이었고,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망의 도시라는 다중성을 지녔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이집트 피난도 이같은 맥락을 읽습니다. 당시 유대나 이집트는 모두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힘을 숭배하는 세상, 힘 있는 자만 살고 무력한 자에게 굴종을 요구하는 세상을 살아내려면 힘을 길러야 합니다. 사람의 소중함을 외면하는 세상에 맞설 힘이 아직 없다면 피하는 것이 비겁한 일은 아닙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마 2:13).
아기 예수님은 헤롯의 칼을 피하여 이집트로 피난살이를 떠났습니다. 이집트가 피난살이에 적합했던 모양입니다. 아기 주님께서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베들레헴 인근에는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모세 시대의 히브리 사내아이들이 그랬듯 세월이 흘렀다고 세상의 근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아예 아이들이 태어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자유의 세상에서 청년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부자유를 감지하는 역설의 시대입니다. 세상의 이중성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의탁하더라도 훗날 탈출하여야 할 수 있음을 알게 하셔서 이집트화의 늪에 빠지지 않는 믿음과 결기를 주십시오.
● 찬송 138 햇빛을 받는 곳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uLMIYqQB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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