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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황금률
마태복음 7:1~12
오늘 본문 성경을 읽으며 당혹스럽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하나님은 어떠한 비판도 금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서도 헤겔의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반․합의 논리까지는 아니더라도 건강한 비판까지 금하시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듭니다. 그래서 나는 ‘비판’을 ‘비난’으로 해석하여 읽습니다. 다행히 <새번역>에서는 ‘비판’을 ‘심판’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사랑이 생략되고 긍휼이 배제된 비판은 창조적 비판이 아니라 조롱 담긴 비난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상대에 대하여서는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못하는 당시 유대인의 태도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특히 지금 권력을 틀어쥔 자들은 온갖 사악한 일을 해도 죄를 묻지 않고, 그 상대편에 있는 자들에게서는 작은 잘못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털끝만 한 잘못이라도 찾아내면 침소봉대하여 모욕을 줍니다. 정치의 속성상 누구든 정적을 껄끄러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상대를 국가 운영의 건설적인 파트너로서 인정하고 국리민복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여야 옳습니다. 물고 물리는 정치 현실에 신물이 납니다. 나는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이 적용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기도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a). 나는 이 말씀을 신앙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세속의 차원에서도 이해합니다. 정치는 거룩한 것입니다. 사람의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갈등을 최소화하여 질서를 유지하며 시민들이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는 고도의 기술입니다. 오늘의 정치판이 치졸하기는 하지만 원리상 정치는 숭고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플라톤은 지혜에 의한 정치, 곧 철인정치를 언급하였습니다. 우주의 본질(아르케)을 골똘히 생각하고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이 정치를 하여야 이상 세계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er)이 정치를 하여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정치적 동물’로 규명하며 정치(학)를 윤리(학)의 연장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우주의 원리에 관심도 없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고, 윤리와 도덕에도 무관심하고, 인간을 죄인과 비죄인으로만 이해하는 자가 정치의 중심에 서면 역사는 후퇴하고 시민은 고통당하고, 가치는 왜곡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로 시작한 설교의 매듭이자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주님은 ‘하지 말라’는 부정어법의 구약 명령을 ‘하라’의 긍정언어로 바꾸셨습니다. ‘하지 말라’는 본심과 상관없이 억지로라도 할 수 있지만 긍정언어의 명령은 자신을 초월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는 도덕적 교훈의 정수이자 황금률입니다.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주님의 말씀 앞에 서면 어린아이가 됩니다. 말씀 앞에 겸손해지며 가르침에 순종하겠습니다.
● 찬송 366 어두운 내 눈 밝히사
2023. 2. 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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